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섬은 모잠비크 운하에 의해 아프리카로부터 분리되었다. 마다가스카르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온 반투족인 와짐바(Wazimba)족, 서기 4세기에 이주한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8세기에 이주한 아랍인등 3가지 종족이 살고 있다. 말라가시(Malagasy) 인구의 대다수는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Polynesian)인이고 주요언어인 말라가시어는 여러 언어의 혼합으로 인해 생겼다. 이 섬의 사람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10세기로 아랍어로 쓰여진 것으로 보워크 이븐 차미리야(Bowork ibn Chamriya)가 쓴 경이로운 인도인(Book of Indian Marvels)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원형 말라가시(proto Malagasy)와 흑인(negroid)의 혼혈인 와크와크(Waqwaq)족이 동아프리카 해안지역에 정착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6명이 탈 수 있는 와카(waka)라는 카누를 이용하여 서부 인도에서부터 와크와크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인도양을 건너 무려 3,500마일 이상을 여행했고 최초로 동부아프리카 연안에 정착하였으나 그곳에서 밀려 결국에는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다. 와크와크족을 따라온 인도네시아 인들은 좀 더 크고 빠른 쿨룬 보(kunlun bo)라는 배를 이용했다. 중세에는 몇몇 다른 민족들, 아랍인, 아다톨리아인(Anatolians), 이란인 그리고 코모로스(Comoros) 섬으로부터 온 선원들이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했다. 와짐바족과 별개로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에 의해 노예로 수입되었다.

마다가스카르와 유럽인들의 초기 접촉은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이 주로 북부 해안에 상륙함으로서 이루어졌다. 페드랄브스 카브렐(Pedralves Cabral)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최초의 포르투갈인이며 1613에서 1619사이에 무역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정복했다. 18세기에 아랍인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영국인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일레 데 프랑스(Île de Frace), 케이프 콜로니(Cape Colony), 카리브해, 그리고 북미 지역으로 노예를 수출했다. 가끔 노예들이 섬의 다른 지역으로 매매되기도 했고 여자들은 첩으로 구매되어 지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는 모두 5개의 기후지역으로 나누어진다. 하투스(Hauts) 고원의 메리나(Merinas)는 인도네시아와 비슷하고, 반면 서부해안의 사칼라바(Sakalava) 소를 기르는 농부들이 사는 지역은 흑인들이 사는 지역과 비슷하며, 동부의 안타이프세이(Antaifsay)와 아마이모로(Amaimoro)는 말레이-폴리네시아 지역 또는 아랍 지역과 비슷하다. 안드리안다히포치(Andriandahifotsy)왕의 통치시기에 사칼라바족은 메나베(Menabe)와 보이나(Boina) 왕국을 설립했는데 가장 강력한 초기 왕국이 되었다. 메리나(Merina) 왕조는 안드리아마넬로(Andriamanelo)의 후계자, 랄람보(Ralambo ; 1575-1610)가 설립하였고 안드리아남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 ; 1787-1810)의 통치기간에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그는 외교적 수완과 정복을 통해 암보히망가(Ambohimanga), 암보히드라트리모(Ambohidratrimo), 그리고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통합하는 거대한 메리나 왕국을 건설했다. 그의 사후에 라다마 1세(Radama I)가 1828까지 통치했고 1861까지 독재적인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가 그 후계를 이었다. 영국의 총기로 무장한 라다마 1세는 타마타브(Tamatave), 폴포인테(Foulpointe), 그리고 마로안체트라(Maroantsetra) 같은 많은 소규모의 부족을 메리나 왕조에 복속시키는 한편 1817년과 1823년에는 베시미사라카(Betsimisaraka)를, 1822년에는 사칼라바를, 그리고 1824년에는 보이나를 공격했다. 시켰다. 18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종교와 기술이 폭넓게 전파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침략은 19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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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마다가스카르에 살았던 최초의 사람들은 10세기 전에 정착했던 말레이-폴리네시아인(Malayo-Polynesian)이었다. 이들은 후에 들어온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서 사람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는 동아프리카의 무역업자에 의해 14 세기부터 북쪽에 소개되었다. 몇몇의 강력한 왕국이 15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중 3개의 주요한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해안에서 처음 발달한 샤카라바(Sakalava) 왕국, 17세기에 동해안에서 생겼던 추장들의 동맹체인 치탐발라(Tsitambala) 왕국, 15세기부터 중부 고지대에서 발달했던 메리나(Merina) 왕국이었다. 19세기 초까지, 메리나 왕국은 마다가스카르 섬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1500년에 섬에 도착하는 첫 번째 유럽인은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슬람교의 정착지를 습격하였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포함하여 다른 유럽인들은 나중에 도착했고,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초에, 마다가스카르는 해적선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다. 19세기 초기에, 메리나의 왕인 라다마 1세(Radama I)는 영국과 프랑스 선교사를 환영했고, 1861년에, 라다마 2세(Radama Ⅱ)는 프랑스 무역 회사에 특권을 주어 큰 힘을 주었다. 영국은 1890년에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1895년 1월에 메리나는 복종하기를 거절했고, 프랑스 군대는 북서의 해안가에 상륙하여 그해 9월에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했다. 메리나의 여왕은 왕위는 유지하였지만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프랑스 통치에 대한 반대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끝 후에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46년에, 프랑스 연합(French Union)에서 자치 상태가 되었다.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1960년 6월 26일, 말라가시공화국(Malagasy Republic) 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사회 민주당의 총수였던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로서, 친 서양정권 특히 친 프랑스 정권을 따랐으며 그의 국가와 북 아프리카와의 깊은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1965년과 1972년에 또 다시 재선되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주장으로 사회적 불안과 치라나나의 사임을 야기 시켰다. 그 뒤 군총사령관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장군이 정부를 통치하였다. 1972년 10월 국민의 투표로 신임을 얻은 라마난초아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새 정권을 프랑스로부터 격리시켰다. 정부는 1972년~1975년 사이에 전 프랑스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프랑스인 공무원을 과 말라가시(Malagasy) 시민들로 대체하였다. 라마난초아는 또한 남아공과의 관계를 깨고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확립하였다.

