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구기 와 시옹고/제임스 응구기(Ngugi Wa Thiong'o/James Ngugi : 1938-?)
케냐의 작가. 나이로비(Nairobi) 근처의 카미리투(Kamiriithu)지방의 일부다처제 기쿠유(Gikuyu)족 농부가족에서 태어난 응구기는 케냐에 있는 최고의 식민 중등학교인 얼라이언스 고등학교(Alliance High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우간다(Uganda)의 캄팔라(Kampala)에 있는 마케레레 대학(Makerere University College)에서 입학하였고 1964년 학부과정을 마친다. 이후에는 영국에 있는 리즈 대학(Leeds University)에서 수학하였고 이 때부터 그의 정치적인 견해는 바뀐다.
응구기는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1967년에 영국 나이로비 대학의 영어학부의 교원으로 임명된다. 그는 이때 케냐의 이중적인 문화적 삶에 대하여 경험한다. 영어 로 된 문학작품을 처음으로 발행한 케냐인으로서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대학들에게 영향을 끼친 아프리카 중심중의적(Aforcentric) 교과과정의 제안자로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978년 억압적인 정부정책에 항의하다가 1년 동안 구금을 당하기도 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오직 기쿠유어로만 쓸 것을 결심한다.
출감 후 나이로비 대학의 복직을 거절한 응구기는 오직 정부의 새로워진 억압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극장에서 그는 활동을 계속한다. 1982년에 체포의 위협을 받은 그는 영국과 미국으로 갔고 예일 대학(Yale University)과 뉴욕 대학(New York University)대학에서 가르쳤다. 응구기는 신식민주의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식민지의 언어보다는 아프리카어로 집필하는 것을 선호한다.
반식민지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독립한 앙골라(Angola)의 첫 번째 대통령이다. 앙골라 서부의 카테테(Catete)의 벵고(Bengo)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아고스티노 네토(Antônio Agostinho Neto)는 음분두(Mbundu)족 출신인 사제의 아들이었다. 그는 1947년에 앙골라에 퍼져가고 있는 포르투갈의 인종차별적 문화를 멀리하고 의학공부를 위해 리스본으로 간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포르투갈에서 공부하는 모든 아프리카 학생들이 그렇듯이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는 독재정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파괴분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네토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1958년에 앙골라로 돌아와 의료학원을 설립한다. 1960년에는 포루투갈 정치경찰(Polícia International de Defesa ; PIDE)에 의해 체포되고 처음에는 케이프 베르데의 산토 타오(Santo Antꐀo)로, 그 후에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네토는 1962년에 포르투갈에서 탈출하여 1961년에 앙골라에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반식민지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앙골라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지도력은 앙골라인민해방운동(Movimento Popular de Libertaçꐀo de Angola : MPLA)을 통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1975년 드디어 독립을 맞이하게 되고 네토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초기의 앙골라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을 맞게 되지만 결국 쿠바의 군사개입으로 남아공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한다.
1976년 말에 이루어진 남아공의 철수와 동시에 앙골라인들 에게는 스스로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서냉전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다. 냉전이 끝나는 1980년대 말에서야 앙골라는 궁극적인 재건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비록 소련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갖게 되었지만, 네토는 정치적으로 포로로 머물러야했고 1979년 그는 모스코바의 병원에서 숨졌다. 포르투갈에서 뛰어난 시인이었던 네토는 1974년에 최초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시집을 창작발행 하였으며, 그 해에 Sacred Hope 라는 제목의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하였다.
은데벨레(Ndebele)왕국의 창시자이자 군사 지도자. 사카(Shaka) 이후에 가장 두려움을 주었던 아프리카 지도자인 음질리카지는 팔강(Vaal River) 남쪽 음페카네(mfecane)를 일으킨 원동력이었다. 1820년 초반에 음질리카지는 사카의 줄루(Zulu)군에서 잠시 동안 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승리 후에 음질리카지는 붙잡은 소떼를 샤카에게 헌납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크랄(kraal)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줄루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고 음질리카지는 그들의 머리장식에서 깃털을 잘랐는데 이러한 행위는 대단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일어날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음질리카지는 몇 백명이나 되는 그의 추종자들을 주루랜드(Zululand)로부터 북서부의 트란스발(Transvaal)로 이동 시킨다. 이곳에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줄루 난민과 망명자들을 편입시키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소토(Sotho)의 씨족들을 정복한다. 음질리카지의 군사적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그의 군대는 밤에 마을을 포위하고 새벽에 신속하게 공격하여 방어벽을 무너뜨렸으며 어린 소년들과 여자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하였으며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남자들은 강제로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연대( age-set regiments)인 아마부토(amabutho)로 가입시켜 군대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은데벨레족의 아내로 만들었다.
