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지난 8월 정부가 “한국이 201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하고 2020년대에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해 2030년에는 ‘삶의 질’ 세계 10위에 오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치적으로도 논란을 일으켰는데 케냐도 최근 비전 2030(Vision 2030)을 발표하면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다. 물론 이 발표가 현 집권당이나 무와이 키바키(Mwai Kibaki) 대통령이 자신들의 장밋빛 청사진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그 결과가 말해주겠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청사진을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고 또한 이 플랜을 통해 일관된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그 목표달성은 크게 중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는 케냐의 개관과 비전 2030의 주요 내용이다.

케냐는 동부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영국의 식민지를 받아오다 1963년 독립하였다. 케냐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과 동시에 반시장주의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과는 달리 일찍부터 시장경제를 선택하여 동부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화된 경제시스템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이후 정치적 부패 등으로 IMF나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못해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2002년 수평적인 정권교체이후 부정부패 감소와 안정적인 정책으로 다시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


케냐는 동아시아의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같은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플랜을 지난 10월 12일 발표하였다.

케냐 정부가 발표한 전략적 목표는 다음 25년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으로 1인당 소득은 현재의 33,120케냐실링에서 25년이 지난 시점에는 6배가 향상된 220,680케냐실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또한 부의 지표인 국내총생산(GDP)는 현재 1조1천2백3억 케냐실링에서 25년 후에는 12조1천6백80억 케냐실링으로 증가시킨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케냐의 국가 경제사회운영위가 이끄는 국가발전변화인 케냐 비전 2030으로 불리는 이번 플랜은 10월 26일 대통령 키바키에 의해 선포되었다.

이번 계획은 아시아 호랑이라 불리는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개발의 전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30년전 케냐와 같은 발전의 단계를 걷고 있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한세대가 지나자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경제구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의장으로서 국가 운영위원회를 이끌 것이며 또한 국가 경제 사회운영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이다. 이들은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주요 의사결정 팀으로 구성되며 6주까지 매주 4차례 미팅을 할 예정이다.



비전 2030(Vision 2030)

이것의 수행은 행정부의 수장이 의장이 되는 위원회에 의해 움직이며 주요 장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구성된다. 또한 매주 3내지 4회씩 회의를 개최한다. 필요시에는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공분야의 주요 운영자들로 구성된 핵심 전문가 팀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도 계속적으로 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은 5-7개 각료장관들의 부서장 비전 2030에 의해 제공될 것이며 프로젝트 담당장에 의애 매일 관리될 것이다. 이미 운영위위원회는 여러 후보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으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에 경험을 지닌 일부 국제적인 컨설팅 팀들에게 평가를 의뢰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나이로비 그랜드 레젠시(Nairobi's Grand Regency) 호텔에서 언론 미디어 사장들과 편집담당자들에게 발표되었다.

케냐는 과거에도 경제발전과 투자유치를 위해 두 번의 장기 정책들을 기획한 적이 있으며 여러 차례 5개년 경제개발 계획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케냐에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적용을 위한 1965년의 Sessional Paper No 10이 있으며 두 번째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경제계획 관리(Economic Planning Management for Renewed Growth)를 위한 1986년의 Sessional Paper No 1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계획들은 대부분 케냐의 가장 큰 문제인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의 의제들에서부터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들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케냐의 경제는 1964-1980 사이에 평균 6%가 넘게 성장하였으며 그리고 1980-1990년 사이에는 연평균 4.1%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90-2002년 사이 1인당 소득은 단지 1.9%의 성장을 보인 반면 같은 시기 인구 증가율은 2.9%에 달해 실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지만 2003년부터 케냐는 높은 경제성장을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5.8의 GDP성장을 보였다.


케냐가 최근 비전 2030 계획을 발표한 것은 이와 같이 최근의 경제성장세를 공고화하기 위함이며 장기적으로는 게냐를 삶의 질에 있어 중위권 소득을 보이는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높이기 위함이다.

케냐가 다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는 경제상황이 다소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35년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태국 등과 비교해서는 비천한 경제결과물을 보이고 있다.

케냐는 이들 국가들이 성공한 것은 수많은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전략적 비전에는 장기적, 단기적 아젠다들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성실히 수행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케냐는 야심찬 비전 2030을 제시하였지만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제대로 수행될지도 의문이다. 우선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문제이다. 이번에 발표한 계획이 단순히 집권당이나 대통령이 차기 정권을 노리고 설정한 선거용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만약 비전 2030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걸림돌을 먼저 제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 키루비(Chris Kirubi)와 같은 학자는 “이 계획이 정당들을 위한 비전이 아닌 케냐 국민들을 위한 비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론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한데 언론들이 정부의 시책에 대해 비판할 것은 적절히 비판함으로써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나이로비 주식시장의 의장인 짐나 음바루(Jimnah Mbaru)는 비전 2030을 바라보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개입에 전혀 개의치 않는 보르스(Bourse)와 같은 기관이 되어야 하며 세계의 많은 국가들 중에 청렴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국가는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케냐도 비전 2030의 성공이 정치적 논리로 해결한다면 결국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많은 분석가들은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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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담과 아프리카의 현실