1975년 사회 불안과 쿠데타 미수사건은 라마난초아가 육군 장교 리차드 라치만드라바(Richard Ratsimandrava)에게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6일후, 라치만드라는 암살당하고 해군 장교인 디디에르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가 대통령이 되었고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uncil)의 의장이 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었고, 라치라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국가 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주의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Madagascar)으로 개칭하였다. 라치라카의 통치권 아래, 비록 공산주의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을 유지해 나갔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는 향상되었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천연자원, 은행, 그리고 보험 등을 국유화했다. 1977년에 열린 의회선거에서 라치라카가 결성한 혁명 방어 국민전선(National Front for the Defence of the Revolution)이 승리했다. 이 정당은 이후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라치라카가 1982부터 1983년 재선되었는데 이 당시 정부는 자유시장 경제 정책의 채택과 정부의 역할 감소로 인한 많은 경제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라치라카는 1989년과 1990년 또 다시 재선되었고 정부는 정당의 자유로운 설립을 허가하였다. 1991년에는 야당이 라치라카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비록 라치라카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주도하는 과도 정부를 설립한다. 1992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고 여러 개의 정당이 재건된다.

1993년, 라치라카는 패배하고 자피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1996년, 자피가 헌법을 위배했다는 주장으로 탄핵소송에 직면하였다. 비록 그가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자피는 사임한다. 그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던 라치라카는 선거에 의해 복직하게 된다.

1998년,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는데 정부 체제를 통일된 중앙집권체제(unitary)에서 연방정부체제로 전환하여 6개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권한은 국회의 권한을 감소시킨 반면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되었다.

 
1. 마다가스카르 인들

마다가스카르의 국민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중부와 남부-중부의 고지대에 모여사는 인도네시아계 혈통과 ‘해안 사람들(Côtiers)’로 불리는 주로 해안에 사는 흑인 아프리카계 인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들은 고지대에서 생활하며 국가 총인구의 거의 27%를 구성하는 메리나(Merina)족과 15%를 구성하는 베실레오(Betsileo)족이다. 섬에 정착했던 초기의 사람들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인들이었다. 그들은 1500년-2000년 전 사이 이 섬에서 살았고, 그들은 후에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아랍인들과 유럽인의 이주민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마다가스카르의 역사는 강대한 3개의 왕국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왕국들은 작은 영역이 통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 왕국들 중 첫 번째로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쪽 해안지역에서 건국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거의 섬 전체의 반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1808년 여왕 라바히니(Ravahiny)가 죽은 뒤 분열되었다. 두 번째 왕국은 17세기에 동쪽 해안지역에서 추장들이 동맹을 맺어 만들어졌던 치탐발라(Tstambala) 동맹체다. 이 왕국은 베치미사라카(Betsimisaraka) 왕국을 세운 영국 해적의 아들로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라치미라호(Ratsimilaho)에 의해 정권이 이양되었고 또 왕국이 확대되었다. 세 번째 왕국은 중앙 고원지대로부터 15세기에 유래 되었고 바짐바(Vazimba) 원주민들을 정복한 메리나(Merina)족에 의해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메리나 왕국은 점점 커져갔고, 1791년에 베치미사라카 왕국이, 1822년에는 사칼라바 왕국이 멸망하여 메리나 왕국은 섬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과의 접촉은 1500년 포르투갈 함대가 섬에 도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300년 후 포르투갈,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는 섬을 파괴하며 그들의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17세기 말에는 미국과 유럽의 식민지에 기반을 둔 소규모의 해적들이 인도양을 항해하는 배들을 약탈했다.

19세기 중반 무렵 메리나(Merina) 왕국의 통치자 라다마 1세(Radama I)는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외부세력에게 마다가스카르를 개방하였다. 1817년 영국은 그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하였고 영국과 다른 유럽의 자문위원회에게 그들의 학교와 공업 그리고 군대와 기독교의 설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정책은 1828년 라다마 1세가 죽은 뒤 바로 뒤바뀌게 되었고 그의 부인인 라나발로자 1세(Ranavalona I)가 나라를 상속하였다. 그녀는 거의 모든 유럽인들을 쫓아내고, 학교와 교회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1861년 그녀가 죽고난후 프랑스와 영국은 다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프랑스와 영국은 메리나 왕조가 지배하는 마다가스카르의 섬의 통치권을 주장하였고 1883~1885년, 프랑스와 메리나 왕국 사이에 잇따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0년 영국은 영국이 이집트와 잔지바르(Zanzibar)의 통치권을 갖는 대신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1895년에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통치권으로 선언하였다. 여왕 라나발로나 1세와 국민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였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였다.

