북아프리카는 중요한 바다와 무역로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문화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언어, 인종, 종교 등이 복잡하게 섞이게 되었다.

서기 639년에 있었던 아랍의 이집트 침공은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불러왔다. 당시, 콥트 교회(Coptic Church)는 이집트 저항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새로운 무슬림 통치자들에 대해 남쪽의 기독교 세력들의 저항이 있었다.

이미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비잔틴 무역상인들이 홍해와 인도양 항로를 사용하는 아랍 상인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쿠쉬 어(Cushitic-speaking) 사용자들은 내륙의 무역로와 바닷가에 인접한 도시들을 침략하고 정복했다. 이 침략자들의 믿음은 여러 가지가 섞여있었다. 전통 아프리카 종교도 있었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있었다.

이슬람 지배하의 소말리(Somalis)족은 아프리카의 뿔 쪽에서 내부로 확장하여, 비우바(Biuba) 분지로부터, 젤리아(Zeila), 브라바(Brava), 그리고 모가디슈(Mogadishu)를 망라하는 해안 지역을 차지하였다. 900년 즈음에, 지부티(Djibouti) 남쪽에 위치한 젤리아는 가장 중요한 이슬람 무역 중심지였고, 내륙 쪽의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먼저, 쇼아(Shoa)의 술탄이 나타났고, 그리고 이페(Ifat)와 아달(Adal)의 왕국이 생겼다. 이슬람교도들은 소말리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목민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누비아(Nubia), 알로디아(Alodis), 노바티아(Nobatia), 그리고 마쿠리아(Makuria)의 기독교 왕국은 나일 강 골짜기에서 계속 생존하다가, 이슬람 메멀루크 왕국이 1275년에 건설되고 이슬람 펀즈(Funj) 술탄이 지배하게 되자 사라졌다.

한편 1200년경에 에티오피아에서는, 자그웨(Zagwe) 왕조가 악숨(Axum) 왕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여, 중부의 고지대에 있는 아데파(Adefa)에 수도를 정하고, 악숨, 암하라(Amhara), 쇼아를 망라하는 지역을 다스렸다. 달라크(Dahlaks) 섬은 젤리아의 항구로 가는 가장 중요한 무역 출구였다. 비록 왕은 기독교 신자였지만, 무역로 주변의 마을에 정착한 무역 상인들은 이슬람을 믿었다. 자그웨는 대군을 운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타나(Tana) 호수, 고잠(Gojjam), 그리고 쇼아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계속 기독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대부분의 정복 영역은 기독교를 믿는 군사 지도자가 다스렸는데, 이들은 수도원을 세우고, 세금을 걷으며, 무역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 충돌로 인해 무슬림 무역상인들은 젤리아로부터 내륙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왕국의 동부와 중부지역을 통제하였다.

자그웨 왕조는 분열되었고 새 왕조가 출현하였는데 이 왕조는 솔로몬 왕의 자손으로 주장되었다. 솔로몬 왕조는 쇼아로 수도를 옮기고, 기독교 왕국을 강압적으로 확장하여, 이슬람 교세의 전파를 늦추었다. 그들은 청 나일(Blue Nile) 강 주변의 비기독교 종족들의 땅을 침공하였고, 백 나일(White Nile)강 주변의 유목민족들을 빅토리아 호수 서북쪽과 케냐 고원지대로 몰아내었다. 1540년경에 에티오피아인들은 펠라샤(Felasha), 고잠, 그리고 다모트(Damot)를 통치하였고, 이슬람 왕국인 다와로(Dawaro), 하드아(Hadya), 발리(Bali)도 또한 함께 통치했다. 에티오피아의 세력은 타나 호수 서남쪽까지 확장되었다.