음질리카지는 농업, 전쟁, 결혼 그리고 세금 등 모든 것을 통제하는 광범위한 법적 규범을 바탕으로 강한 중앙집권적 왕국을 건설하였다. 은데벨레 사회로 귀속한 난민들은 보호를 받는 대신 노동을 해야 했고 어린 남자들은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아마부토에 복무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음질리카지는 군사공격을 피하고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 은데벨레족을 자주 이동시켰다(1827년, 1832년, 그리고 1837년). 1830년대에 은데벨레족은 매우 강력한 전투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약 6천명에서 8천명에 달했다. 1832년에 음질리카지를 추격하기 위하여 사카의 후임자인 딩가네(Dingane)가 줄루의 전군을 파견하지만 줄루군은 단지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돌아왔고 전투에서 3개 연대를 잃는다. 은데벨레는 1836년에 베그콥(Vegkop)의 아프리카너(Afrikaners)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6천명병력 중 약 430명을 잃었으며 수천 마리의 아프리카너들의 양, 소 그리고 소달구지를 약탈하거나 죽인다. 음질리카지는 이후 아프리카너, 그리쿠아(Griqua), 그리고 로롱(Rolong)의 동맹군의 공격과 줄루의 침공을 피해 이동한다.
음질리카지와 은데벨레는 1840년대에 약 1만 5천에서 2만 명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여 지금의 짐바브웨의 남서쪽에 위치한 불라와요Bulawayo)에 영구적인 수도를 설립한다. 이곳에서 음질리카지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선주민인 쇼나(Shona)족을 지배 정복하고 남아공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보어인(trek-Boers)의 공격을 방어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 보호하였다(1847-1851). 그는 1852년에 아프리카너들에게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게하여 그 지역에 안전을 가져오는 듯 하였으나, 1860년대에 금이 발견됨으로서 유럽 이민자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자 이러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토지에 대한 권리문제로 계속해서 일어난 분쟁은 음질리카지의 아들이 로벵굴라(Lobengula)에 와서 끝을 맺게 된다.
현 남아공의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로인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가 5월 5일(월요일) 사망하였다. 그는 ANC가 창당되었던 1912년에 태어나 올해 나이 91세였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나이지리아 시인 벤 오크리(Ben Okri)가 시술루의 90번째 생인에 바친 ‘한 아프리카인의 만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당신, 월트는 하나님이 만들어 준 하나의 기적과 같다”라고 조문하였다.
오랫동안 백인 통치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만델라 전 대통령도 조문을 했다. “월트 시술루는 헌신적인고 자기 희생적인 지도자이다”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시술루는 1929년 트란스케이 엔코보(Engcobo)에서 요하네스버거로 왔다.
그는 단지 스탠다드 4(6학년) 까지만 학업을 했고 이후는 혼자서 배웠다. 시술루는 요하네스버거에서 광산노동자가 되었으며 위험스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1마일 이상의 땅속에서 일을 했으며 침낭에서 잠을 잤다. 그의 다음 직업은 이스트 런던에서 주방 보조원이었다. 그후 그는 일주일에 18실링을 받고 요하네스버그의 제과점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조합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임금인상을 위해 그의 동료들과 파업을 했다. 그 파업은 실패하였고 그는 해고 당했다. 시술루는 1940년 ANC에 가입했고 ANC 단체 중에서도 보다 과격한 ANC 청년연맹을 1943년에서 1944년사이에 형성하였다.
1920년대 말에 ANC 조직의 지도력은 남아공 공산당과 협력을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ANC 지도력에서 보수파들의 승리로 인해 회원들의 탈퇴와 조직의 구성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법제화되고 본격화되자 보다 젊은 지도자들 하에 ANC는 보다 호전적인 자세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ANC 청년연맹은 시술루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 그리고 넬슨 만델라의 합류로 급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이전의 온건파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ANC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백인정권에 체계적으로 대항하게 되었다.