   

2.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1~5세기 :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함.
10~13세기 : 동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섬의 북쪽지방에 정착.

1500년 : 포루투갈의 해양탐험가인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첫 외국인이 되다.

1506~1506년 : 포르투갈이 마다가스카르 안에 있던 이슬람의 촌락을 파괴하고 무역시작.

17세기 : 메리나 왕국이 설립됨.
1643년 : 프랑스가 남부 마다가스카르에 포트 두핀(Fort Dauphin)을 건설.
1671년 : 프랑스가 포트 두핀을 포기하고 떠남.
1680~1720년 : 1680~1720년 마다가스카르가 해적들에게 중요한 거점이 됨.
18세기 : 마다가스카르에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이 만들어짐.

1787~1810년 : 메리나가 남포이나(Nampoina) 왕의 통치아래 마다가스카르 전역을 통치하게 됨.

1810년 : 라마다 1세(Ramada I)는 노예무역을 금지.
1817년 : 영국은 라마다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

1845년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 여왕은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럽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추방.

1861년 라나발로나 여왕이 죽은 뒤 라다마 2세(Ramada II)는 프랑스 무역회사에게 이권을 넘긴다.

1869년 : 라이니라이아리보니(Rainilaiarivony) 수상은 마다가스카르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승인.

1883~1885년 제 1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Franco-Merina War) : 메리나는 프랑스에 디에고 수아레즈(Diego Suarez)를 양보.

1890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보호국으로 선언.

1895년 : 제 2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 : 메리나가 프랑스의 지배를 거절한 이후 프랑스는 수도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

1896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선언된다.

1897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마지막 군주인 라나발로나 3세(Ranavalona III)를 퇴위시킴.

1900~ 45년
1915년 : 민족주의 비밀 협회인 Vy Vato Sakelika(VVS)가 금지됨.

1920년 : 마다가스카르의 시민권 운동을 주도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이 프랑스에 의해 억압됨.

1940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비시정부를 지원.
1942년 : 영국과 남아공이 마다가스카르를 정복.
1943년 : 영국은 마다가스카르를 프랑스 자유정부에 넘겨줌.

1945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게 국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선거를 치룰 수 있는 궈리를 부여.

1947년 : 독립운동이 일어남.
1948년 : 프랑스는 독립 운동에 참여한 80,000명을 진압.
1950~59년
1958년 : 마다가스카르는 정부를 갖게됨.

1960년 6월 26일 :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 공화국(Malagsy Republic)으로부터 독립. : 필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가 초대 대통령이 됨.

1965년 : 치라나나가 대통령에 재선됨.
1970~79년
1971년 : 남부 마다가스카르에서 야당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1972년 :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치라나나는 사임. :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의 지휘 아래 있는 군정부가 통치권을 장악.

1975년 : 디디에르 라차라카(Didier Ratsiraka) 대통령은 외국인 소유의 기업을 국영화하고 국명을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로 변경.

1982 라차라카가 대통령에 재선.
1983 라차라카 대통령이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
1991년 : 라카라차 대통령은 알버트 자피(Albert Zafy)에게 과도정부를 일임.
1992년 : 다당제가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에 명시됨.
1993년 : 자피(Zafy)가 대통령에 당선됨.
1996년 : 자피는 국회(National Assembly)에 의해 탄핵된 후, 대통령 직을 사임.
1997년 : 대통령선거 후 라차라카는 정권에 다시 복귀함.
1998년 : 새로운 헌법은 연방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킴.
2000년 : 열대 폭풍과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

   
3.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정치적 인물들

.진-자퀴스 라베마난자라(Jean-Jackques Rabemandanjara ; 1913-)

마다가스카르의 정치가이며 시인. 라베마난자라는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운동을 주장한 중요한 인물이다. Mouvement pour la Ranovation Malagache(MDRM)의 대의원으로서, 그는 프랑스에 의해 1947부터 1950년까지 투옥된 뒤 추방당하였고 그 뒤 극적으로 MDRM회원들이 조직되었고 반혁명운동에 가담한 약 80,000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1960년부터, 그는 외교장관에 임명되어 치라나나 정부를 보조하였다.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 1906~1976)

마다가스카르의 장군이었던 그는 1972년에 치라나나가 폭동과 민중의 힘에 밀려났을 때 대통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정부패에 관한 그의 행동이 인기가 있었지만 몇 번의 구테타 시도 후에 군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후에 라차라카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 1788~1861)

라나발로나는 그의 남편으로 첫 번째 통일된 마다가스카르의 왕이었던 라다마 1세가 죽은 후 1828년 말라가시 왕좌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라다마의 근대유럽 정책을 파기하고 많은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그녀가 죽은 뒤, 마다가스카르는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디디에르 라치라카(Didier Ratsiraka ; 1936~)