서기 1,000년과 1,500년 사이의 후기 철기 시대는, 북동쪽 내륙으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북쪽에서 쫓겨 온 유목민들은 자연스럽게 나일-사하라 어를 쓰는 남부 수단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의 이동을 발생시켰다. 서쪽의 강과 호수의 닐로테(Nilote)족과, 남부 닐로테인들, 그리고 동부 닐로테인들은 대호수(Great Lakes) 영역에 흩어지게 되었다. 서부 닐로테인들은 주로 이오(lwo)어를 사용했는데, 지금의 은코레(Nkore), 르완다(Rwanda), 부룬디(Burundi)까지 남쪽으로 퍼져서 히마(Hima)와 투치(Tutsi)족을 형성했다. 철을 제련하고, 가축을 먹이며, 곡물을 기르던 남부 닐로테인들은 투르카나(Turkana) 호수 서북쪽에서 빅토리아(Victoria) 호수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냔자(Nyanza)족들은 그 지역에 있던 쿠쉬어(Cushite) 사용자들과 합쳐지거나 그들을 흡수하여, 케냐 고원 지대의 칼렌진(Kalenjin)족과 탄자니아 중앙부의 다도그(Dadog)족을 만들었다. 역시 투르카나 호수 서북쪽에 있던 동부 닐로테인들은 이주하여 우간다 동북쪽의 카라마종(Karamajong)족과 케냐 중부와 북부 탄자니아의 마사이(Maasai)족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키타라(Kitara)에 츠웨지(Chwezi) 왕국이 생겼는데, 이 왕국의 수도는 비고 바야 무게니(Bigo Bya Mugenyi)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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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를 우두머리로 하는 네덜란드의 이주자들은 현재 케이프 타운(Cape town)에 무역 근거지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현재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힘 있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인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설립했다. 12세기, 남아공(South Africa)은 남부 아프리카를 지배했다. 남아공은 1990년까지 나미비아(Namibia)를 점령했으며, 앙골라(Angola)와 모잠비크(Mozambique)에서 발생한 내전에 반군들을 지원했다. 또한 1980년에 짐바브웨(Zimbabwe)라는 독립국가가 출현하기 전까지 소수 백인들이 세운 로데지아(Rhodesia)를 도왔다. 2000년에 들어와 짐바브웨는 흑인정부가 백인들이 소유한 땅을 보상 없이 몰수하여 땅을 소유하지 못한 흑인들에게 배분하려는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 정책은 폭력과 일부 백인 농부들이 살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주변국에 대한 남아공의 침략과 간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알려진 인종차별정책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지닌 불안정한 전략의 일부였다. 1948년 처음 소개된 이래, 아파르트헤이트 체계는 비록 그 어떠한 지역도 흑인이나 소수 아시아 사람에게 주어지진 않았지만 그 나라를 흑인과 백인으로 나눠진 지역으로 분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직 열 개의 지역만이 흑인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 땅들은 반투스탄(Bantustan) 혹은 홈랜드(Homeland)라고 불리었으며 전 국토의 13%정도를 차지했다. 이 중 4개의 지역은 남아공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된(independent)' 국가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세계 여러 나라들의 압력으로 남아공은 그들의 차별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의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1990년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점진적으로 그 국가의 차별조항은 폐지되었다. 만델라는 1994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홈랜드 정책은 폐지되었다. 만델라 정부는 인종차별정책을 대신하여 ‘화해(reconciliation)' 정책을 채택하였다.

만델라는 1999년에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타보 음베키(Thabo Mbeki)가 당선되었다. 특히, 음베키는 백인들과 대부분의 흑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빈부격차와 같은 많은 문제들을 직면했다. 또 다른 국가적인 커다란 문제는 HIV와 AIDS와 같은 치명적인 병에 대한 값비싼 약 값을 지불하는데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아공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HIV에 감염되었다. 그 중에 특히 보츠와나(Botswana)가 가장 감염비율이 높다. 남아프리카는 세계 최대의 HIV 감염국가이다. 20세기 후반에 전문가들은 보스와나, 레소토(Lesotho), 나미비아, 남아공, 짐바브웨에서 15세부터 49세 사이에 HIV에 감염된 사람의 비율이 5분의 1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발전된 국가이다. 그러나 흑인 대부분이 극빈자들이기 때문에 평균 GNP가 서양 기준보다 낮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인 보츠와나는 비교적 GNP가 높다. 독립 이후로 보츠와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광물들을 수출하는 특권을 누렸다. 가장 가난한 국가는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와 모잠비크이다. 그 두 나라의 경제는 기본적인 농업에 의존해 있으며, 홍수와 같은 자연적인 재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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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휘몰아치며 울부짖고 대서양의 파도가 무섭게 바위를 후려칠 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인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 희망봉에 출몰한다고 여겨진다. 