아시아·아프리카의 연대를 표명한「반둥 회의」(1955년)가 올해로 50년을 맞이하였다. 반둥회의는 1955년 4월 18일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하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회의」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국가들이 연대하여 자립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아시아와 아프리카 정상들이 제3세계의 단결과 비동맹운동을 촉구했던 인도네시아 반둥회의 이후 50년 만에 다시 모여 반세기 전의 정신을 확인했다. 양 대륙 89개국 대표들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4월 22, 23일 이틀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열고 상호 정치, 경제 및 문화적 협력을 늘린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아프리카의 전략적 협력’ 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2년마다 외무장관 회의를, 4년마다 정상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 처럼 양 대륙이 5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미래를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50년 이전에 공유한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는 고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빈곤, 분쟁,HIV/AIDS 등 이대로는 아프리카가 2015년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제시한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는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 인구를 반감하고, 보건·교육에의 접근 확대를 제시하였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밀레니엄 개발 목표가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개발을 막는 부정적 요인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인들이 산재하여 국가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 부정적인 요인들을 살펴보면 먼저 에이즈 문제로, 에이즈에 의한 사망의 70% 이상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집중하며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에 의하여 10세 이상이나 하락하고 있다.
UNAIDS의 추계에 의하면 2004년말 현재 세계의 HIV 감염자는 3,940만명(3,590 ∼ 4,4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같은 해 신규 감염자는 490만명(430 ∼ 640만명), 그리고 에이즈에 의한 사망자수는 310만명(280 ∼ 350만명) 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에이즈 문제의 최근 특징으로는 경제 성장과 소득 격차가 현저한 중국이나 인도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급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이다.
2004년 말 현재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있어서 HIV 감염자수는 2,5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3%를 차지하는데 지나지 않는 이 지역에 에이즈 감염자 수는 세계 감염자의 약 2/3가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여성의 경우 3/4). 특히 아프리카지역의 성인 에이즈 감염률(7.4%)은 보합을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사태의 개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규 감염자와 에이즈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비슷한 결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중에서도 심각한 지역은 남부아프리카이며, 세계 인구의 약 2%가 생활하고 있는 아프리카 남부 9개국의 HIV 감염자 수는 전 세계 에이즈 환자 수의 약 30%가 집중하고 있다. 이들 국가 중 보츠와나는 2003년 성인이 감염률이 37.3%에 이르고 있고, 30 년전에 56.1세이던 평균수명이 현재는 39.7세 까지 하락하였다.
다른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스와질랜드의 에이즈 성인 감염률이 38.3%, 평균수명은 34.4세이며 레소토에서는 각각 28.9%와 35.1세, 나미비아는 24.6%, 33.1 세 등이다. 이밖에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와 위의 3개국을 포함한 아프리카 남부 6개국에서는 성인 2,600만명 중 500만명 이상이 HIV 감염자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한 노동력의 상실은 새로운 경제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은행은 2003 년9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 에이즈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말라위의 경우 2005 년까지 숙련 노동 인구의 약 절반이 에이즈로 사망할 우려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 세계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약2,000 억 달러가 소비되었던 반면 아프리카의 에이즈 대책 예산은 불과 1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아프리카 에이즈 대책이 무관심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지역분쟁으로 이 역시 아프리카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걸쳐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인해 약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아프리카 경제의 후진상황과 빈부 격차의 확대에 의해 많은 빈곤층이 충분한 음식이나 물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다음은 현재 아프리카의 곤경을 알려주는 주요 지표들이다.
․ 아프리카 평균 수명은 58세이며 18개국은 평균 수명이 50세 이하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경우 평균수명이 37세이다.
․ 아프리카 전체 인구 중 절반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을 하고 있다.
․ 전세계 34개 최빈국 중 아프리카 29개국이 최빈곤 국으로 지정되어 있다.
․ 18개국의 여성 중 절반이상이 문맹이다.
․ 아프리카 28개국에서 5세이하 어린이들 중 1천명당 140명이 사망하고 있다.
․ 아프리카 전체인구의 58%는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아프리카는 세계의 불행한 대륙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가장 우선시되는 문제는 지난 50년간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선정(good Governance)결여 등 정치적 불안정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특히 냉전시기를 중심으로 구미 선진국은 아프리카의 광물·농산 자원이나 이권의 확보, 지정학적인 전략적 관점에만 우선시하고, 부패나 인권 침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등에 대한 군사 원조를 포함한 정치적 원조를 계속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는 막대한 금액의 원조가 투하됐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의 향상이나 경제 성장에는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위기 극복 노력들
현재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존」자체가 과제로 안고 살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의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에이즈에 관해서도 21세기 들어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예방이나 교육 그리고 각국 정부들의 보건시설 강화 등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경제면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은 생존을 위해 중소·영세 기업 등의 경제 활동이 현저하게 성장하고 있다. 한편,21 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있어 분쟁이 점차 감소하여 정치적 불안정도 개선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AU)의 결성이나 아프리카 자신의 상호감시 체계의 실시 등 아프리카 스스로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분쟁해결이나 관리 강화의 프로세스가 진전되고 있다.AU는 2002년 7월 출범하였다. AU는 아프리카의 숙원인 '분쟁 종식'과 '빈곤 추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을 목표로 하고 있다. AU의 조직으로는 각국 수반으로 구성되는 아프리카 의회를 비롯해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평화안보위원회, 사법재판소 등이 있고 재정 관련조직으로 아프리카 은행(The African Bank), 아프리카 통화기금(The African Monetary Fund)과 아프리카 투자은행(African Investment Bank) 등이 있다. 특히 유엔 안보리를 본떠 15개국으로 만든 평화 안보리는 대륙의 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맡게 된 AU의 핵심부분이다.
또한 21세기에 들어 아프리카는 분쟁, 교육, 보건 등에 관하여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아프리카의 노력은 단순히 아프리카만의 노력에 의해서 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으며 지금 이야 말로, G8 등 선진국들이 본격적인 아프리카 지원에 나서야 할 때 이다.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선진국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개발원조자금(ODA)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으로 아프리카의 주요 ODA 공여국인 일본의 경우에도 전체 총 ODA의 삭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원조가 국가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원조의 방법에 대해서도 정부만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기업 등 민간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참가여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의 경우 ‘반둥 회의’ 5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 정부의 아프리카 원조에 관하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아프리카 원조는 일본 ODA 전체의 불과 8.8%에 지나지 않으며 G7 국가들 중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국제 공약을 지키고,ODA를 GNI(국민총소득)의 0.7%로 증액하는 것.
둘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ODA 배분을 전체 35%까지 끌어올리는 것.
셋째, 대아프리카 원조의 목적을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달성과 빈곤 삭감과 격차 시정에 두고,「아프리카 일본 연대 기금」을 설립하여 대 아프리카 원조를 동 기금으로 일원화되는 것.
넷째, 동 기금의 운영에는 시민사회가 참가하며 또한 기금의 40%는 시민사회의 집행에 맡기는 것으로 한다.
다섯째, 위의 내용들을 2010년까지 실현한 것 등이다.
이 처럼 일본을 비롯하여 선진국들은 GNI의 0.7% ODA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은 일부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어 선진국들의 자발적인 원조확대가 필수적이다.
또한 원조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경제의 회생을 막고 있는 외채의 경감이다. 세계은행과 IMF 정책결정자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보다 나은 정부의 구성과 무역을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외채를 줄이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외채 유지는 만약 외채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제기된다면 단지 그것을 유지만 시킬 뿐이며 개선은 할 수 없다"라고 이 두 국제기구의 한 관계자가 말했다.
2년 전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발표된 부채과도 빈곤국가(HIPC) 22개국들은 현재 총 340억달러의 외채경감의 혜택을 보았다. 다른 쌍무협정을 통한 외채 경감까지를 포함하면 그 액수는 530억달러에 달한다.
13개 국가들은 현재 외채 경감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 부채과도 빈곤 국가들에 대한 부채경감 프로그램은 비정부기구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는데 이는 그 경감규모가 너무나 적고 또한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외채경감 비정부기구는 4월 초 IMF와 세계은행이 세계의 가장 빈곤한 국가들의 모든 부채를 경감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IMF와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은 지난 4월 말 외채경감은 신중한 차입과 개인기업 부문, 교육 그리고 보건을 지원하는 정책들 펼치는 경제 관리에 개선을 보이고 있는 국가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장래는 밝다
최근 아프리카의 차드, 적도기니, 나이지리아, 가봉 등 일부 산유국들의 경우 고유가로 인해 고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들어 「잊혀진 세계」, 아프리카의 석유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9 월11일 미국 동시 다발 테러와 이에 맞춰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은 세계 최대의 석유 수급지인 중동 불안을 초래하였고,EU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략의 재평가를 강요한 에너지 안전보장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확인 석유 매장량 800억 배럴로 아프리카는 향후 5년내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파월 전 국무장관이 이라크전쟁 시작 전 2002년 9월에 앙골라, 가봉을 방문하였고,2003 년 7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아프리카5개국(세네갈,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을 방문하여 석유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차지하는 아프리카의 원유 생산의 비율은 10% 이상에 이르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원유 생산은 약 240 만 배럴/ 일(2004 년)을 기록하고 있으며 확인 매장량도 343억 배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유 메이저 회사들은 나이지리아의 개발되지 않은 지하 천연 자원의 이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세계 최대 석유 회사인 엑슨 모빌(ExxonMobil)은 아프리카 원유 증산 계획을 내세우고 있고,2004년 발표된 연차 보고에서는 아프리카에서의 생산량이 1위를(23.5%) 차지하였다. 또한 엑슨 모빌 그룹은 2005년 1월 18일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 회사(NNPC : Nigeria National Petroleum Company)와 제휴하여 LNG 플랜트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2010년부터 조업 시작을 기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메이저 석유 회사로는 엑슨 모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셰브론 텍사코(Chevron Texaco)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향후 5년간 총액 200억 달러의 아프리카 투자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지난 1월 13일에는 영국 가스 회사(BG)와 제휴하여 나이지리아 LNG 플랜트 건설(2009년 조업 시작 예정)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 영국의 BP 등이 나이지리아에서의 탄화수소 부문의 개발에 참가하고 있다.
이 처럼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일부 산유국들을 포함하여 대륙전체의 경제성장률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보다 훨씬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4에 이어 2005년에도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으며 특히 2005년의 경제성장 전망을 보다 좋게 보고 있다.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 배포된 전망에서 IMF는 아프리카의 국내총생산이 2003년 3.7%의 성장에서 2004년에는 4.6%의 성장을 그리고 2005년에는 5.8%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것으로 거시 경제적인 안정면에서도 현재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고가 상품에 대한 강한 수요와 외채 부담에 대한 완화 그리고 산업시장에 대한 접근의 개선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원유수출 국가들은 지금까지 가장 큰 순 이익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국제 원유가격의 고가로 인해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IMF는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아프리카 정책입안자들은 상품가격들에 대해 유연성을 두어 원유가격이 고가일 때 ‘예방적 저축’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IMF는 아프리카 정부들의 경제에 대한 간여를 줄이고 기간산업과 민간투자를 활성화해야 하며 뿌리 깊게 남아있는 제도적 개선도 이루어져 향후 보다 나은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반둥회의 5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만나 초기의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두 대륙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면에서는 많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 중국 같은 국가들은 매년 아프리카국가들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으며 동등한 위치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수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대하고 있다. 이것은 원조 공여를 받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며 두 대륙이 동등한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이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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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준표 2011/08/07 0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짠한 이야기네요.

