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11월 1일 체결된 앵글로-게르만 조약은 처음으로 동아프리카를 분할했다. 그 분할에는 세가지 조치가 있었다. 술탄의 지위는 키스마이유, 브라바, 마르카와 모가디슈, 게다가 잔지바르 섬, 펨바, 마피아와 라무를 합병하면서 해안 지방까지 포함하였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에 인접한 대상의 교역로와 술탄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독일의 행동은 로부마(Rovuma) 강과 움바(오늘날 케냐와 국경을 이루는 영역),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소유했다. 위투의 해안선은 게르만에 의해 정해졌다.
사실상 그들 스스로가 우방임을 증명하기 위한 갈망으로 영국은 데레살람(Dar es Salaam)과 판가니(Pangani)에서 관례적 허용기간을 위한 협약에 관하여 독일 회사를 지원하기 위한 위임을 맡았다; 독일인과 킬리만자로 지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술탄 사이에 우호적인 단정을 도모하기 위해; 베를린 조약을 존중하기 위해 술탄을 자극했다. 영국의 국경은 움바 강을 따라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기까지 이어졌고, 타나 강까지 연결되었다. 북쪽의 그 두 강 사이에서의 분할의 몫은 영국의 것이었다.
이 기구는 1963년 5월 25일 30개 아프flak 국가들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1957년 가나의 독립을 시작으로 연쇄적인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된 국가들의 증가로 아프리카 내에 두개의 반대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 블록은 1961년 1월 모로코에서 회담이 개최된 이후 만들어진 카사블랑카 그룹이다. 이 그룹은 가나의 은쿠르마 대통령의 주도하에 급진적 자세를 견지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통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 블록의 회원국으로는 알제리 임시정부, 이집트, 가나, 기네아, 말리 그리고 모로코 등이다.
두 번째 블록은 1961년 5월 라이베리아 수도에서 열린 회담의 결과로 몬로비아 그룹으로 알려졌다. 회원국은 19개국으로 코뜨디부아르,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콩고, 다호메이, 가봉, 니제르, 세네갈, 어퍼볼타, 모리타니아,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토고, 튀니지, 에티오피아, 리비아 등의 국가이다. 이 블록은 정치적 통합 보다 경제적 협력을 주장하는 보수적이고 국내문제에 대한 불간섭 그리고 현 국경선의 인정 등이다.
이와같이 대륙 내에 두 반대되는 그룹이 분열되어 있자 1963년 아디스 아바바에서 당시 32개 독립국가 중 모로코와 토고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참여하여 카사블랑카 그룹과 몬로비아 그룹이 통합하였다.
동 회의에서 채택된 OAU헌장은 전문 33조로 되어있다. 동헌장은 OAU
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아프리카제국의 통일과 단결의 증진. (2) 아프리카인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상호협력과 노력의 조정 및 강화. (3)주권, 영토보전 및 독립의 수호. (4) 아프리카로부터 모든 형태의 식민지 불식. (5) 유엔 헌장과 인권선언을 존중한 국제협력의 중진 등이다.
상술한 제 목적들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협력분야로는 (1) 정치적, 외교적 협력. (2) 운수, 통신을 포함한 경제협력. (3) 교육, 문화협력. (4) 보건, 위생, 식량 면에 있어서의 협력. (5) 과학, 기술협력. (6) 방위 및 안전보장을 위한 제 협력 등으로 열거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OAU는 정치, 경제, 문화, 안보 등의 제 분야의 상호협력을 수행하게끔 고안된 다기능적 지역국제기구라고 볼 수 있다.
OAU의 조직으로는 (1) 국가원수 혹은 기타 대표로 구성되는 국가정부 수뇌회의. (2) 외무장관 혹은 각 정부가 임명하는 각료회의. (3) 수뇌회의에서 임명된 행정사무 국장과 사무차장 그외 사무국 직원들로 구성된 사무국. (4) 수뇌회의에서 선출된 21인의 구성을 가진 중재, 조정, 중재위원회 등 4개의 기관이 설치되며 각료회의 산하에 5개의 특별위원회를 두고 있다.
현재에는 아프리카 모든 독립국가들이 OAU에 가입하고 있으며 남아공도 94년 4월의 다인종 선거에서 흑인이 승리함으로써 OAU에 가입하였다.