돛대는 부러지고 돛은 찟겨 지고 파손된 배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유령선2)이 영원히 희망봉 주위를 돌아다니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몇 세대에 걸쳐 전해내려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설이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돌로메우 디아스(Barthelomev Dias)로 거슬러간다고 알고 있다. 그가 1488년 아프리카의 최 남단에 도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기록된 2 년 후 그의 배가 희망봉에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설이 1641년 귀향 중에 폭풍을 만난 네덜란드인 판 더르 데칸(Van der Decken) 선장의 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그의 배가 침몰하는 운명의 날까지도 그가 희망봉을 돌아서 갈 것이라고 맹세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을 흘끗 본 사람들은 모두가 판 더르 데칸처럼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단지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의 미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희망봉의 등대지기들은 종종 폭풍을 맞은 배들로부터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U-보트가의 승무원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1939년 클렌카인(Clencairn)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파손된 오래된 배가 갑자기 형체를 드러낸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아마 가장 유명한 기록은 1881년 6월 11일 영국 해군(Royal Navy) 전함인 바칸데(Bacchante)의 젊은 해군 사관학교 생도의 일기에 기록 되어져 있다. ‘새벽 4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은 우리 뱃머리를 횡단하여 지나갔다.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은 배가 좌현 뱃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고했고 당직 장교 또한 배를 확실히 보았다고 했다. 유령선의 이상한 붉은 불빛이 200 야드나 먼 거리에서 매우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망보는 사람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의 저주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고 온전히 살려두었다. 그는 후에 조지 5세(George V)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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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South Africa)의 그리쿠아(Griqua)인들은 아프리카너(Afrikaner), 주로 코이코이(Khoikhoi)인 흑인들이 그 조상이다. 이들은 유럽인들의 옷을 입고 기독교를 믿었으며 네덜란드어를 사용했지만 백인 아프리카너 사회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8세기후반 많은 그리쿠아인들이 북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팔(Vaal) 강과 오랜지(Orange) 강이 만나는 지점의 북쪽에 그리쿠아랜드(Griqualand)를 만들고 정착하였다. 1820년부터 보어(Boar) 농부들이 점점 그리쿠아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쿠아랜드의 지도자인 아담 콕 3세(Adam Kok III)는 주인이 없는 땅에 자신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1860년에 약 2,000명의 그리쿠아인들과 그들의 소를 데리고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레소토(Lesotho) 주인이 없는 비옥한 땅인 드라켄스버그(Drakensberg)의 비탈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 지역에 그리쿠아랜드 웨스트(Griqualand East)라고 불리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1862년에는 콕스타트(Kokstad)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이에 따라 원래의 그리쿠아랜드는 그리쿠아랜드 웨스트(Griqualand West)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7-1868년에 팔 강의 하류지역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을 때 그 지역은 그리쿠아족의 지도자인 니콜라스 워터부르(Nicholas Waterboer)와 탈핑(Tlhping)족의 추장이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다이아몬드 생산지역에 대한 영토분쟁은 1871년 영국이 이 지역을 그리크아랜드 웨스트 영국 식민지로 합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쿠아랜드 웨스트는 1871년 영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합병되었고 9년 후 케이프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1879년 그리쿠아랜드 이스트는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다. 1903년 그리쿠아랜드 이스트는 흑아프리카 회의(Black African Council)로서 설립되었고 트란스케이(Transkei)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그리쿠아랜드 이스트의 동부와 서부지역은 동부 케이프 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은 현재 크와줄루 나탈(Kwazulu-Natal)의 중심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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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바브웨의 남동쪽, 마스빙고(Masvingo)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화강암 언덕이 평지로 둘러싸인 가운데 약 100m 정도의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있다. 꼭대기부터 언덕 남쪽까지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의 고대 쇼나(Shona) 문명의 유적인 거대한 화강암 벽이 세워져 있다.