시술루, 탐보 그리고 만델라의 지도력하에 ANC는 비폭력 저항, 파업, 보이코트 그리고 행진 등의 캠페인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ANC는 통행권을 소지한 사람에 한해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 ‘패스법’(pass law)법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며 이 시기 ANC 회원도 급속히 증가하여 1952년에는 10만명에 육박하였다.
1944년 시술루는 알버티나(Nontsikelelo Albertina)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시술루는 1949년 ANC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위한 ANC 운영위에 합류하고 1953년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불복종 운동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이 항시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인종차별의 상징인 통행권을 불사르는 운동으로 이 사건이후 수백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체포되었다. 시술루도 체포되어 1956년에 시작된 트리선 재판(Treason Trial)에 기소되었다.
1960년 국가 긴급조치 기간 동안 그는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그는 1962년 6번째 체포되었고 1963년에 4월 3일에도 24시간 억류되었다.
1963년 4월 19일 그는 재판에서 6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또한 6천란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그는 사보타지와 다른 혐의로 기소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악명 높은 로빈(Robben) 섬의 정치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1989년 10월 26년간의 감옥 살이를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는 1991년 6월 ANC 회의에서 ANC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94년 남아공의 최초 다인종 선거에서 ANC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1992년 그는 자유를 위해 헌신적인 투쟁을 한 공로로 ANC에서 최고의 명예를 여기는 Isitwalandwe Seaparankoe 상을 수상했다.
시술루는 1994년 그의 ANC 부의장 직을 그만두고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ANC 사무실에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다.
오바산조는 1937년 3월 5일 나이지리아의 옛 수도인 라고스 북부 아베오쿠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요루바족의 중심지로 그의 가족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으며 침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군에 입대한 뒤에는 영국 사관학교의 군사지도자과정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인도와 영국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오바산조는 빠른 속도로 진급했으며 나이지리아 내전(비아프라 내전:1967~70) 시기에는 특공대를 이끌고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공헌했다.
1975년 정권을 장악한 무르탈라 라마트 모하메드 준장은 1979년까지 민간정부에 권력을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976년 모하메드는 암살되었고 통치권은 그의 부관인 오바산조에게 넘어갔다. 오바산조의 통치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모하메드의 일정대로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1979년 선거에서 오바산조는 자신은 출마하지 않기로 하면서, 주로 이슬람 지역인 북부의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동포인 요루바족의 분노를 샀으나 북부의 하우사족·풀라니족 지도자들에게서는 신망을 얻었다. 이로써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군부 지도자로서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나이지리아의 정정이 극히 불안해지는 동안 오바산조는 외교 역할을 맡아 국제연합(UN)이나 기타 기구에서 여러 직책을 담당했다. 1995년 그는 아바차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아바차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감옥에서 석방된 오바산조는 다수당인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에 가입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63%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적이고 투명하고 부패 없는 나이지리아를 건설하겠다는 오바산조의 목표는 서구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으로 그의 민주화의 실험은 선진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미국은 나이지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경제원조를 지원하고 있다.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도 치열해 선진국들과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군인이자 정치가인 무세베니는 1986년부터 우간다의 대통령을 지내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 이미 많은 관측자들의 관심의 대상이던 우간다의 대통령 요웨리 무세베니는 1997년의 정치 발전으로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무세베니로서는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 사회적 생산기반의 개선 등 우간다가 활력을 되찾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했다. 또 우간다는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비스마르크'라고도 불리는 무세베니 대통령은 1당 통치와 민간기업의 혼합 기조를 무난히 이루어냈으며, 특히 우간다의 안보환경 개선과 지역 통합이라는 자신의 목표 추진에 도움이 되는 경우 인접 국가간 갈등의 중재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무세베니는 1944년 우간다 남부 음바라라에서 목축업에 종사하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거쳐 1966년 은타라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탄자니아 다레살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오보테 우간다 전 대통령 밑에서 이디아민에 의한 쿠테타(1971)가 발생하기 전까지 일을 했다. 재학 중 아프리카해방운동과 동맹관계에 있던 좌익 학생단체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이디 아민이 집권하자 무세베니는 탄자니아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망명길이었다. 이디아민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자 그는 탄자니아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하여 1979년 이디아민을 축출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1979년부터 80년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오보테와의 불화로 1980년에 물러난 후 과도정부에서 일하다가 1980년 우간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부정선거를 통해 밀턴 오보테가 승리하자 무세베니는 민족저항운동(National Resistance Movement)을 결성했다. 결국 저항세력이 승리해 1986년 1월 26일 무세베니는 우간다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96년 5월 9일 재선되었고, 1개월 뒤에 치른 총선에서는 그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장악했다.