짐바브웨의 국가존립은 가능한가?

<남부아프리카의 가장 선진화된 국가 중의 하나였던 짐바브웨가 최하류의 국가로 추락하고 있다.  현대통령인 무가베의 퇴진만이 국가를 살릴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내전과 종족간의 알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프리카의 정치적 안정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서부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정과는 달리 남부아프리카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전의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고 다당제하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정권들이 들어서고 있다.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백인정권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며 잠비아에서는 노동조합 위원장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한 국가로는 짐바브웨를 들 수 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대통령은 지난해 불법적인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를 다시 움켜짐으로써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한 이래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장기집권은 남아공과 함께 남부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경제모범국이었던 짐바브웨를 하루 아침에 혼란과 경제적 붕괴 등으로 인해 가장 후진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가베의 대통령직 사임이 최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무가베가 현재 사임을 가장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임이후 그의 정적들에 의해 신변안보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있다.  따라서 야당인 ‘민주적 변화를 위한 운동’과 야당대표인 츠방기라이(Morgan Tsvangirai)도 무가베 대통령에게 믿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되고 멀리 내다보는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현재 지난해 선거를 구실로 삼아 그의 권력을 연장하려는 무가베의 행태는 어리석고도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대통령 선거의 후보였던 야당 대표 츠방기라이를 내란 선동죄로 기로하였다. 츠방기라이는 2주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지만 무가베의 이러한 행태는 현재 짐바브웨의 제1당인 야당 ‘민주적 변화를 위한 운동’을 탄압하려는 것이다. 또한 무가베 정권에 반대하는 논지를 표방한 신문사들을 폐간 시킴으로써 언론에 대한 탄압도 시도하고 있다. 지난 10월 25일 짐바브웨 경찰은 짐바브웨정권과 유일하게 맞서싸우는 일간지인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사무실을 점령하고 신문사를 폐간시켰다. 데일리 뉴스의 근로자들은 무장 경찰이 수도 하라레 중심에 있는 신문사를 급습하여 그날 발행될 신문의 첫 번째 편집이 끝난 직후 남아있던 18명의 언론인들과 사무요원들을 구금하였다고 전했다. 이 신문사는 폐간된지 한달이 지났었다. 4시간 후 근로자들은 풀려났으나 그들은 신문사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무가베가 계속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다면 국가적인 파산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짐바브웨는 극심한 기아에 직면하고 있는데 전체인구 1천1백60만명 중 약 8백만명이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아는 HIV바이러스에 허약한 면역체계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짐바브웨 정부의 통계수치에 따르면 현재 하라레(Harare)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 약 70%가 에이즈와 관련된 환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최근 짐바브웨의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도달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고 있다. 8월말까지 426.6%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이 10월 말까지는 500% 가까이 상승한 가운데 인플레이션을 주도하는 것은 연료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리비아에서 원유를 제공하였지만 리비아에서 원유공급을 중단한 이후 심각할 정도로 연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짐바브웨 환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구매력의 상실 또한 크게 떨어지고 있어 인플레이션은 사실상 12월까지는 100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까지의 인플레이션은 399.5%로 8월에만 27.1%의 증가를 보였다.
소비가격지수에 나타난 대부분의 상품 가격들 상승은 짐바브웨 화폐의 평가절하로 인해 발생하였다. 짐바브웨 제조업자들과 공급자들은 원료가격의 상승으로 제품가격을 급격히 상승시켰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율을 살펴보면 식료품 가격이 164.5%의 상승을 보였고 비 식료품 가격의 인플레이션이 262.1%의 상승을 보였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짐바브웨의 외화부족이 주요인이다.  외화부족은 외국으로부터 물품수입을 중단시켰고 특히 석유수입의 부족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경제성장도 계속 하락하여 2002년에는 -12.8%의 성장에서 2003년에는 -13.1%로 예상되고 있다. 짐바브웨의 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외화확보가 가장 우선시 되고 있다.