    짐바브웨와 모잠비크 일부,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걸쳐 분포해 있는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쇼나족의 왕들과 족장들을 위한 장소로서 200 여개의 비슷한 짐바브웨 도시석조 건축물들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쇼나 왕조가 1100년대 후반부터 이 인상적인 돌벽돌을 이용해 건축을 하기 시작했다. 이 건축양식은 1300년대와 1400년대 무렵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궁전 내 건축물들을 완성함으로서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이 지역의 석조 건축물은 매우 장엄하여 오랫동안 일부에서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이 그 석조물들을 건축하였을 리가 없다고 믿었었다.

1. 부의 상징
    12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약 400년 간 그레이트 짐바브웨 지역과 그 주변에서 발달했던 도시는 번성했던 쇼나 문명의 정치, 종교, 그리고 상업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쇼나 사람들의 엄청난 부는 농업, 광산 채굴, 그리고 무역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작물을 재배하고 소를 목축했으며 철, 구리, 금을 캐서 가공하였고, 또한 아프리카와 현재 모잠비크 일대 해안의 스와힐리(Swahili)의 항구들과 무역을 하였다. 이 해안의 항구들을 통해 그들은 금, 구리, 상아를 수출하였고 비단, 중국의 자기, 인도네시아와 인도 그리고 유럽으로부터는 유리구슬, 페르시아(현재의 이란)로부터 파이앙스(faience ; 유약으로 아름답게 채색한 빛이 나는 값비싼 도자기) 등을 수입하였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화폐는 구리 잉고트(ingots ; 쇠막대)였다. 이러한 잉고트를 만들기 위한 동석 거푸집 주조장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세워졌고, 그 잉고트들은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2. 성벽과 건축물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거대한 돌벽은, 직경이 9 m 이상이고 진흙 벽에 짚을 얹은 지붕의 원형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큰 건물들은 대개 내부적으로는 각각의 방들이 구분 지어져 있고 6 m 높이의 지붕들로 이루어져 있다. 석조성벽들은 그 자체만으로 9 m 높이에 이르고 밑바닥이 5 m 두께로 만들어져 있다. 석조건물의 토대는 안정감 있게 잘 설계되었고 고르게 만들어진 해자 안쪽에 건설되어졌다. 

   이 돌벽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들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건축 작업은 110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고 약 300년간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든 벽들은 모르타르 없이 지어졌고 초기에 만들어진 부분은 손질하지 않은 돌들로 쌓여졌다. 후기에 지어진 부분은 잘 손질되어진 돌들과 아름다운 v자형 무늬의 띠 모양 장식이 특징이다.

벽들을 쌓는데 필요한 돌들을 구하기 위해서 쇼나의 석공들은 아마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기술로 돌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석 또는 화강암의 노출 부분 주위에 화로들을 만들어서 불을 지펴 돌들에 열을 가한 다음,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갑작스런 차가워짐으로 인해 돌들은 7.5 cm-17 cm 두께의 널빤지 모양으로 쪼개어 진다. 이 널빤지 모양의 돌들은 썰매로 건축 현장까지 옮겨져 돌망치와 철로 만들어진 끌로 작은 벽돌들로 잘려진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에 있는 거대한 원뿔형의 탑은 건축물로서나 초기 쇼나 사람들의 기술적인 성취도 면에 있어서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원래 안이 빈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안이 채워져 있다고 밝혀졌다. 10 m 정도의 높이에 가장 두터운 밑바닥은 5 m 정도의 폭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서쪽 옹벽에서 발견된 황소의 점토 작품은 1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3. 쇠퇴와 약탈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쇼나의 왕이 그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를 북쪽 잠베지강(the Zambezi River) 일대로 옮겼던 15 세기 중반에 들어서 정치 중심으로서의 중요성을 잃었다. 그곳은 오직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장소로서만이 명맥이 이어졌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거주민들이 줄루 음페카네/디파케인(Mfecane/Difaqune)으로부터 달아나는 응구니족(Nguni)들에 의해 쫓겨나고 포로로 잡히던 1830년대에 완전히 버려졌다.