전의 해군 장교였던 라치라카는 1975년에 라마난초아의 몰락이후 마다가스카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생들과 중산계급으로부터 인기가 있었으며 농촌지방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1976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몇 개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1993년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있었다.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 ; 1912~)

치라나나는 1959년에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72년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했고, 그의 통치하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지위 아래 가브리엘 라마난초아를 지명하였고 그는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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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프리카의 룬다(Lunda)족은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남쪽, 앙골라 북주, 그리고 잠비아를 지배했던 강력한 룬다 제국을 건설했다. 룬다족은 중앙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반투족의 후예다. 16세기까지 룬다족은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남부 지역에 작은 분리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17세기에 키빈다 일룽가(Kibinda Ilunga ; 아마 16 세기 루바 왕국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는 루에지(Lueji)라고 불리는 여자 대추장과 결혼하여 최고의 추장이 된다. 다른 아내와의 사이에 캐어난 키빈다의 아들루셍기(Lusengi)는 루바 왕국의 정부 형태를 소개했다. 루셍기의 아들 나웨지(Naweji)는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룬다 제국의 토대를 쌓았다. 1700년까지, 룬다 제국은 무숨바(Mussumba)에 수도를 정하고 무와타 얌보(Mwata Yambo)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지방의 행정관으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이런 변화는 지방에서 무역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구리, 꿀, 상아와 노예 같은 중앙 아프리카 상품은 서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동해안을 근거로 하는 유럽인과 아랍의 무역업자들에 의해 점점 더 발전하게 되었다. 전략적 위치에 있었던 룬다 제국은 자국을 통과하는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과 총과 다른 제작된 상품을 거래했다.

무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고 무와타 얌보에게 바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17세기와 18세기에 다른 룬다 집단들이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룬다족 이주자들은 지금의 앙골라와 잠비아에 왕국을 세웠고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왕국은 현재의 잠비아에 세운 카젬베(Kazembe) 왕국이었다. 이 왕국의 건축은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었고 무와타 얌보인 무테바(Muteba)가 남자의 아들 응곤다 빌론다(Ngonda Bilonda)에게 무와타 카젬베(Mwata Kazembe)라는 칭호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빌론다의 후계자인 카넴보(Kanyembo ; Kazember Ⅱ)는 루알라바 강 동쪽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와 그의 후계자는 현재의 잠비아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다. 카젬베 왕국은 무역과 공물을 받아 1800년대에 번영을 누렸고 수도는 아프리카 대륙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내부적인 불협화음은 룬다제국의 통치를 약화시켰고 1880년대에 제국은 초크웨(Chokwe)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해체되었다. 벨기에,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는 룬다제 국의 영토를 식민지화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를, 영국은 1899년 카젬베 왕국을 합병한 북부 로데시아를, 그리고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벨기에 식민지가 되기 전에, 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은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 ; 1885-1908년)으로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의 개인 식민지가 되었다. 콩고는 1960년에 독립되었고, 1964년에 잠비아가, 앙골라는 1975년에 독립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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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Luba)족은 남동부의 콩고(Congo ; 이전의 자이르로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관련된 몇 개의 인종집단을 포함하고 있다. 루바 왕국은 중앙 아프리카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고고학적 발굴은 8세기 이후 카탕가(Katanga)지역에 계속해서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정부형태가 8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잘 발달된 통치체계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점점 증가하는 인구와 부족한 땅은 이 지역에서 부족간에 경쟁을 유발했고 그 결과 더 크고 강력한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고 강력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집단이 키살레 호수(Lake Kisale) 지역 주변에 나타난 루바족이었다.

구전전통에 따르면, 루바(이후에는 칼룬두웨(Kalundwe)라고 불렸음)족의 원래 통치자는 북쪽에서 온 송그예(Songye)였다. 송그예 콩골로(kongolo ; 통치자를 의미하며 왕의 뜻)는 칼룬두웨 여왕과 결혼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루바 왕국이 되었고 그 영토는 루알라바(Lualaba) 강과 루빌라시(Lubilash) 강 사이가 되었다.

15세기에, 송가예 통치자는 북쪽에서 온 쿤다(Kunda)족에 의해 추방되었다. 음빌리 킬루헤(Mbili Kiluhe)가 이끄는 쿤다족은 무와나(Mwana) 콩골로에 의해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다. 킬루헤는 무와나의 여동생 2명과 결혼했고, 그 중 한명에게서 칼라 일룽가(Kala Ilunga)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칼라 일룽가는 자라서 위대한 군인이 되었고, 루바족의 왕좌를 위협하고 콩골로에 도전했다. 그는 모계상속을 들어 그가 합법적인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콩골로는 결국 패배했고, 칼라 일룽가는 루바족에 대한 통치를 확고히 하고 쿤다 왕조를 열고 물로프웨(mulopwe)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550년에, 루바 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물로프웨는 정부를 대표하고 종교 지도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는 그를 도와줄 각료인 발로프웨(balopwe)를 두고 각각 특별한 임무를 주었다. 숭구(sungu) 수상으로서 국민과 물로프웨 사이에 중재를 담당했다. 은시칼라(nsikala)는 왕이 죽거나, 편찮을 때 일시적으로 왕의 지위를 대신했다. 이나반자(inabanza)는 물로프웨의 왕권을 강화하는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트위테(twite)는 군과 경찰의 지휘관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루바왕국의 장관과 모든 관직, 그리고 추장들은 칼라 일룽가의 자손들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루바족은 귀족정치 형태로 국가를 유지하였다.