이처럼 짐바브웨는 정권연장의 야욕으로 인한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국가의 파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최우선적으로 무가베의 퇴진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무가베 대통령이 계속 그의 권력에 집착한다면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그리고 소말리아와 같은 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라이베리아는 최근까지 내전으로 인해 인권유린과 국가경제가 파탄이 났으며 콩고민주공화국 역시 내전과 종족간의 싸움으로 국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말리아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국가가 군벌들로 나뉘어져 있으며 누가 소말리아의 공식적인 대표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최근 일련의 정치적 불안을 제기한 원인은 짐바브웨 토지의 비정상적인 분배로 인해 발생하였다. 짐바브웨가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해 토지문제는 정치적 안정을 해치는 요소로 계속 등장하였다. 무가베는 2002년 그가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대표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토지문제를 들고나와 흑인들을 자극하였다. 무가베 대통령은 2002년 9월초부터 백인지주들의 농지를 강제 환수해 흑인농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흑인농민 100여만명이 경작하는 1600㏊의 농토는 작물재배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쁜 데 백인지주 5000여명이 소유한 1100만㏊는 비옥한 농토”라며 “8월 말까지 백인지주들의 농지를 환수해 흑인 농민 35만명에게 나눠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정책은 주로 짐바브웨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퇴역군인들을 선동하여 강제적으로 백인들을 토지를 강탈하였다.

이와 같은 백인토지 강제 몰수와 부정적인 방법으로 무가베가 대통령 당선되었지만 국제사회는 본격적인 무가베 정권퇴진을 추진하였다. 짐바브웨 주재 유럽 국가들의 대사들이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하지 않았고 영연방 국가들은 짐바브웨에 제공하던 무상원조 및 경제협력을 철회하였다. 미국도 무가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미국내 짐바브웨 자산을 동결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국내에서 백인농장의 폐허로 인한 농산물 산출 감소 등과 함께 짐바브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켜 오늘날 8백만명의 짐바브웨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짐바브웨는 케냐에서 그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케냐도 1978년부터 장기집권한 모이대통령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과 함께 1990년 중반이후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특히 IMF나 세계은행은 케냐에서 정치적 안정과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0년말부터 자원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케냐는 지난해 모이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야당이 정권을 잡는 독립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무가베도 국가와 국민들의 생존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 지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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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정치

30년 이상의 부패와 독재 정치를 겪고 난 후였던 1990년대 초에는 실제로 아프리카 전 대륙에서 강력한 정치적 개혁과 민주화를 보여주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1989년 베닌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초 여세를 몰아 독재적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숨막힐 듯 답답하고 악화된 경제와 구 소련 및 동구 유럽의 몰락으로부터 자극 받은 아프리카인들은 다당제 정치체제와 시민의 자유 확대, 자유 선거를 요구했다.

이러한 자유화의 물결은 남아공과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과정으로 인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1990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300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초유의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선언하였고 1994년 4월 최초의 다인종 선거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999년 6월에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키고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주도아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multi-cultural diversity)을 추구하며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남아공의 민주화는 아프리카 역내 민주화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중심국가로서 남아공은 이 지역 분쟁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1998-2001년 비동맹 의장국으로서 제3세계의 중심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아공의 "기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협과 화해를 통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60-66, 1979-83 그리고 1985-99년에 걸쳐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나이지리아는 1999년 5월 오바산죠(Olusegun Obasanjo) 대통령이 이끄는 민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더 이상 아프리카가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는 비판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폭력적인 정권 획득의 대부분은 구데타나 군사 개입을 통한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1960년 이후 25명의 대통령과 수상들이 정치적 폭력의 결과로 정권에서 쫓겨났다. 1952년 이집트 혁명이후 아프리카에서 85번의 폭력에 의해 정권 교체가 있었으며 모두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90여개의 정부가 전복되었다.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31개국이 정권교체를 당했고 이들 중 22개국은 유사한 종류의 정권교체를 1번 이상 경험했다. 베닌, 부룬디, 가나, 나이지리아, 수단, 시에라 레온과  우간다는 최소한 5번의 군사적 정권 교체가 있었다. 군사정권은 일당제와 다당제 국가 모두에서 발생했다.

보츠와나와 모리셔스만이 독립 이후 다당제를 유지해 왔으며 1994년 7월 군부의 권력 탈취가 있기 전까지는 감비아도 다당제를 유지하였다. 짐바브웨와 나미비아는 독립 이후 다당제 국가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기니아, 말리, 니제르같은 나라들은 독립과 함께 일당제를 채택하였는데 일당제는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게 일반적인 정당 체제로 받아들였다.

구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의 일반적인 모습은 점진적으로 군사정부를 민간정부형태로 이양해가고, 또한 군부 정치 체제를 일당 독재 체제로 변형시켜나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나와 나이지리아는 예외적으로 독립 후에 민주주의와 군정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다. 1977년까지 이집트, 모로코, 세네갈에서는 다당제를 부활시켰으며 1980년대에는 튀니지아, 수단, 알제리, 라이베리아, 코모로스 등지에서도 다당제가 뒤따라 부활되었다. 그 후에 라이베리아와 수단에서 독재주의가 부활하고 라이베리아가 내전에 휘말리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초 다당제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소용돌이의 초석이 되었다.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권위주의적 권력 질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한 저항은 폭 넓은 대중의 지지속에 일어났으며, 경제적인 빈곤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아프리카 지원국들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정부에게 경제와 정치 체제에 대한 개방 압력을 가했다. 1989년 11월, UN의 감독 하에 치러진 독립전 나미비아의 총선은 아프리카 제 2의 해방 이라 일컬어진다. 이것은 1990년 전반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일당제 권력 독점이 다당제 선거 제도로 상당히 빠르게 이행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90년 3월 나미비아가 독립을 맞았을 때, 코모로스는 최초의 경선을 치루었고, 가봉과 코트 디부아르도 같은 해에 코모로스의 전철을 밟았다.