    응구니족은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상당량의 보물들을 무시했거나 혹은 찾아내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그 잔해가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묻혀있던 보물들은 도굴꾼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값어치를 매길 수도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금 세공품들의 거의 전부가 녹여져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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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 혁명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비옥하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인을 통하여 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삶의 안정적인 방법은 강 유역을 따라 점차적으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100년 경, 이전에 적(Red)과 백(White)으로 나누어진 나일 강 위쪽(Upper ; 남쪽)과 아래쪽(Lower ; 북쪽)의 왕국은 메네스(Menes) 왕에 의해 통일되어 파라오 왕조(Pharaonic dynasties)가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중앙집권화된 통치 하에서, 이집트 문화는 발전하면서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 과학, 농업 그리고 상형문자는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그리고 남쪽 특히 누비아(Nubia) 등지의 주변국에 영향을 미쳤다.

파라오의 초기 4대 왕조는 고대왕국으로 명명되어지고, 쿠푸(Khufu), 카프레(Khafre), 그리고 멘카루(Menkaure)는 사콰라(Saqqara)에 계단형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초기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로 신에 대한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파라오의 믿음의 상징이며 지상의 신성한 왕권의 상징으로 건설되었다.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s)는 쿠푸(Khnum-Khuf. 줄여서 Khufu라고 함, 그리스어로 Cheops ;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제 4왕조의 왕 ; 2613?-2494? B.C.)대왕이 건설했다. 높이는 146.59미터에 이르며, 한 개당 2.5톤에 이르는 돌덩이 230만개로 만들어졌다.

농업에 기반을 둔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과 무역을 했다. 수단의 남쪽 경계, 리비아와 서부아시아까지 교역로를 확보하고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집트는 자주 출병하였다. 당시 이집트의 뛰어난 통치자였던 하쿠프(Harkuf)는 기원전 2,300년경 콩코 분지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원정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과 접촉하게 했고, 누비아까지 국경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외부와의 접촉으로 이집트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아스완 댐 근처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은 파라오 왕권이 남쪽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페피 1세(Pepi I)하의 제 6 왕조는 왕권이 약화된 시기였다. 이집트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왕자들과 지방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반란의 위협은 국가의 몰락을 가져와 2 세기 동안 이집트는 몰락을 겪었다. 이러한 일은 잉여농산물에 의해 국가가 유지되고 있던 이집트의 쇠퇴를 가속화했고, 결국 중앙 권력의 와해로 왕조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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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의 식민지 지배 하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은동고 왕국(Ndongo Kingdom ; 1623~1663)의 지도자인 은징가 은반디(Nzinga Nbandi)(혹은 안나 은징가(Anna Nzinga)) 여왕과 반식민주의 저항의 지도자들이 포르투갈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장면에서 은징가 여왕에게 의자를 주지 않자 여왕은 하인 중 한명을 의자로 사용한다.

 백인 무역업자를 조각한 조각상은 한 통의 술을 자신의 모자위에 놓고 균형을 잡고 있는 동안 한손에는 잔을, 다른 한손에는 증류주(Gin)를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상은 19세기 앙골라(Angola)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아프리카인들이 유럽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400년대 말에 왕실에서 기독교가 채택된 후 기독교는 차츰 콩고 왕국(Kongo Kingdom) 전체로 퍼져 갔다. 기독교의 진보는 콩고인들이 십자가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200년이 된 십자가가 발견되고 있다.