청년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지만 경제발전에는 자유기업 체제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는 부족간의 정략정치로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언론이 종종 자신의 정책을 비판했음에도 언론의 자유을 허용했다. 무세베니는 또, 이제 싸워야 할 상대는 식민지 이주자들이 아니라 부패한 통치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방이 아니라 스스로를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마도 그의 정책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란 세력들에 대한 지지인데, 그중에는 1997년 인접 국가인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를 축출한 로랑 카빌라도 있다. 무세베니는 르완다 정부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투치족과 수단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자들과 투쟁하는 집단도 지원했는데, 그 집단의 지도자는 그의 옛 학교 동창이다. 무세베니는 자신의 목표가 정치 및 경제 분야의 지역 통합을 달성하는 데 있다고 선언하면서, 부패한 정권의 반대 세력들에 대한 지지는 그러한 통합체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무세베니하의 우간다는 성공적인 경제수행으로 최근 몇 년간 7~8%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아프리카의 신흥 공업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만연하고 있는 에이즈퇴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에이즈 발병률을 크게 낮추고 있다.
샘 누조마는 나미비아 민족주의적 지도자이자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오밤보의 외진 옹간디에라 지역에서 1929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축을 돌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야간학교에 진학했으나 16세가 되던 해에 식당차의 급사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철도노동조합의 결성을 기도한 이유로 쫓겨난 뒤에는 사무원과 가게점원 등을 전전했다.
윈혹(Windho다)에서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후 1958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의 전신인 '오밤보 인민기구'를 설립했으나 1960년과 1966년에 그는 추방된 경험이 있고, 1960년 4월 19일 SWAPO가 창설되자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통치에 항의하는 유엔 청원서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1966년 SWAPO를 이끌고 앙골라 남부를 거점으로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영토의 회복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누조마의 게릴라 활동은 나미비아 문제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3년의 유엔 총회는 SWAPO를 나미비아 유일의 합법적인 대표기관으로 인정했고, 1978년 안전 보장이사회에서는 나미비아의 독립조건들을 예시한 '435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8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1989년 9월, 30여 년 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샘 누조마는 유엔의 감시하에 치러진 11월의 선거를 SWAPO의 승리로 이끌었고, 1990년 3월 21일 독립이 이루어지던 날 신생국 나미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사기도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민주사회주의의 실용주의 노선에 더 이끌리고 있다고 토로한다. 공약으로 '국민화합'을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다시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고 이는 독재자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주의의 비판을 듣기도 한다.
앙골라 반군 지도자로 독립 이후 앙골라 정부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게릴라 활동을 주도해 오고 있다.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난 사빔비는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해외유학을 위해 장학금을 얻었다.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스위스 로산느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사빔비는 앙골라 독립지도자인 홀덴 로베르토가 주도하는 앙골라 인민연합(UPA)에 참가했는데 이 단체는 당시 앙골라 인민해방운동(MPLA)과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그는 UPA의 지도부와 결별하고 앙골라 완전독립국민연합(UNITA)을 결성하여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 대항해 싸웠다. 1974년에는 네토와 로베르토와 함께 과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하였으나 네토가 마르크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자 곧 무장투쟁을 벌였다.
사빔비는 앙골라가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앙골라에 남아 투쟁을 계속했던 유일한 게릴라 지도자였다. 이 당시 그는 자신의 소규모의 지원자들을 무장한 수천의 게릴라 조직으로 확대했다. UNITA는 남부 앙골라에 기반을 두고 앙골라 최대 규모의 종족인 오빔분두 종족의 후원에 의지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사빔비는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 등으로부터 지원을 얻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으며 중앙정부를 통치하고 있는 MPLA에 대항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MPLA는 무장투쟁에 의해 UNITA가 연합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MPLA에 대항하여 파행적인 게릴라 전투를 계속 전개했다. 특히 그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하고 있어 이를 반군자금으로 용하고 있다. 1992년에는 앙골라 총선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총선에서 패배하자 다시 정부군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하고 있다. 1994년 UNITA는 사빔비가 부통령으로 입각하는 조건으로 잠시 평화합의를 이끌기도 했으나 곧 평화안이 결렬되었다. 탈냉전과 남아공의 흑인정권 등자응로 UNITA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반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우간다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 케냐에 다음가는 작은 나라이다. 인구 1,760만명으로 지형상 적도가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고지인 탓에 사람살기 적합한 기후를 갖고 있다. 한국의 2배나 되는 넓이의 빅토리아 호수에 임하고 있으며 인근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강우량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의 적지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간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감탄한다. 특히 주변의 사막과 초원만을 보다가 이 나라에 들어오면 높고 낮은 기복이 교차되는 산세와 우거진 삼림 사이를 흐르는 시내들이 아름답다.