1880년대에, 쿤다 왕조는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에 의해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으로 통합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통치는 이익이 많이 남는 고무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야만적이고 가혹한 통치를 하였다. 1907-1917년에 계속되었던 식민지의 통치에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벨기에 정부는 1908년 벨기에 콩고(Belgian Congo)로 콩고자유주를 통치하였고 1960년에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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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잠비아(Zambia)의 로지(Lozi) 사람들은 몇 세기 전에 번영했던 왕국을 설립하였다. 로지족은 17세기 또는 그 전에 범람원인 잠베지(Zambezi)강 북쪽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인 루이(Luyi)족의 후손이다. 루이 이주자들은 무왐바(Mwambwa)라는 여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 그녀의 딸인, 음부와무와브와(Mbuywamwambwa)가 계승하였고 그의 아들인 음보(Mboo)가 로지의 첫 리퉁가(litunga ; 왕을 의미)가 되었다. 음보 왕의 통치 기간 동안, 로지 왕국은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고 흡수 통합하여 왕국이 확장되었다. 그 당시 왕국은 음보와 그의 친척들에 의해 반독립적 상태로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러한 지배형태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초에 4번째의 리퉁가인 응가말라(Ngamala) 왕에 이르러서다. 1780-1830년까지 통치한 물람브와(Mulambwa) 왕에 의해 중앙집권화된 통일된 국가가 완성되었다. 물람브와는 로지족에 의해 정복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였고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로지 왕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무리 또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주자 집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앙골라에서 살다가 쫓겨 온 음분다(Mbunda)족이다. 물람브와는 루발레(Luvale)족과 은코야(Nkoya)족 등이 국경지역에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국의 국경 지역에 그들을 정착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지 왕국을 돕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음분다족은 왕국의 경제발전과 군사력에 큰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활과 화살과 같은 군사장비의 혁명과 카사바, 기장, 얌을 포함한 새로운 작물 뿐만 아니라 의료기술과 예술적인 기량에도 혁명을 불러왔다.

로지족은 물람브와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장남인 실루멜루메(Silumelume)와 차남인 음부쿠와누(Mubukwanu) 사이의 권력경쟁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분열되었다. 이 전쟁은 음반다족이 지지하는 음부쿠와누가 승리하였지만 그가 왕국을 재통합하기 전에 남아프리카로부터의 소토(Sotho)족의 일파인 콜로로(Kololo)족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했다. 콜로로족은 1840-1864년에 로지왕국을 지배했고 그들의 언어를 소개했다. 이후 이들은 콜로로족에 의해 추방되었던 로지족의 지도자 시포파(Sipopa)에 의해 쫓겨가게 된다. 이후 40년동안 연이은 권력경쟁에도 불구하고 로지 왕국은 계속 번영하였다. 그러나 1890-1900년에 영국과 맺은 조약에 의해 그동안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남아프리카 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의 통치에서 벗어나 영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영국은 1960년대까지 로지왕국을 지배했고, 1924년에 북부 로데시아(Northern Rhodesia) 식민지중 하나인 바로체랜드(Barotseland)로 왕국을 합병 시겼다. 1958년에, 북부 로데시아는 니야사랜드(Nyasaland)와 남부 로데시아(지금의 짐바브웨)와 함께 백인 소수가 지배하는 중앙 아프리카 연방(Central African Federation ; CAF)의 일부가 되었다. CAF는 1963년에 해체되었고, 잠비아는 1964년에 독립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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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차 카르타고 전쟁(Third Punic War)에서 일어난 자마(Zama)의 전쟁이후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해외까지 제국을 확대하게 된다. 이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통제권을 얻기 위해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튀니지와 이집트 로마 주로 편입시키는 한편 누미디아(Numidia)를 정복한다. 지난 세기 동안 로마는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집트는 로마제국에게 농산물, 특히 곡물과 파피루스 생산품 그리고 중동, 아시아, 그리고 인도양 무역로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제공한다.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와 키레나이카(Cyrenaica)에서 온 베르베르(Berber) 유목민들은 종종 사하라의 외곽지역을 따라 로마 정착지를 습격하였으며 어떤 땐느 멀리 떨어져 있는 리비아 해안지방과 이집트의 오아시스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습격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로마는 사하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농사가 가능한 마그립(Maghrib)지역을 정복하였다. 수비대는 국경 지역을 감시하고 요새와 도로망을 구축했다. 북아프리카의 팀가드(Timgad)는 전형적인 로마의 계획도시중 하나이다.