1991년에는 케이프 베르데, 상토메 프린시페, 베닌, 잠비아에서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7년 10월까지 45개 국가에서 121번의 다당제 선거(53번의 대통령 선거, 68번의 입법 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41개국이 존재함과 동시에 나이지리아, 부룬디, 시에라리온, 그리고 콩고 브라자빌 등 4개국은 군사정권으로 돌아갔다. 이 같은 나라 대부분은 자국의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위기의 상황 아래서 다당제를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제리, 앙골라, 니제르, 그리고 오랜 다당제 전통을 가진 감비아를 포함해서 다당제가 새로이 도입된 곳에서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군정권의 개입에 의해 다당제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중반, 이 네 나라들은 다당제를 부활시키고, 문민 정부로 회귀하였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많은 국가에서, 기존의 정치체제들은 야당의 형성과 공개된 선거제도의 실시를 허용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48개국 중 1997년 말까지 경쟁적인 다당제 선거를 치루지 않은 국가는 4개국뿐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초의 아프리카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화의 분명한 '물결'에 완전히 동참하고 있었다. 그 정치적 변동의 폭은 1994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합법적으로 일당 체제의 국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정치적 개혁과 민주화를 향한 아프리카의 다양한 추이는 21세기 초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아프리카 국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의 정치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내부에서 정치가 이루어진 전반적인 배경에는 빈곤과 의존적인 경제라는 식민주의의 산물과, 후원자-고객(Patron-Client Network)중심의 정치 체제, 그리고 냉전체제의 붕괴와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외부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영향력 증가가 포함된다.

아프리카는 중동 근처에 위치하여 남대서양과 인도양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광물 자원을 가진 덕택에, 냉전 기간 동안에는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전략적 지역'으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아프리카에 상당한 지원을 한 것은 미국이었고, 그보다 양은 적었지만 소련 연방도 거들었다. 소련 연방이 와해되고 소련이 동구 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잃으면서, 아프리카의 중요성은 크게 떨어졌다.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과 케냐 등 미국의 고객국 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삭감되었다. 냉전의 종식으로 러시아와 동구 유럽에서 대체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아프리카의 전략적인 광물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었고, 아프리카 전체의 경제적 침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불리한 경제적 상황은 1990년대 후반 국제 정치 무대에서 변화가 일어난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일당체제존립 정통성의 이론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들의 원조가 단절되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제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아프리카의 정치적 궤적을 형성한 사회적, 경제적 정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민족, 지역, 종교, 하부민족적 차이로 인해 사회구조가 나뉘어졌다고 주장한다.

2002년 9월 23일 인종갈등으로 인한 구테타가 일어난 서아프리카의 코트 디브아르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발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머나먼 길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이러한 민주화를 향한 운동이 가지는 가능성이 커 보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경쟁 다당 체제의 민주정치가 쉽게 구축될 수 있다거나 아프리카가 지닌 무수한 문제들 사이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우려할 만한 것은 1990년대 초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 정부로의 성공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후반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주화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은 감소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서구선진국가들이 상업적 이익이 있는 지역에서는 민주적 개혁이나 정권교체를 그다지 강요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1989년이래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프리카의 정치상황은 발전하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장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모든 부문에 걸쳐 정치 구조에 근본적인 개혁이 있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은 정치적 자유화를 실행했고, 일당 정부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케냐의 정권교체라고 할 수 있다. 78년에 다니엘 아랍 모이(Danial arap Moi) 대통령이 실질적인 집권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ANU :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지원을 받아 5선을 연임하였다. 이번 선거는 헌법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이 대통령의 지지를 받았던 KANU당의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a)후보가 10개의 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무와이 키바키(Mwai Kibaki)에게 큰 격차를 벌이며 패배하였다. 이는 24년만에 대통령이 바뀌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실로 64년 독립이후 39년만에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지역기구의 역내 분쟁해결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서부 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nomic Committee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 SADC)의 지역안보협의체 등을 통한 역내 분쟁해결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OAU는 분쟁방지 및 해결기구를 통해 각종 역내 분쟁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새롭게 출범한  아프리카 연합(AU : African Union)에게 이양하였다. ECOWAS는 시에라리온 사태, 라이베리아-기네 국경분쟁에, SADC의 안보협력체는 콩고사태, 앙골라 사태에 적극 개입, 평화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에서는 OAU가 UN안보리와 협조, 평화안을 제안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자유화가 시작된 지 이제 10년 밖에 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속에서 아프리카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정치적 민주화, 경제개혁 및 지역통합을 추진하면서 서방 제국들로부터 새로운 인식과 함께 수출시장으로서 잠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02년 새로 출범한 AU를 통해 아프리카 제국들은 정치·경제적 지역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미국은 2000년 10월 "아프리카 성장 및 기회에 관한 법안(AGOA : African Growth and Opportunity Act)"을 입법화하였고, 2002년 6월 캐나다 G-8 서방선진국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 개발을 위해 2015년까지 약 640억불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야심찬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NEPAD : New Partnership for Africa's Development)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아프리카는 발전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새로운 성장 유망지대로 떠오르고 있다. 현실적으로 아프리카의 민주화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축과 함께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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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민주주의 발전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발전하고 있다. 독재와 부정부패, 구데타와 내전, 그리고 가난과 에이즈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하는 비극과 절망의 대륙 아프리카가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동서냉전 종식에 따른 전세계적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역내 국가들간에도 이념적 대결 가능성은 사라지고, 다당제 도입, 자유선거실시 등 개혁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절반 이상이 다당제에 기초한 선거가 실시되었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시에라리온 사태의 확산 가능성, 코트디브와르의 민주화 이행 지체, 짐바브웨 사태의 확산 가능성, 코모로의 군부 쿠데타,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간 대립, 앙골라와 콩고내전의 지속화 등 불안요소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으며 아직도 종족 이기주의, 독재성향의 국가와 부정부패 등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극복과 인권개선 등 민주발전에 많은 난관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21세기 들어 정치적 민주화가 활성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단언 할 수 있다.