수도 캄팔라는 인구 85만의 도시인데 오랜 내전으로 지금은 황폐되었지만 도시의 위치 와 거리의 구조가 동양적이 인상을 주어 내란 전 평화시의 번영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일찍이 처칠이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표현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1862년 영국의 스페케가 나일강의 근원을 찾을 셈으로 이곳에 처음 왔었는데 그때 벌써 이 지역에는 부간다 왕국이 있었고 또 그 주변에 붕요로, 앙콜레, 토로 등 6개의 소왕국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유럽인이 오기 전 이미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인근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개화되었음을 말해준다. 1877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가 와서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했고 1879년에는 카톨릭 교회가 들어왔다. 그후 1897년에 이르러 우간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영국은 각 왕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식의 간접지배 정치를 해왔다. 이때에 이들 왕국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영국 지배하의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했다.
1962년 3월 영국은 이들 왕국을 우간다 연합왕국으로 구성,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우간다의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이 연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전 우간다 왕국의 카바가 왕 무테사2세가, 부통령에는 붕요로 전 왕국의 나다오프, 총리에는 밀튼 오보테가 임명되었다.
후에 오보테는 무테사 대통령을 추방하고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은 군대가 왕궁에 침입하였을 때 간신히 몸을 피하여 영국에 망명, 가난과 시름 속에서 1969년 사망하였다. 훗날 아민이 정권을 잡고 1971년 이 왕의 유해를 모국에 실어다 안장함으로써 국민의 환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 우간다의 정권은 오보테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디 아민으로 이어지면서 폭력과 00학정이 난무했고 오늘의 비참한 정세에 이르게 되었다.
오보테가 정권을 잡는데는 1966년 당시 육군 사령관이었던 아민의 공이 컸다. 1967년에서 71년까지 오보테 정권은 여러 형태로 권력을 남용했다. 자기 출신 부족인 랑고인만을 군 및 기타 정부의 고위직에 기용하여 불평을 샀다.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으로 국내에 없을 때에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를 추방하고 우간다의 정권을 잡았다. 오보테는 귀국 도중 기내에서 이 뉴스를 듣고 탄자니아로 망명했다.
아민은 1925년 우간다 북부 나일강 유역에 있는 소수민족 가구와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영국군에 입대하였고 1951년에서 60년까지 헤비급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었다. 우간다의 국민들이 6년간의 오보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무렵 등장한 아민은 국민들에게 큰 기대감을 주었다.
1971년 아민은 당시의 나이 46세로 우간다의 제 2대 대통령이 되었다. 초기의 국민 환호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하자마자 정당활동을 금지시켰고 입법, 행정, 사법과 군대를 한 손에 잡고 국군과 비밀경찰을 공포 정치의 무기로 삼았다. 아민의 사병은 그 4할이 외국인인 누비아족으로 부르는 수단인 이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고향인 서 나일지역 출신의 이슬람교도로 채웠다. 전 오보테 대통령의 출신부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학대했다. "신이 꿈속에서 자기로 0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 하면서 경제의 우간다화를 내걸고 1972년 8월 우간다 경제의 주권을 잡고 있던 영국적 아시아인 약 8만 명을 맨손으로 내쫓았다. 이들은 대부분 인도인이었다. 아민은 이들이 우간다의 경제발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것 같았다. 그는 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예 종주국인 영국과 구미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였으나 아민 대통령은 오히려 1973년 3월에 "영연방 수뇌회의에 참석하니 영 왕실의 특별기와 경비용 친위대를 보내라"고 호통을 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우롱하기도 하였다.
아민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농, 상인, 관료 등 유력 집단을 서로 대립시키는 분리통치의 수법을 사용했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는 가차없는 고문, 비밀살해 또는 집단살해를 단행했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입회 하에 살해하였다. 당시 유명인이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행방이 절연해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이렇게 살해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고 권력 기관인 "방위 평의회"회원 7명은 모두 아민의 친척이 거나 동족인데도 1977년 말에 이르러 그중 6명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잔인한 정치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공포정치 하에서 농업, 상업은 정체되고 행정은 마비되었으며 일상 필수품이 모자라고 물가고와 극심한 인플레가 일어났다.