아프리카에서의 쿠바(Cubans in Africa)
아프리카에서의 쿠바는 군사적 혹은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쿠바는 소말리아와 기네아와 같은 '혁명' 국가들에 대한 약간의 기술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본격적인 관계는 1975년 독립이 진행되고 있던 앙골라에서였다. MPLA가 독립 정부의 통제권을 얻는 것 처럼 보였으나 1975년 여름 동안 미국, 중국 그리고 남아공이 FNLA와 UNITA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MPLA를 지원했으나 마지못해 하였다. 쿠바의 피텔 카스트로(Fidel Castro)는 MPLA의 지도자인 네또(Agosti Neto)의 군사지원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한 소련도 그들의 전위세력으로 쿠바군을 앙골라에 끌어들였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하였으나 내전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쿠바군이 MPLA의 존재를 지켜주었다.
1977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쿠바는 그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1977년 이전에는 소말리아를 원조했으나 이후 에티오피아로 변경하였다. 이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셀라시 황제정권이 무너지고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소련이 에티오피아로 정책을 선회한 것이다. 쿠바군은 한때 앙골라에 1만 9천명, 에티오피아에 1만 6천 5백명, 기타 적도기니, 기네아, 기내비소, 모잠비크 등지에 약 1천 7백명의 쿠바인들이 있었다. 쿠바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소련은 하루에 2백만달러를 원조하였다. 소련은 아프리카에 있는 쿠바인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 비록 쿠바의 개입은 주로 군사분야였지만 9개 국가 이상에 많은 기술 전문가들을 파견하였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앙골라에서의 쿠바군 주둔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공이 반 MPLA 세력인 FNLA와 UNITA를 지원하기 위해 동부 앙골라로 군대를 파견한 것을 알았을 때 보다 더 쿠바군에 대해 관대했다. 그들은 쿠바군이 에티오피아에 파견되었을 때 보다 관대하였다. 비록 OAU가 외부의 개입으로써 모든 비 아프리카 세력들과 군사기지 제공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쿠바군을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첫째, 쿠바군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인정한 정부 자격으로써 초대되었고, 둘째, 적어도 앙골라의 경우 쿠바군은 OAU에 의해 인정된 정부, 즉 MPLA를 지원했으며 그리고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대항하여 싸웠다는 점이 그 이유다. 또한 쿠바는 개발도상국이며 쿠바군의 인종도 그들과 같은 흑인이었기 때문에 쿠바는 강대국의 꼭두각시 보다 동지 같았다. 더구나 쿠바는 아프리카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설립한다 든지 혹은 경제적인 혜택을 노린다 든지 등의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보상은 엄격히 이데올로기 적이었다.
중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Chinese Policy in Africa)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중국 자신의 소련과의 투쟁 때문에 이루어 졌다. 즉 1960년대 중국과 소련과의 사회주의 패권 투쟁은 제3세계에서 치열했는데 중국의 지지는 소련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앙골라에서 소련이 MPLA를 지지했을 때 중국은 FNLA와 UNITA를 지원했으며 이것은 결국 미국과 남아공과 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이 짐바브웨에서 은코모(Nkomo)를 지지했을 때 중국은 부◎베(Mugabe)를지원했는데 이 경우 중국이 지원한 무가베가 승리하였다. 소말리아가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였을 때 중국은 소말리아를 포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책은 소련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기술자들을 파견했던 나라들 중에는 소련과 중국이 중복된 나라가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정책은 몇몇 문제들 중 소련과 상당히 정책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아프리카대륙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소련의 '헤게모니'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가 남아공의 백인소수 통치자들이라는 사실에는 소련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제한된 분쟁들에 있어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를 거부하였다. 남아공에서의 무장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믿었다.
사실 학자들은 중국의 아프리카 정책을 전통적 관계를 향상시키고, 소련의 야심을 경고하며 또한 남아공의 소수지배를 비난하고 지역간 그리고 국가간의 안정을 지지하며 그리고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와 세계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기반을 조성할 것을 지지하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신중하고 화려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호의적이었다. 보수적인 지도자부터 급진적인 지도자들까지 중국방문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1980년까지 중국을 방문한 국가로는 토고, 베넹, 세네갈, 튀니지아, 모로코, 모리타니아, 알제리, 짐바브웨, 모잠비크, 탄자니아, 케냐, 부룬디, 마다가스카르, 시설군도, 모리셔스, 그리고 지부터 등의 국가들이다. 또한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다른 국가들이 거절한 다르살렘에서 잠비아에 이르는 탄자니아-잠비아 철로건설을 중국이 도왔주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있었다. 잠비아의 철로건설로 내륙국인 잠비아가 남아공이나 모잠비크 등의 국가를 통하지 않고도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확보하였다.