여러번에 걸쳐 로마와 베르베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에 의해 북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약 8 년간에 걸쳐 일어난 탁파리나스(Tacfarinas) 전투였다. 누미디아의 베르베르 왕은 로마 지배가 미치는 영토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로마 통치 말기가 되어서야 희망을 이룰 수 있었다. 로마와 베르베르 사이의 경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줄리오-클라우디안(Julio-Claudian)황제는 서쪽의 씨르타(Cirta)에서부터 남쪽의 타카페(Tacape)까지 로마의 힘을 확장시켰고 플라비안(Flavian) 황제는 시티피스(Sitifis)까지 확장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베르베르 유목민들은 국경을 넘어 낙타 대상이나 정착지를 계속 공격하였다.

로마인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는 상원에서 임명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총독은 로마에 지속적으로 옥수수를 공급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매우 문명화되어 있었고 로마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500여개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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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 아프리카의 주요 종족

팔라샤(Falasha)족 : 팔라샤인들은 비록 많은 수가 최근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북부 에티오피아의 고지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팔라샤인들은 에티오피아에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티그리냐(Tigrinya)어나 암하라(Amharic)어를 말하며 더 최근엔 히브리(Hebrew)어를 말한다. 팔라샤인들은 유대인이지만 최근 수백 년 동안만 세계 유대사회에 접촉을 했을 뿐이다.

암하라(Amhara)족 : 암하라인들은 대부분 북부 에티오피아의 고지에 산다. 비록 암하라인들은 에티오피아 인구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들은 에디오피아 역사에서 과거와 현재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배민족으로 역할을 해왔다. 암하라어는 암하라족의 언어이다. 암하라인의 대부분은 기독교도들이며 수세기동안 기독교는 암하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파르(Afar)족 : 아파르인(또는 다나킬(Danakil))들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그리고 지부티의 사막지역에서 산다. 아파르인의 대부분은 유목민족이다. 역사적으로 아파르인들은 다양한 술탄의 지위를 형성했지만 지금은 거의 반자치적이다. 아파르인들은 무슬림이고, 또한 아파르라 불리우는 언어를 쓴다.

오로모(Oromo)족 : 오로모인(또는 갈라(Galla))들은 동남부 에티오피아와 북부 케냐에서 산다. 과거에는 그들은 많은 무슬림 왕국들을 건설하기도 했다. 오로모어는 또한 오로모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의 오로모인들은 이슬람교나 기독교를 따르고 소수는 여전히 오로모 종교를 믿는다.

소말리(Somalis)족 : 소말리족 대부분은 소말리아에 산다. 일부는 에티오피아와 북부 케냐에서 소수 종족으로 살고 있으며 아주 적은 수가 지부티에 산다. 소말리인들은 씨족에 의해 구성되는 독특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소말리(Somali)라고도 불리는 언어를 쓴다. 대부분의 소말리족들은 무슬림이다.

카라모종(Karamojong)족 : 카라모종인들은 북동부 우간다에 산다. 그들은 소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는 반유목, 목축인들이다. 다른 카라모종인들은 카라모종어의 다양한 방언들을 쓴다. 아주 적은 수가 기독교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대부분이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뇨로(Nyoro)족 : 뇨로인(또는 바뇨로(Banyoro))들은 우간다의 북서부 호수지역에서 산다. 그들은 이전에 부뇨로-키타라 제국(Bunyoro-Kitara Empire), 후에 부뇨로 왕국(Bunyoro Kingdom)을 형성했고 지금은 우간다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뇨로인들은 또한 뇨로라고 불리우는 언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뇨로인들은 기독교도들이거나 무슬림이지만 뇨로의 전통종교도 여전히 믿고 있다.

간다(Ganda)족 : 간다인(또는 바간다(Baganda))들은 대부분 우간다의 북서부 호수지역에 산다. 그들은 부간다 왕국을 건설했을 때 중앙집권화된 군주국을 형성했고 지금은 우간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간다어는 또한 간다라고도 불린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많은 간다인들이 기독교도나 무슬림이 되었지만, 간다의 전통종교도 여전히 폭넓게 믿어진다.

키쿠유(Kikuyu)족 : 키쿠유(또는 기쿠유(Gikuyu))인들은 케냐의 최대 인종 집단이다. 키쿠유인들은 식민지시대에 종종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데 선두에 섰다. 키쿠유어는 또한 키쿠유라고도 불린다. 많은 키쿠유인들은 기독교도이고 그들만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웠다. 적은 숫자가 키쿠유의 전통 종교를 따르고 있다.

동아프리카계 아시아인(East African Asians) : 거의 인도에서 온 많은 아시아인들은 식민지시대부터 동 아프리카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우간다에서 작지만 영향력 있는 소수인종집단을 형성했다. 동 아프리카계 아시아인들은 여러 인도의 언어, 특히 구자라티(Gujarati)어나 펀자브어(Punjabi)를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와힐리어 같은 아프리카 언어나 영어도 사용한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은 비록 소수는 조로아스터교(Zoroaster)를 따르지만 힌두교도거나 무슬림이다.

마사이(Maasai)족 : 마사이인들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 지역에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소를 키우는 목축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마사이인들은 마아(Maa)라고 불리는 언어를 쓴다. 마사이인들은 이슬람교나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따른다.