농민은 공영시장에 농산물을 내놓으면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코피등의 주요산물을 밀수출한다. 우간다의 공업도 역시 주로 농산물 가공업으로 농업의 부진이 곧 공업의 정체와 연결된다. 이에 외화 수입의 9할을 정하는 코피가격의 하락과 인권문제에 따르는 미국의 제재 등으로 구미제국에 대한 수출(전 수출의 약 80%)이 떨어지자 경제는 격심한 위기 에 처했다.
군은 처음에 주거와 식품 등 물질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일반 시민들은 식빵, 소금, 설탕, 등을 얻기 위하여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군 상층에서는 케냐나 영국으로 출장가서 사치스러운 물건을 사며 즐겼다. 그러나 아민은 1973년 이후 이들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대우나 승진도 대통령 지신의 기호에 따라 좌우하였다. 대통령 출신지역의 군인이 아니면 신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군인들은 또 다른 형태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아민의 첩보망은 국민 속에 파고 들어가 있었으며 반란 응모가 발각되는 즉시 처형되었다.
반 아민의 기세가 전 군대에 파급되자 아민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옆 나라 탄자니아가 우간다를 침략하려한다. "는 허위보도를 흘려 우간다 군을 탄자니아 영내로 침입시켰다. 2∼3일 내에 우간다 군은 카재라 강에 접한 탄자니아 지역의 약710평방 마일을 점령하였다. 빗발 같은 세계의 여론에 따라 수일 내에 군을 철수시키기는 하였으나 탄자니아는 그 사이 약탈과 인명의 손실을 많이 보았으며 당시 탄자니아의 대통령 니에레레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우간다의 정글을 없앤다하여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사태는 아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979년 탄자니아 정규군과 "아민 타도"로 단결한 망명 우간다인 조직인 우간다 민족해방전선에 속하는 군인 약4,000명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관계로 수도를 방위하고 있던 리비아군 2,000명도 반 아민 세력을 막기에는 부족하여 같은 해 4월 6일 캄팔라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아민 대통령은 수도 캄팔라에서 80km지점에 있는 우간다 제2의 도시 진자에서 전용기를 이용, 리비아로 탈출했다. 이것으로써 악명 높은 검은 히틀러 아민은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1981년 2월 그는 망명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미국의 AP통신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는 지금 보통 사람이다. 요리도 하고 다림질도 하고 또 청소도 한다. 열두 명의 아들과 열 명의 딸이 있는데 한달 식비가 100달러이다. 나는 가난하다.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와 같이 스위스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도 없다. 내 아이들의 교육비를 미국 정부가 좀 마련해 줄 수는 없을까. 나의 조국 우간다에서는 13,000명의 지지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호국의 지원만 있으면 일주일 내에 우간다를 탈환할 수 있을 텐데..." 한때 종신 대통령, 육군 원수, 외무, 내무, 국방, 정보, 방송, 보건, 관광상들을 정무하며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아민 장군이 모국에서 추방되어 사우디 등 이슬람교 나라들을 방황하고 있다. 현 대통령 무세베니는 1989년 말 대통령 임기가 끝나지만 한번 더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말 한마디로 총선 없이 제 2기 대통령이 되었고 모든 각료들이 유임되었다. 그러나 유스후 후레 대통령의 잠정 정부, 고드퇘리 정부 등의 혼란기 이후 1986년 정권을 잡은 무세베니 대통령은 집권 이후 도로, 보건시설, 산업기관 등 많은 것을 개선하였고 특히 치안 상태 개선에 많은 힘을 기울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세베니 현 우간다 대통령은 1990년도에 OAU 의장이 되었다.
1979년 8뭘 1일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탕의 지시에 의하여 당시 보카사 황제에게 전달된 대통령의 친서는 아주 간단 명료했다.