16 세기의 한 판화는 음반자(Mbanza)가 1300년대 이후 콩고 왕국의 수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500년대 자가(Jaga)족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지만 작은 마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조각상은 많은 중부 아프리카인들이 칭송하였던 “위대한 사냥꾼(The Great Hunter)” 키빈다 이룽가(Kibinda Ilunga)를 조각한 것이다. 어린 루바(Luba) 왕자는 새로운 사냥기술을 17세기 초에 룬다(Lunda)족에게 가르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회를 통합하고 룬다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후에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중앙아프리카는 대서양 무역과 잔지바르(Zanzibar)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아랍인들이 지배했던 인도양 무역로에 노예를 공급하던 중요한 장소였다. 노예무역은 수많은 중앙아프리카인들을 데리고 갔다.

일시적인 주거지는 나무와 건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 보금자리에서 주거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음부티(Mbuti)족, 트와(Twa)족 혹은 음벵가(Mbenga)족)은 원주민들이었다. 몇 백 년 동안 원주민들은 인근의 주민들과 떨어져서 고립된 채로 생활을 하였다. 

석유,가스,다이아몬드,망간,우라늄, 코발트와 구리 자원들이 중앙 아프리카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리를 생산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규모를 지닌 잠비아(Zambia)의 “구리생산지대(Copperbelt)”의 광산은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17세기 초에 그들의 왕에 의해 쿠바(Kuba)족에게 이쿠라(ikura) 혹은 “평화의 칼(peace knife)”로 소개되었다. 이쿠라는 숑고(Shongo) 또는 수리검을 대신하였다. 많은 이쿠라 칼들이 나무로 제작되었다.

17세기부터 쿠바족은 군장(chiefdoms)사회의 연방형태로 조직되었다. 이런 군장사회는 자신들의 규칙과 법에 의해 조직되고 훈련되었지만 왕의 통치아래에서는 모두 하나로 통일되었다. 은도프(ndop ; 쿠바 왕조의 조각상)는 일찍이 18세기 초부터 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쿠옴보카(Kuomboka) 축제는 매년 발생하는 잠베지(Zambezi) 강의 범람으로 인해 로지(Lozi)왕이 수도를 선정해서 옮기는 행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1700년대에 로지 왕국이 건설된 이후 이 축제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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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에 의한 무역구조의 형태는 경제적 성장을 증진시키고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나누어진 인종적 분리를 존중하면서 국가간 통합을 촉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양한 경제 기구가 만들어졌는데 어떤 것은 없어지고 어떤 것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잠비아를 포함한 동아프리카 공동체(East African Community ; EAC)가 관세, 물품세, 우편, 통신, 철도, 항구, 그리고 항공(East African Airways)등 공동 서비스를 발전시키기 위해 1967년 만들어졌다. 해안의 전략적 항구와 식민 지배의 역사로 인해 케냐는 주요한 수익자가 되었다. 그리고 동아프리카 공동체(EAC)는 우간다에서 이디 아민(Idi Amin)이 통치를 하던 1977년에 해체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는 동아프리카 공동체를 새롭게 만들기를 주장했다. 새로운 협약은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국민들은 3 개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동아프리카의 여권(East African Passport)을 발행하기로 했다.

1975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부 아프리카국가들과 리비아는 관세동맹과 지역경제 협력을 위한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를 결성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농업, 에너지, 산업, 통신, 그리고 자유무역이었다. 이 공동체는 과거 식민지의 국경을 초월하여 인적 물적 교류를 추진하고 있고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협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90년 ECOMOG 다국적 군은 라이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였다. 가맹국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ECOWAS의 조약에도 불구하고, 1983년에 나이지리아는 그 외국의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모두 추방했다.