후투(Hutu)와 투치(Tutsi)족 : 후투인들과 투치인들은 르완다와 부룬디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혼합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투치인들은 후투인들을 지배하였지만 최근에는 힘의 균형의 깨는 많은 폭력과 전쟁이 발발하였다. 두 종족 모두 부룬디에서는 룬디(Rundi), 르완다에서는 르완다(Rwanda)라 불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후투인들과 투치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도들이나, 토착 종교는 여전히 많은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니암웨지(Nyamwezi)족 : 니암웨지인들은 중서부 탄자니아에 산다. 그들은 니암웨지어의 방언들을 말한다. 과거에 니암웨지인들은 동부 그리고 중앙 아프리카에서 장거리 무역의 선구자였다. 적은 수의 니암웨지인들이 무슬림이나 기독교도들이고 대부분은 니암웨지의 전통 종교를 따른다.

스와힐리(Swahili)족 : 스와힐리인들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해안을 따라서 그리고 펨바와 잔지바르 같은 해안의 섬들에서 살고 있다. 스와힐리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아랍인,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의 혼혈로 생겨난 인종이다. 스와힐리인들은 인도양 무역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 결과로 스와힐리어는 동 아프라카 각지에서 공용어나 무역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스와힐리인들은 무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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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 아프리카의 역사

 
19세기에 무역을 장려하라는 목적으로 선물로 주어진 니암웨지(Nyamwezi) 조각은 니암웨지인들이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 무역의 선구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에티오피아어인 게즈(Geez)어는 과거에 기도서(성경)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896년 아도와 전투(Battle of Adowa)에서 에디오피아가 이탈리아를 패배시킴으로서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르완다와 부룬디의 후투(Hutu)와 투치(Tutsi) 사이의 인종 갈등은 동부아프리카의 최대 문제였다.

많은 왕국들이 빅토리아 호수(Lake Victoria)와 알버트 호수(Lake Albert)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이중 가장 중요한 왕국 중 하나는 부뇨로(Bunyoro) 왕국으로 16세기에 건설되었다. 부뇨로 왕은 비록 그의 역할이 거의 의식적이긴 해도, 현대 우간다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상징이다.

빅토리아 호수와 알버트 호수사이에서 번성한 또 다른 왕국은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 500년 전에 출현하여 우간다의 일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부간다인들은 탐험가 스페커(Speke)와 그랜트(Grant)의 방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곳에서 그림에 나오는 왕의 궁전을 보았다.

식민지 시대 이후로, 환금 작물은 동 아프리카에서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보통 환금 작물들은 차나 커피이다.

동 아프리카는 초기 인류의 근원지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300만년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유골은 인류의 진화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랄리벨라(Lalibela)교회는 여러 세기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교회로 거대한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만들어진 교회다. 에티오피아는 500년이 넘는 긴 기독교 역사를 갖고 있다.

30미터가 넘는 악숨(Axum) 왕국의 기둥은 왕의 무덤을 나타낸다. 악숨 왕국은 2,000년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번성하였다.

소금은 이전에 동 아프리카 사막 지역에서 중요한 무역상품이었다. 이것을 여전히 오늘날 몇몇의 암하라(Amharic) 인들의 여전히 통화로써 사용하고 있다. 벽돌 모양으로 사막에서 잘라서 운반한다.

1950년대, 거대한 규모의 수용소가 케냐의 마우 마우(Mau Mau) 폭동의 협력자라고 주장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설치되었다. 마우 마우는 반식민주의 저항 운동이었다.

19세기에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빗은 잔지바르(Zanzibar) 술탄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1800년대에 부유한 잔지바르 술탄왕국은 노예무역으로 매우 많은 이익을 얻었다.

동물을 사냥하는 사파리(Safari)는 동 아프리카의 풍부한 야생동물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켰다. 20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의 사냥꾼들이 코끼리의 엄니, 아프리카 들소의 뿔, 그리고 사자가죽 같은 기념물을 찾기 위해 이 지역에 몰려들었고 절정을 맞이했다.

세계의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동아프리카에 무역을 하기위해 방문하였다. 말린디(Malindi)의 술탄은15세기에 중국황제에게 기린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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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 아프리카의 아시아인