1991년부터 1997년 10월까지 다당제가 이루어졌던 나이지리아, 부룬디, 시에라리온, 콩고(부라자빌)등 4개국이 다시 군부통치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45개국에서 121차레의 다당제에 기초한 선거(53차레의 대통령 선거, 68차레의 의회선거)가 이루어 졌다. 이런 추세와 더불어 아프리카 지역 통합을 위한 활발한 움직임도 주목된다. 2001.3.1-2 리비아에서 개최된 제5차 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 OAU)특별정상회의에서는 OAU 53개 회원국 전체 의사로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 AU)의 창설선언이 있었는데  기존 OAU를 발전적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아프리카 통합기구의 탄생을 맞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존의 지역기구의 역내 분쟁해결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였다. OAU, 서부 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nomic Committee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 SADC)의 지역안보협의체 등을 통한 역내 분쟁해결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OAU는 분쟁방지 및 해결기구를 통해 각종 역내 분쟁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고, ECOWAS는 시에라리온 사태, 라이베리아-기네 국경분쟁에, SADC의 안보협력체는 콩고사태, 앙골라 사태에 적극 개입, 평화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에서는 OAU가 UN안보리와 협조, 평화안을 제안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상징적인 민주화 국가는 남아공과 나이지리아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1990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300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초유의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선언하였고 1994년 4월 최초의 다인종 선거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999년 6월에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키고 타보 음베키(Thabo Mbeki)대통령 정부가 무사히 출발하여 순항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남아공은 민주화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적으로 역내화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중심국가로서 남아공은 이 지역 분쟁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1998-2001년 비동맹 의장국으로서 제3세계의 중심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아공의 "기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협과 화해를 통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60-66, 1979-83 그리고 1985-99년에 걸쳐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나이지리아는 1999년 5월 오바산죠(Olusegun Obasanjo) 대통령이 이끄는 민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더 이상 아프리카가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는 비판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90년대 들어 동서냉전 시대가 붕괴되면서 양 진영의 대결구도속에서 비동맹 세력의 주축으로서 아프리카가 누려온 국제정치적 지위가 소멸되었고 아프리카의 각 국가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일당체제존립 정통성의 이론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들의 원조가 단절되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제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당분간은 자본주의의 급격한 물결속에서 세계체제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변화들은 아프리카의 미래에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정권의 몰락과 민주주의적 경험은 분명 정치적 안정과 민주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며 경제적, 사회문화적 민주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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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내전 전개와 발생원인

라이베리아 약사와 내전전개과정
한반도 정도의 크기(97,754㎢)에 인구 약 3백30만명의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가 최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인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내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최근 몇 일전부터 유혈 사태로 바뀌어 미국의 개입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곡물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 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라 이름 붙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Joseph Jenkins Roberts)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경을 확장했다.
미국의 노예 후손들이 건설한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라이베리아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Tubman)이었으며 1980년 쿠데타로 그의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그리고 80년 이후 라이베리아는 계속되는 정정불안을 겪게 되었고 끝없는 내전의 상황으로 정세는 변해갔다.
내전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1980년 도우(Doe)가 이끄는 구국평의회(PRC)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1989년 테일러(Taylor)가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EL)을 결성하고 도우 정권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의 종식을 위해 나이지리아, 가나, 기니, 감비아, 시에라리온이 참여하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가 중재를 추진하여 1990년 분쟁 당사자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2년 10월부터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6년 4월 반정부의 라이베리아민주통일전선(ULIMO)이 정부 경찰부대 및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1996년 7월 31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각파와 평화협의가 열려 9월까지는 무장을 해제하고, 6-9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1997년 7월 19일 7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1985년 이후 12년 만에 실시되어 상원 26명 하원 64명 등 90명이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에는 75%의 득표율을 얻은 최대 군벌 지도자인 테일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97년 국민들의 공포심에 편승해 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 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그에 대항하는 반군이 99년 봉기, 라이베리아는 다시내전에 휩싸였고 반군은 라이베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테일러를 압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S)가 중재에 나서 지난 7월 6일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Monrovia) 국제 공황에서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와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두 사람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이후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부터 떠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으나 테일러가 미국의 군대 파견을 계속 요구하자 내전이 다시 발발하였다. 정부군은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방위에 나섰고 반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숨졌고 13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내전 발생의 원인
그러면 이와 같은 내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들은 무엇일까? 크게 경제실패로 인한 정국혼란과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라이베리아의 경제 문제였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였다. 아프리카에서 남아공, 이디오피아와 함께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을 차지하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2/3 이상이 이에 종사하며, 주요환금작물로는 고무·커피·카카오 등이 있다. 그러나 1차산업의 경우 가격변동율이 워낙 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메울 수 없었으며 이는 외국으로부터 외채를 도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주 수입원인 고무 농장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국기업들에게 넘어가게 되고 정작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만성적인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인당 소득도 200달러도 채 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고무 산업의 경우 정부 다음으로 많은 고용을 창출해내며, 고무 수출이 라이베리아 GNP의 10%를 차지한다.
1980년의 쿠데타의 경우 경제악화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경제해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채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Doe)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함으로써 정국불안의 요소를 그대로 안고 갔다.
내전 발생의 두 번째 요인은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 돌아온 해방 노예의 후손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을 노예처럼 다스리며 이 땅을 지배하였다. 즉 미국에서 건너온 약 5%의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이 나머지 95%인 선주민들을 지배하는 정치적 구조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현재 라이베리아는 크게 16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 가장 큰 종족은 크펠레 족과 해안에 살고 있는 바사 족이다.  그밖에 기오 족, 크란 족, 바이 족, 그리고 이슬람교도인 말랑케 족이 있다.
1980년 쿠데타에 성공한 도(Samuel Doe)는 원주민인 크란(Krahn) 족으로 정권을 쥐었으나, 9년 후에는 다시 해방노예의 후예인 테일러가 혁명을 이끌고 도우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곧 종족으로 구성된 여러 파벌 간에 내란이 계속되었다.
내전 발생의 세 번째 요인으로서는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테일러가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국가는 리비아와 시에라리온 반군이었다.  테일러는 리비아 카다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용해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또한 시에라리온에서 불법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이를 국제 암시장에 팔아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이 다이아몬드의 불법 유통은 시에라리온에서도 내전이 계속적으로 벌어지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들에 대해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인근 국가들의 정정을 불안하게 만드는데 앞장섰다.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그의 반군은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음으로 시에라리온의 재판정은 그를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였다.