1980년, 남쪽의 “최전선” 국가들은 경제적 협력과 발전을 위해 남부아프리카 개발 협력체(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ordination Conference ; SADCC)를 발족했다. 이 협력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경제, 통신, 수송 분야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1993년 이후 이 조직은 남부아프리카 발전 공동체(Southern Africa Development Community ; SADC)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남부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들을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SADC와 병행하여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참여하는 특혜무역지역(Preferential Trade Area ; PTA)을 만들어 국가간 무역과 산업발전을 촉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요한 성과중 하나는 UAPTA 공동 화폐를 만든 것이었지만 케냐같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들과의 차이점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SADC나 ECOWAS같은 경제협력기구들은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지역에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해외원조를 끌어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SADC와 PTA에 의해 제공된 서비스를 통합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전 프랑스 식민지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협력기구는 높은 생존률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관세를 낮추고 경제개발 촉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UDEAL(L'Union Douanière et Économique de L'Ouest)과 OCAM(L'Organization Commune Africaine et Mauricienne) 그리고 CEAO(Communauté Économique de I'Afrque de L'Ouest)를  포함한다. 북부아프리카의 석유수출국들은 함께 아랍 경제개발기구(Arab Bank for Economic Development ; BADEA)를 함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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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가나(Ghana)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초기 철기 시대 공동체중 하나였으며 니제르-콩고(Niger-Congo)어군 중 하나인 소닌케(Soninke)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왕국은 북쪽의 사하라, 세네갈 강, 그리고 남쪽의 니제르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금이 매우 풍부한 곳이었다. 이곳의 지배자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수단의 동쪽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나 제국은 철과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사하라 횡단 무역로는 말들을 제공하였고 철제 무기의 사용과 함께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웃의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번창하는 무역과 왕가라(Wangara)와 밤북(Bambuk)의 금광으로부터의 수입은 수도인 쿰비-살레(Kumbi-Saleh)를 번영시켰다. 제국의 전성기인 1050년쯤, 베르베르인의 무역거점인 와다구스트(Awdaghust)를 점령했다. 

8세기 초에 가나의 명성은 이븐 바투타(Ibn Battutta)와 알 파자르(Al Fazar)라는 아랍의 지리학자의 기록에 남겨져 있다. 상세한 기록은 1067년 가나를 여행한 알-바크리(Al-Bakri)는 가나의 왕은 자신의 무역과 사업을 위해 이슬람 관리와 서기를 자신의 궁전에 고용하고 있으며, 한쪽은 아프리카인이 한쪽은 이슬람 이주자들과 무역업자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도시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퉁카 마닌(Tunka Manin) 왕을 거대한 제국의 위대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가나와 알모라비드(Almoravids) 사이의 분쟁은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 영향을 주었고 1055년에 산하자 베르베르족(Sanhaja Berbers)은 아와다구스트를 다시 탈환했다. 1076년에는 가나에 침입하여 정복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가나 제국은 쇠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나의 왕과 교역을 하던 대부분의 금 상인들은 왕가라에서 온 만딩카(Mandinka)족이었다. 13세기 초에, 나일 강의 상류에 있는 부레(Bure)에서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남쪽의 소닌케족과 말린케(Malinke)이 사하라 횡단 무역에 활발히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가나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었으며 소쏘(Sosso)에 새로운 왕국이 등장할 수 있게 했다. 이곳의 통치자인 수만구르(Sumuguru)는 만린케 왕국과 소닌케 왕국을 정복하여 약탈하고 통치자들을 살해했다. 소쏘에 대한 저항은 말린케 족인 순디아타(Sunjata)에 의해 조직화되었는데 수만구루에 대항하기 위해 말린케 족을 통합하고 1235년 수만구르를 물리쳤다. 이후 순디아타는 부레의 금광 근처에 있는 니아니(Niani)에 수도를 정하고 말리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만사(mansa)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서 종교적 세속적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말리 제국의 다른 주요 무역 도시는 젠네(Jenne), 왈라타 타드메카(Walata Tadmekka), 그리고 가오(Gao)였다. 또한 주요 문화적 중심지였던 팀북투(Timbuktu)는 아칸(Akan)족의 금광이 발견됨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말리는 말리의 부와 안정, 그리고 학자들로 인해 유명해졌다. 비록 2세기 동안 지속되었지만 말리의 전성기는 서부 수단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말리의 통치자들은 모두 경건한 이슬람교도였다. 만사 칸칸 무사(Mansa Kankan Musa ; 1312-1337)의 재위시기가 가장 절정기였으며 1324년 메카에 순례를 다녀온 일은 말리의 부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랍 여행자인 이븐 바투타는 만사 술래이만(Mansa Sulayman ; 1341-1360)이 통치하고 있던 1352년에 말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말리 제국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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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들의 활동범위를 해안의 성과 요새로 제한했다. 그러나 165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에 의해 설립된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는 예외였다. 백인 정착자들에 의해 호텐토트(Hottentots)와 부쉬맨(Bushmen)으로 불려진 코이산(Khoisan) 인종 집단은 석기시대 이후로 남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선주민이었다. 줄루(Zulu), 코사(Xhosa), 그리고 소토(Sotho)족을 포함한 다른 집단은 약 400년을 전후해서 이주한 반투족들이었다.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설립된 케이프 식민지는 인도양으로 항해하는 선박의 기항지로 건설되었고 테이블 만(Table bay)은 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케이프는 동인도 회사의 선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방어를 위해 정착민들이 필요했다. 첫 번째 보어(Bores ; 네덜란드 농부)가 1652년에 도착했고, 인도인 여자의 아들인 시몬 판 더르 스텔(Simon van der Stel ; 1679~1700)이 총독으로 있던 기간에 많은 정착민들이 도착했다. 또한 프랑스의 종교적 망명자들고 이곳에 정착했다.