소련의 대 아프리카 정책(Soviet Union Policy in Africa)
소련은 아프리카에 대해 초기에는 사회주의 노선에 의한 경제개발이야 말로 아프리카 국가건설의 장기적 목표라고 주장하고 그 단기적 목표로서 아프리카 국가통합에의 해결책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외교정책을 수행해 왔다. 70년대에 들어와서 보다 실질적으로 국가이익에 기반을 둔 팽창주의 전제하에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소련은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와 전혀 무관하였다. 소련 자체의 격렬한 혁명과 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진 맑스주의 혁명은 1950년대와 60년대 때 독립운동의 폭발에 아무런 역할을 수행치 못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아프리카에 대한 자세는 관심만 거의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시 루뭄바(Patrice Lumumba) 측에게,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Biafra) 내전시에는 나이지리아 연방측을 지원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낫세르(Abdul Nasser)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1960년대 초에는 기네아와 가나에 약간의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70년대 초에는 소말리아와 관계를 설립하였는데 소말리아는 인도양에 있는 해군, 공군 기지를 소련에 제공하였다.
초기 소련의 팽창정책은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아스완 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저자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와 관련된 정책으로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소련은 아프리카에서 서구영향과 반대되는 정책을 시도했으며 또한 중국의 영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70년대에 있은 두 곳의 투쟁( 혼 지역과 포르투갈에 대항한 해방투쟁)은 보다 적극적인 정책과 보다 깊은 연루를 시켰다. 1975년에 소련은 앙골라에서 MPLA를 지원하였으며 쿠바군대의 파견과 군 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1978년에 소련은 소말리아로 부퍼 에티오피아로 그들의 정책지원을 변경하였는데 이곳에도 군사고문 단의 파견과 쿠바군의 사용을 제공하였다. 80년대 중반까지 적어도 7개 국가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으며 또한 적어도 20여개국에 경제 기술요원들을 파견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는 종종 소련의 개입으로 곤경에 처해지는 나라들이 있었다. OAU의 기본원칙은 '국내문제들에 있어 불갈섭'이며 일상정책으로 '아프리카 문제는 아프리카가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1970년대 말경에는 약 3만 6천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같은 군사적 지원은 주로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이루어 졌다. (1) 소련의 개입은 항상 아프리카 일부 정부가 초대하는 형식이며 (2) 관련된 아프리카 정부들은 그들 분쟁에 OAU의 지지를 받고있으며 (3) 소련은 항상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서 아프리카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반면,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외국군대는 곧 아프리카에서 떠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앙골라에 대한 소련개입에 지지하는 것은 반MPLA 세력들에게 서구국가와 남아공이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티오피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맑스주의를 주창하는 수많은 국가들의 출현은 소련에 대한 잠재적인 동지애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990년 초 소련의 몰락으로 아프리카대륙에서는 이념보다는 실리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으로 그들의 정책 노선을 변경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체제하에 피폐된 국가경제를 살려서 정책안정을 꾀하려 하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 도미노 현상도 이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USA Policy in Africa)
미국의 대 아프리정책은 소련의 세력팽챙을 변수로 해서 시기적으로 변모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볼 때 미국의 아프리카 관계는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시기는 아프리카 식민제국이 대거 독립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포드 행정부 시대인 1975년까지이며 제 2기는 카터행정부(1977-1980년), 제 3기는 레이건 행정부 시대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기인 60년대는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소련우위를 유지해 왔다. 닉슨, 포드 행정부 시대 남부아프리카에서 현상유지정책은 미국이 소련 우위의 세력균형을 지속시키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제 2기인 카터행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은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주장하고 있었던 현상유지론 및 세력 불균형론을 초월하여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였다. 또한 지역 내지 국제문제에 있어서 다수에 의한 정치영향력 이 신장되고 있는 제 3세계 국가와의 관계강화를 외교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카터행정부의 새로운 아프리카 정책은 도덕정치를 강조한 인본사상인 인권정책과 제 3세계와의 관계강화를 기본노선으로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내전 등 국지적 사태가 국제적 성격으로 전환되어 동·서 분쟁의 장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피하고 아프리카대륙 스스로가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하는데 그 정책방향을 두고 있다. 이와같이 카타행정부의 아프리카정책은 '경제협력'과 '자결권'을 기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3기는 레이건 행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들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앙골라내전에 소련과 쿠바가 개입한 이래 소련의 남부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증대는 물론 쿠바군이 앙골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고 소련세력 팽창의 전위대 역할을 해 옴에 따라 남부아프리카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추구하였다. 이같은 적극적인 개입정책은 남부아프리카에서 남아공을 보호하고 현재의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강화도 표방한 것이다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나 이는 또한 아프리카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대신 소극적인 정책으로 변경됨으로써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실익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설리반 원칙(Svllivan Principles)
남아공에서의 미국기업은 종업원을 고용할 때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 원칙은 1977년 제너랄 모타사(GM)의 감독위원회 중 최초의 흑인이자 침례교 목사인 설리반(R.Leon Sullivan)이 만들었다. 그는 미국인 회사에 고용된 남아공흑인 노동자들은 회사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설정하는데 동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1) 임금, 노동조건, 그리고 흑인들의 부가급부 개선. (2) 관리직원으로 흑인진급 가능. (3) 흑인 노동조합의 대표인정 등이다.