"죄 없는 초 중고생 100여명을 살해했고 이 살해에 보카사 대통령이 깊숙이 관계되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는 더 이상 보카사를 지지할 수 없다. 왕위를 내 놓는 것이 유일의 길이다. 그렇게 하면 파리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고 또 연금도 받을 것이다. " 보카사 황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대통령의 고문 르테 쥬르니아크의 말을 듣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사절을 지팡이로 후려갈겼다. 사절은 맞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때 프랑스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입석 시켰었는데 가를 대통령은 보카사를 뒤로 밀었다. 사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 지스카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프랑스의 지도자는 "나의 친애하는 친척"이라고 하면서 보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카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후원자로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
중앙아프리카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황제는 대통령의 사자를 때림으로써 프랑스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보카사는 리비아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카톨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을 고쳤다. 50일 후 보카사가 리비아를 방문한 9월 20일, 21일 이틀동안에 1,000명의 프랑스군이 수도 방기에 내려 간단하게 보카사를 추방하고 1967년 보카사에 의해 쫒겨났던 데이비드 다고를 대통령에 복직시켰다.
트리폴리에서 카다피로부터 돈을 받은 황제는 쿠데타의 성공을 알고 프랑스에 입국하기 위해 파리 비행장에 들어왔다. 황제는 나폴레옹을 숭배했고 "스다르(고참병이라는 뜻)"라고 불러주는 드골을 아버지로 존경했다. 지스카르가 재무상을 지낼 때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기증하고 또 그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몽시에르 파랑(친한 친척)"이라고 부르며 국내에서 같이 수렵을 즐기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에게는 절대적인 자신을 가졌던 황제는 기내에서 50여 시간 걸쳐 프랑스정부와 입국을 교섭하였으나 끝내 거절을 당하고 코트디브와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1년 9개월 17일만에 끝났다.
보카사는 우방기 샤리(중앙아프리카의 구 이름)의 현 인구 280만의 5%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인 무바까인의 전통적 추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민족은 일찍이 프랑스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인 식민지 지배자 아래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정치 행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초대 대통령 다코는 보카사의 4촌 동생이고 수상이 숙부였다. 보카사 황제는 18세에 프랑스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22년간 아프리카, 유럽, 인도지나 등에 파병되어 15개의 훈장을 받고 대위로 승진했다. 1958년 모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프랑스 공동체내의 한 자치국이 되자 귀국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다.
1960년 8월 정식으로 독립을 하고 1966년에 군사령관이 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추방하고 실권을 잡았으며 1972년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1976년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1977년 12월 4일 보카사 황제는 여섯 마리의 흰말이 이Rm는 묵직한 마차에 실려 르네상스 궁전(전 대통령 관저)을 나왔다. 황제가 되는 대관식에 가기 위한 길이었으며, 2m나 되는 금지팡이를 받아 들고 6m 길이의 빨간 비로도 흰 모피의 외투를 입었 다.
"국민 앞에서 전 인류의 역사 앞에서 헌법의 준수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호를 선서한다. "고 선포하고 2,000개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왕관을 스스로 머리 위에 얹었다. 보카사는 이 대관식을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과 같이 화려하게 하고 싶었다. 이 대관식의 비용은 77년 국가 예산의 2배였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경제 원조를 중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황제는 수도 방기에서 80km 떨어진 베렝고 궁에서 백인 여성을 포함한 몇 사람의 부인과 20여명의 자식들과 함께 화려한 가구와 3대의 전용기, 35도의 말을 가지는 등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20여명의 자식 중에는 월남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있는데 동양적인 미모를 지닌 이 딸은 현재 의사와 결혼하여 이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라는 쇠퇴할 대로 쇠퇴하고 빈번한 숙청으로 인재가 없어졌다. 관료들은 황제에게 아부만 할 뿐 나라의 행정은 마비되고 생산은 독립 전으로 돌아가고 국민의 원성이 높아졌다. 보카사 황제 퇴진의 주요 원인인 아동학살은 황제가 수도의 초, 중학생에게 제복을 강제 착용시키는데 반발이 일어나자 이들을 형무소에 잡아 쓸어놓고 친위대로 하여금 학살케 한 것이다. 이 잔학한 행위에 황제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복 한 벌은 100프랑으로 주민의 월 평균 수입이200프랑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고가의 의복이다. 이 제복이 봉제공장은 황제의 소유이며 소매점은 황제의 부인이 경영하는 것으로 황제의 일족으로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이었다.
보카사는 지금 처음의 망명 지인 코트디브와르에서 환국하여 현 콜린그바 정권에서 재판을 받고 복역중이다.
"나는 어디든지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라고 하면서 지신을 신격화하고 국민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반동으로 보이면 여지없이 그를 숙청했다. 그는 아민과 같이 흉악무도한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와 민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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