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코이산어족에 속하는 산(San)족과 코이코이(Khoikhoi)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노란색 피부와 작은 키 그리고 단음절의 흡기음(吸氣音, staccato click sound)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산족은 수렵채집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코이코이족은 주로 양과 소를 기르는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폭풍의 곶(Tormentoso ; The Cape of Storms)이라고 이름지었다.

케이프 타운이 쉽게 포루투칼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유령선 전설(Flying Dutchman)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람이 세고 폭풍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대서양의 파도가 높게 해안의 바위를 들이칠 때 희망봉의 유령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배는 마스트가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바람에 휘날리며 케이프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포루투칼 왕 Jo o는 그 이름이 나쁘다 하여 희망봉(Boa Esperan a ; Good Hope)으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케이프 타운은 1652년 4월 6일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흙으로 만든 5각형의 성을 축성하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폭퐁우를 피해갈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물을 비롯한 고기,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보급받을 수 있었으며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병든 선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이었다.

판 리비어크는 남아프리카역사에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책을 펼치면 판 리비어크와 그의 부인 마리아(Maria)의 사진을 볼 수 있으며 남아공의 어떤 도시를 가더라로 판 리비어크 거리를 만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케이프 타운의 백인정착지는 케이프 반도와 주변 내륙지방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유럽국가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이주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케이프에 이주한 아시아인들중 일부는 본국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케이프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예로 이주되었으며 오늘날 케이프의 말레이인들의 조상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이 세계의 문화를 모두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게 되었다.

1795년 나폴레옹이 해군을 강화함에 따라 케이프 타운은 무역루트로서 아주 중요하다는 전략적 인식하에 영국은 케이프 타운을 잠시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점령하여 몇 년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다시 악화된 프랑스의 세력을 막고 케이프 식민지를 통한 인도와의 귀중한 해상 무역 루트의 장애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케이프 타운을 침략하여 이주사회를 건설해나가면서 이미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네덜란드 후예들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후 케이프 영국총독은 케이프 아프리카너(Cape Afrikaner)로 불리는 이들을 영국의 통치하에 두고 싶어하였다. 이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가난한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영국의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우마차를 타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ck)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국은 자동적으로 반투계 선주민들과 일련의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반면 케이프 타운 항구는 이 시기부터 유럽과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화물과 병력과 전쟁물자가 많아지게 됨에 따라 '바다의 선술집(Tavern of the Seas)'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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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이주와 식민지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이주의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주요한 언어집단들이 서로 교류하였고 문화이입(文化移入)이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인종적 다양성은 인종의 우열과 열등이라는 악마적인 개념을 갖게 함으로서 남아공의 정치역사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백인들은 500년사라고 이야기하며 백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는 비어있는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남부 아프리카에는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비롯한 코이산족과 쿨루, 코사등 반투인들이 살고 있었다.
백인들의 최초의 이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는 네덜란드 본토에서 보내는 식민 이주자들과 종교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주해 온 프랑스계, 독일계 등의 이주민들로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18세기말에는 영국계 선교사들도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을 비롯한 남아공의 주요 지명을 보면 유럽의 다양한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인근 서부 아프리카와 동인도 등지에서 노예들을 수입하는 한편 자신들이 정복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은 새로운 인종집단이 칼러드(Coloured)가 생겨난다.

또한 유럽 본토에서 발생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혁명에 잇따른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네덜란드의 왕정이 무너지자 영국은 두 차례에 걸쳐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강제로 점령하였다.

영국의 케이프 타운 지배와 영국화 정책에 항의하여 이루어진 보어인 들의 대이주(Great Trek)는 수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들은 이주자(Voortrekkers)로 불리어졌고 우마차를 타고 소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철저한 켈빈교도였으며 영국의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이주해 각각 줄루족, 은데벨레족, 코사족 등 흑인 원주민들과 치열한 싸움을 거친 끝에 트랜스바알 공화국, 오렌지 자유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남아공에서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케이프 총독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케이프 타운에서 카이로까지의 종단정책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 세력간의 적대감정은 3년간에 걸친 앙골로 보어 전쟁(Anglo-Boer War)으로 나타났다.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1910년에는 케이프, 나탈, 오렌지, 트랜스바알 등 4지역이 합쳐져 대영제국내의 특수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The Union of South Africa)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정책을 내건 국민당(National Party)이 승리하기까지 남아연방의 정권은 줄곧 보어계 정당들이 장악해 왔으나 1991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는 연설에서 아파르트정책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드디어 1994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최초의 흑백 다인종 선거를 실시하여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6월 민주당과 국민당이 합당을 통해 민주동맹당(Democratic Alliance)이 됨으로서 아프리카너 백인과 영국계 백인이 서로 화합하게 되었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던 국민당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흑인정권 출범이후 남아공은 흑백간의 갈등 또는 흑흑간의 정권투쟁으로 인해 내전이나 종족분규로 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깨고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남아공 호는 인종간의 갈등을 화해와 타협으로 이끌어 무사히 안착했으며 염려했던 경제도 예측가능한 상황으로 회복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명실공히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헤게모니를 가진 지도국의 위치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아프리카국가들의 발전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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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456 2009/05/15 0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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