향후 전망
현재 라이베리아는 정부군과 반군들이 수도 몬로비아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군대를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견하기를 원하며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서부아프리카 국가지도자들은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전에 테일러 대통령이 반드시 라이베리아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 대통령은 이미 자신이 사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나이지리아로 망명을 것으로 예상) 대신 자신이 사임하기 전 먼저 평화유지군이 도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의 이와 같은 주장에 반군 단체들은 만약 테일러 대통령이 평화유지군을 기다린다면 외국 부대 주둔이 가져다 줄 안정감으로 인하여 결국 영원히 라이베리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현재 수도 몬로비아로 진군하여 정부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1천5백내지 2천명의 미군을 라이베리아에 파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91년 소말리아 사태에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 코피안난이 밝혔듯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만이 현 라이베리아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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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원 469명을 뽑는 나이지리아 총선이 4월 12일 악천후와 투표 함과 투표용지 부족, 폭력사태 등 각종 악조건속에 실시됐다. 이번 총선은 지난 1983년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지 20년만에 실시되는 선거로 일주일 후인 19일의 대선에 앞선 나이지리아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는 선거이다.

또한 4월 19일 실시되는 대선에는 99년 민정이양시 대권을 거머쥔 올루세군 오바산조 현 대통령과 야당의 무함마두 부하리(Muhammadu Buhari) 등 19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대선에서는 주지사 36명도 함께 선출된다. 총선을 주관하는 선거관리위원회(INEC) 관리들은 수백만의 유권자들이 폭풍우가 쏟아지는 악천후속에 투표소에 나왔다고 순조로운 투표를 예견하고 있으나 AFP통신과 외교관들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부 줄을 선 유권자를 제외하고는 투표가 중단됐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와리, 아우카 등 일부 남동부 도시에서는 투표마감시간이 1시간 남은 3시 현재 투표가 시작도 안됐다고 보도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지역간 종교간 갈등으로 빈번히 발생해온 유혈 사태와 지난 선거 때에도 기승을 부린 혼탁한 선거 양상이 악천후와 투표용지 부족등에 따른 각종 문제점과 연계돼 이번에도 재연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하는 과정에 나이지리아 여당은 17일 이미 자신들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했다고 밝히고 19일 시작되는 대통형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반면 여당 연합은 이번 선거가 부정과 관권으로 인해 그리고 투표용지 부족 등 투표 장비로 인한 부정 등을 이유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며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펼칠 기세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바산조 현 대통령의 승리는 그를 군정을 종식시키고 나이지리아의 이제 막 시작되는 민주주의의 기수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83년 민간정부를 전복시키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인 야당 지도자 부하리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가 부정선거였으며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대선을 보이콧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펼칠 것이다.  우리는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자신의 투표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라고 18일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부하리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36개 주의 선거 결과를 취소하거나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선거는 여당 지지자들의 ‘대규모 사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이번 선거 결과를 취소시킬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당은 부하리가 4년동안의 나이지리아 민주주의의 토대를 깍아내리려 한다고 반반하였다.

현재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54%의 개표 상황에사 하원의 경우 현 여당인 ‘인민 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 PDP)가 전체 360명의 의석 중 181석을 얻고 있다.
상원에서도 ‘인민 민주당’은 109개 의석 중 60석을 얻고 있다.  전체 29개 야당 중 가장 큰 정당인 부하리의 '전 나이지리아 인민당‘(All Nigeria People’s Party ANPP)은 하원에서 82석을 그리고 상원에서는 26석을 얻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혼탁한 투표는 아프리카의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서 1999년 오바산조 현태통령이 군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이후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독립한 이후 43년 동안 제대로된 민간 정부를 형성하지 못했다.  많은 지역에서 해마다 종교와 종족으로 인한 마찰이 벌어지고 있으며 독립이후 7차례의 쿠데타가 알려주듯이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을 겪어왔다.  이번 선거도 많은 지역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들이 드러났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는다는 가정을 펼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오바산조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4년간에도 적어도 1만명 이상이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종교갈등으로 사망하고 있듯이 사회적 불안은 쉽게 가라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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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
1884-85년 유럽열강들은 베를린에 모여 식민지 분할을 본격화 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디오피아와 리비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하에 놓였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정책은 라이벌 국가들의 힘의 우위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고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 분할을 재편하게 만들었다. 즉 1차대전의 결과 아프리카 4개국의 식민지를 운영하였던 독일 영토는 영국, 프랑스, 남아공의 식민지 경영관리로 이관되었다.

영국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그들 국내업무를 경영하는 것은 허용하였으며 수에즈운하의 통제권과 군사권 그리고 외교문제의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인들의 실질적인 개혁들은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불안을 야기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영국 사이의 수단지배에 대한 의견차이에 대한 긴장감도 나타났다.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수단을 통치했었다.  영국은 자국 식민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위해 19세기부터 수단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지역에서 영국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Boer)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했는데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앵글로-보어전쟁의 승리로 아프리카 남부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남부아프리카의 남아공은 아프리카너(영국계를 제외한 남아공 백인들)들로 주축이된 국민당(NP)이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20세기가 시작된지 10여년 동안 케냐에서는 영국이 그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케냐의 부족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하였다.  이후 영국인들의 정착이 뒤따랐다.  그러나 영국으 우간다로의 이동은 영국민들의 실망을 샀고 그곳의 토지는 흑인들에게 주어졌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영국이 감비아(Gambia), 황금해안(현 가나 Ghana), 나이지리아(Nigeria),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을 지배하였다. 여기서도 동부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였고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인들의 식민통치에 있어 영국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질서, 순종 그리고 자유를 주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식민지역으로부터의 이익들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커버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식민지를 확보했다 : 가봉, 기니,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세네갈 등이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대하는데 있어 영국보다 덜 인종주의적이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프랑스 문화권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 백성들에게 인류애적인 접근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에 과다한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또한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을 식민지의 경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본국의 프랑스인들을 위해 소비하였다.

독일
이 시기에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는 토고, 카메룬,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그리고 탄자니아 등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1차대전 이후 그들의 식민지 모두를 잃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제국 건설은 서구 열강 중 가장 일찍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적도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와 대서양 도서 국가인 상톰메 프린시페와 케이프 베르데 등이 있다.
비록 19세기 노예제도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없어지지만 노예의 형태는 계약노동 형태로 계속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자체가 빈곤하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아프리카식민지들도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 속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도 가장 늦게 달성하였다.

벨기에
벨기에는 벨기에 콩고라 불라는 현 콩고민주공화국을 지배하였다.  '유니온 마니에레'(Union Miniere)라는 벨기에 회사는 벨기에 콩고에서 광산업을 주로 하였으며 다른 회사들은 이곳에서 고무와 상아 무역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벨기에의 통치는 영국이 1903년 벨기에의 레오폴드(Leopold) 왕에게 불만을 했을 만큼 아프리카인들을 가장 심하게 착취한 국가였다.  레오폴트 왕은 영국의 불만에 대해 식민지 경영에 대한 간섭이라고 무시하였다.