동아프리카의 소수민족으로서 아시아인의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케냐의 나이로비(Nairobi)와 몸바사(Mombasa)는 가장 큰 동 아프리카 아시아인 사회를 가지고 있지만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과 잔지바르(Zanzibar)도 중요한 지역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20여년 만에 우간다로 다시 모이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수백 년 동안 동아프리카에서 살아왔다. 이 지역은 무역업자들을 매료시켰고 다우(Dhow ; 짐을 옮기는 배)선은 상아, 금, 노예, 향신료를 인도산 직물, 철제품과 교환하기 위해 인도, 아라비안 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를 왕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아시아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몸바사와 우간다를 연결하는 동 아프리카 철도 건설(1896-1902)을 위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다. 동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 노동력은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 노동력으로서 이용할 수 없었으며 또한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졌고 이런 이유로 약 32,000명의 인도인 노동자들이 인도에서 동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계약 노동자로 동아프리카에 온 인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풍토병에 걸려 죽기도 했고 계약이 만료된 후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약 7,000명의 인도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아프리카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그들의 고향인 인도와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몇몇 인도인들은 철도 노동자로 계속 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상인, 인도인 노동자들을 위한 요식업을 시작했고 얼마 안가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시켜갔다. 동아프리카의 사업기회는 1920년대에 인도인들의 이주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그들의 무역활동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아프리카 인도 국민의회(East African Indian National Congress)는 아시아인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1914년에 만들어졌다. 이들의 요구는 입법의회(Legislative Council)에서 동등한 대표권과 특히 케냐 고지대(Highland)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고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분리하는데 대해 반대했다. 그들의 불만은 주로 그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유럽 이주민 정착자 사회를 겨냥하였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아프리카인보다 더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독립 당시 아시아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아시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시민권을 갖던지 아니면 영국의 영주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영국국민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새로운 독립국가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많은 아시아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안전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보호가 반아시아인 정서를 막아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새로 독립한 국가들의 아프리카화(Africanization) 정책은 시골지역에서 아시아인들의 상업 활동을 못하게 막았지만 도시지역에서는 이들의 상업적 능력과 기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게들이 국유화되고 직장에서 쫒겨났다. 케냐에서는 변화가 천천히 발생하여 따라 분열은 피했다. 하지만 우간다에서의 변화는 갑작스럽고, 혹독했다. 1972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Idi Amin Dada Oumee)은 약 8만 명에 이르는 아시아인 공동체에 추방령을 그들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비록 이러한 추방정책이 처음에는 넓게 지지를 받았지만 우간다의 경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우간다에 아시아인이 복귀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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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Tanzania)와 케냐(Kenya), 그리고 에티오피아(Ethiopia)를 포함한 그레이트 아프리카 리프트 밸리(the Great African Rift Valley)는 고대 인류의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지역으로 인류학자들이 동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역사시대에 고대 이집트(Ancient Egypt)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그 당시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었던 유향(乳香)(frankincense : 동아프리카․아라비아산 감람의 일종. 이스라엘 민족이 제례에 쓰던 고급 향료)과 몰약(沒藥 ; myrrh ; 미르라)을 생산하였다. 현재의 소말리아(Somalia)지역은 “푼트의 나라(Land of Punt)”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케냐와 탄자니아의 해안지역은 아라비아(Arabia), 페르시아(Persia), 인디아(India) 심지어 중국까지도 교역하던 초기 동부 아프리카의 상업 도시국가들이 성장하였다. 하지만 동부 아프리카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하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과 달리 그들의 경제를 부흥시켜줄 수 있는 천연자원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부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삶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가 적은 생존형 농부로 살고 있다. 농부들은 기근과 같은 큰 어려움을 가져오는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에 지배를 받는다. 개인당 GNP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브룬디(Burundi) 그리고 말라위(Malawi)가 가장 빈곤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0년대 말에 셋으로 분리된 소말리아(Somalia)의 통계숫자는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효과적인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소말리아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하지만 2000년에 소말리아 남부 지역에 과도 의회(transitional assembly)가 설립됨으로서 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푼트랜드(Puntland)라 불리는 지역인 북동지역은 소말리아의 재구성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분리주의자들은 소말리아 랜드(과거 브리티시 소말리아 랜드(British Somalialand))가 분리된 채로 남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전 그리고 다른 분쟁은 몇몇의 국가들에게 경제적 발전의 실패를 가져다주었다. 1952년에 에티오피아와 합병된 에리트리아(Eritrea)는 1993년에 오랫동안 끔찍하게 지속되었던 내전이 끝나면서 독립하게 되었다.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의 불편한 관계는 국경 분쟁이 발생한 1998년까지 지속되었고 평화계획이 채결된 2000년에 가서야 종식되었다. 브룬디와 르완다(Rwanda)는 후투(Hutu)와 투치(Tutsi) 두 인종간의 소름끼치는 분쟁에 의해 크게 흔들렸다. 많은 난민들이 무자비한 도살로부터 달아났지만 많은 수의 난민들이 자이르(Zaire ;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불안정을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과거 영국령 동부 아프리카(British East Africa)에 속했던 우간다(Uganda) 또한 비교적 이웃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쟁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1990년대에 보다 자유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인 탄자니아는 지금 현재 발전을 거듭하여 케냐의 상황에 근접하고 있다. 케냐는 독재적인 일당제 체제를 유지하였지만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하여 동아프리카의 관문 국가가 되었다. 1960년대에 이 3개의 영국령 동아프리카국가들은 동부아프리카 연합(East African Community)의 창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깊은 정치적, 경제적 차이는 범아프리카 협력(pan-Afriacn cooperation)의 기회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1999년에 새로운 협약이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우간다에 의해 서명되었고 이 계약의 목표는 관세 연합, 공동시장, 화폐 통합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위한 것이다.

말라위(Malawi) 또한 하스팅즈 카무트 반다(Hastings Kamuzu Banda)의 독재아래 고통 받았다. 하지만 1993년에 다당제가 복구되고 1994년에 선거가 실시되어 반다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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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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