1980년대까지 130개 미국회사들은 남아공에 있는 미국회사의 모든 고용원의 75%가 설리반 원칙에 적용되었다. 그 원칙의 목적은 아파르테이트의 영향력을 좌절시키려는 의도 뿐만 아니라 아파르테이크 통치를 완화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다. 또한 남아공으로부터의 철수 위험과 회사를 방어하려는 훈련을 목적으로 하였다.
카터정부 하의 미국정부는 남아공의 평화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한 방법으로서 공공연히 설리반 원칙을 지지하였다.
남아공의 흑인, 아프리카 정부의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은 설리반 원칙을 반대하였다. 1980년 그 반대는 보다 강력해 졌다. 남아공 흑인들은 설리반 원칙이 아파르테이트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설리반의 회사가 공격당하는 괴롭힘도 당했다. 설리반은 그 원칙들을 준수하기 위해 미 의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프리카의 일반적 반응은 1980년 OAU각료회의에서 그에 대한 비난들이 표현되었는데 OAU는 "설리반 원칙은 남아공에 있는 외국인 투자를 위한 건설적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그같은 조치들로 인해 남아공으로의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며 해방투쟁에 해악이 된다"라고 말했다.
엔떼베 구출작전(Rescue at Entebbe)
항공기를 납치하여 이스라엘 인질을 억류한 우간다 엔떼베 공항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습격하여 인질들을 구출한 사건을 말한다. 여객기 납치범들은 비행기를 납치하여 비이스라엘인들은 석방하고 1976년 6월 7일 엔떼베 공항에 착륙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인질들 중 블로치(Dora Bloch)라는 나이 많은 여성은 병으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치밀한 계획하에 엔테베 공항을 점거하고 납치범들을 사살하여 승객들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1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하였고 블로치 여성은 병원으로부터 이송되는 동안 살해당했는데 이는 아민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다수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의 이같은 끔찍한 행위에 분노하였으며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그 일에 당황하였다. OAU는 1976년 7월 2일부터 4일까지 모리셔스의 루이스(Louis) 섬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우간다에서의 '이스라엘 행위'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 회담에서는 또한 그같은 납치범 해결방안이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이 인도적인 노력으로 인질들을 석방하려 했었다고 주장하였다.
포어권 아프리카(Lusophone)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국가들이다. 그 국가들은 모두 포르투갈의 전식민지 국이었으며 앙골라, 케이프베르데, 기네비소, 모잠비크 그리고 샹톰 프린시페 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이 다섯 포어권 국가들은 약 2천만명의 인구를 보유하며 넓게 홑어겨 있다. 모든 포어권 국가들은 1974년 혹은 1975년에 독립하였으나 공통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의 형성에 그들이 함께 협조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의 언어는 포르투갈과 그들이 유대관계를 맺게하며 이들 국가들이 독립운동 시에는 분열되었지만 현재는 포르투갈과 前식띤지들 사이에는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어권 아프리카(Hispanophone)
이들 국가들에서는 스페인어가 폭넓게 구사되는 지역을 말한다. 이들 국가로는 적도기니와 서사하라 국가가 해당된다.
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어 권 국가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용되는 유럽언어 중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약 40만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 두 국가들은 불어권이나 영어권 국가와 같은 동질적인 면이 드물며 다른 언어도 함께 구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어도 스페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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