코이산(Khoisan ; Hottentots)족은 희망봉 주위의 땅과 동쪽 해안가를 점령했고 오늘날의 트란스케이(Transkei)까지 가능한 한 멀리까지 분포되어 있었다. 백인 정착자들이 내륙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을 첫 번째 카피르 전쟁(Kaffir Wars)이 시작되었다. 1659년부터, 네덜란드인들은 해안의 코이산족을 정복하여 몰아내기 시작했고 가축을 위한 목축지를 확보하기 위해 내륙지역의 토지를 점령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하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보어인들이 그레이트 피시 강(Great Fish River) 근처의 주루펠트(Zuurveld)를 향해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자 코이산족들이 저항을 했다.

1700년경에 케이프 식민지는 아프리카인, 말레이인, 인도네시아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통치집단으로서 백인들은 그들 자신을 코이산족과 노예 공동체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짧은 저항이후 코이산족은 그들의 영토를 포기하고 정착하였으며 노예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칼라드(Cape Colored)로서 알려지게 된 혼혈인종을 형성하였다. 코라나(Korana)라고 불리는 코이산족의 분파는 더욱 더 내륙지방으로 이동했고, 츠와나(Tswana)족과 그들이 기르고 있는 소를 습격했다. 그리콰(Griquas)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일파는 코이산족과 혼혈된 유럽인의 혼혈인종으로 케이프 식민지로부터 오랜지(Orange) 강과 팔(Vaal) 강 사이에 정착했다.

트랙보어(Trekboer) 정착자들이 코사(Xhosa)족의 목초지인 주루펠트(Zuurveld)로 이동을 시작했고 1779년 첫 번째 코사전쟁(Xhosa War)이 발발했다. 남동 아프리카의 모든 행정구역을 통괄하는 행정관청이 1786년에 흐라프 레이넷(Graaf Reinet)에 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795년에 정착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흐라프 레이넷 네덜란드 공화국(후에는 스왈렌담(Swellendam)이 됨)을 건설했다.

자국의 선박에 안정적인 공급을 원했던 영국은 1795년 네덜란드로부터 케이프 식민지를 처음으로 정복했지만 네덜란드는 1803년 빼앗길 때까지 통치권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영국은 1811~1812년에 4차 전쟁(Fourth War)에서 주루펠트의 코사족을 물리쳤다. 1818~1819년에 발발한 5차 전쟁(Fifth War)이후 영국은 캇 강 계곡(Kat River Valley)에 첫 번째 혼혈인종의 정착지를 건설했다. 코사족의 습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영국은 6차 전쟁(Sixth War ; 1834-1835)을 치루고 후에 더반 총독(Governor D'Urban)에 의해 코사족의 모든 영토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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