비록 아프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이 유럽의 식민지 점령을 거부하였지만 서구 열강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거의 60년간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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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아직도 암흑 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기아와 에이즈등의 질병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군사쿠테타와 내전으로 경제적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희생도 커지고 있다. 라이베리아에서는 3년간의 내전으로 15만명이 희생되었으며 앙골아 또한 15년간에 걸친 내전으로 국가가 거의 마비 상태까지 이르렀었다. 최근에는 자이르와 르완다등에서의 종족분쟁이 국제전 양상으로 번지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군사쿠테타와 내전등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크게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요인과 인종문제 등 사회적 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앞으로의 글에서 이 요인들을 알아보고 각 각 다른 원인으로 인해 내전과 쿠테타가 반복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살펴보겠다.
아프리카의 현황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정치.경제적 요인
아프리카국가들의 불안한 상황은 정치적 갈등이 주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쿠테타라는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국가에서 쿠테타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보여준다. 지난 30년간 사하라 이남의 국가에서는 매년 두 차례꼴로 쿠테타가 발생하였다.  그중 성공한 쿠테타만 77차례이고 이 기간 중에 약 25명의 대통령과 총리가 정치적 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까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궁극적으로 독립과 탈식민지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독립후 이같은 투쟁양상은 국경성 문제,인종갈등,종교문제 등 다른요소들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많은 전문가들이 민주적 제도와 경제자유화의 확산을 전망하였느나 민주화 물결은 미비하였고 여전히 많은 아프리카 권위주의자 지도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상태이다.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를 위한 다당제선거가 실시되고 있으나 제대로 된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프리카의 정치개혁은  냉전 종식 이후 미.영등 서방 선진국들이 경제원조의 조건으로 각 정권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독재정권들은 제한적으로나마 다당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니제르와 시에라리온에선 최근 쿠테타가 일어났고, 르완다,나이지리아,자이르,라이베리아,수단등에서는 내전이 계속 되고 있다.  선거를 무사히 치른 국가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가나는 제리 롤링스 정권이 선거과정에서 돈을 푸는 바람에 인플레이션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우간다 등 많은 나라에서는 형식적으로 다당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독재정권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에서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과거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  경계선이 임의로 만들어져 각국이 민족적, 정치적 정체성이  흔들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열강들의 일관성 없는 정책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또다른 원인은 경제실패와 권력층의 부패이다. 자유시장 제도의 실패는 식량폭등을 야기시켰으며 구조조정프로그램들은  더 많은 문제점들만  남겼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자유국가들과 비자유국가들 사이, 시장경제와 중앙통제계획경제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식층에 기반을 둔 민중기반도 없으며 세계 곳곳에서 건설되어 있는 자발적 안보협력체도 없다. 오히려 종교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강대국들의 정치적,군사적 개입도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난민들의 보호와 평화를 외치는 강대국들이 뒤에서는  무기를 공급해주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이다. 94년 이후로 유엔이 무기금수조처가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최대 무기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저버리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미국,영국,남아공등이 무기거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Ⅲ.인종 및 사회적 요인
아프리카 지역의 불안은 식민지 유산과 냉전 유산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50.60년대 독립하였지만 식민지배시대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반목과 종족간의 갈등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요인들은 구소련의 붕괴로  냉전이라는 세력균형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면서 급격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몇 년간 인종적 분쟁은 집단폭력의 가장 공통된 형태가 되어왔고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국가간 혹은 국가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주 요인이 되어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1천여개가 넘는 인종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이후 상이한 문화와 상호 정치적 대립 속에 살아온 인종들이 하나의 지역적 영역 안에서 집결되어 공동의 시민권을 갖고 국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국민적 통합이 극히 어려울 수 밖 에 없다. 이 때문에 주도권을 잡은 종족이나 정치집단은 독재적인 통치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종중심정치는 국가권력을 행사하여 소수인종과 종교집단에 탄압을 가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종집단에 교육 ,취업 등 다방면에 있어서 각종 특혜를 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국가 간의 분쟁은 내부문제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인종중심정치에 의한 경우가 많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레온, 가나와 토고, 수단과 우간다 등의 분쟁은 같은 종족을 탄압한다든지 혹은 정치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어난 대표적인 분쟁이다.

Ⅳ.원인에 따른 내전양상과 국가별 현황

1.종족간 갈등에 의한 내전
차드- 인구 4백50만의 차드는 프랑스가 임의로 그어놓은 국경선에 의해 언어와 관습이 다른 192개의 소수 종족들이 하나로 합해진 나라이다. 전체 인구 52%에 달하는 회교도인 아랍계 푸라니족은 북부지역으로, 독립 이후 지배 세력이었던 기독교도와 흑인 사라족 , 고란족은 남부로 나뉘어 대립해 오다가 66년 회교도가 첫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 후로도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소말리아-소말리아는 민족 간의 알력싸움이 타종족 말살극으로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 지역이다. 1992년 6개의 씨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21년간 장기집권해 오던 독재자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지만,이후 이들이 권력을 둘러싼 암투를 벌이면서 내전이 격화되었다. 1994년 평화협상 이후 군벌들간의 휴전협정이 아슬아슬하게 지켜져 왔지만 2대 군벌인 소말리아민족동맹(SNA)과 '12세력연합'은 최근 10여차례나 전투를 재개하고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내전이 본격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소말리아에서는 금세기 최악의 가뭄까지 겹쳐 600만 인구중 200만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2.반정부 조직에 의한 무력투쟁
라이베리아-라이베리아는 흑인 노예 출신들이 세운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다. 하지만 라이베리아를 건국한 미국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토착 흑인을 다시 그들의 노예로 삼았다.
사무엘도 대통령은 육군 상사 출신으로 80년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재임 기간 중에도 쿠테타는 30여차례나 발생하였다. 그후 크란족,만딩고족,지오 마노족등 22개 종족이 7개 파벌로 나뉘어 89년 이후로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15만명이 내전으로 인하여 숨졌고 인구 2백30만명 중 절반 이상이 난민으로 몰락하여 아프리카를 떠돌고 있다.
모잠비크-1975년 포르투갈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포르투갈의 용병으로 조직된 우익게릴다(RENAMO)가 끈질기게 정부전복운동을 벌이면서 이 반군과 정부와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오랜 내전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버려서 농토는 황무지로 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절반 가량은 기아에 빠져 허덕이고 있으며 타국으로 피신한 난민만 해도 약150만명에 달하며 난민촌도 500여개나 된다.

3.복합적 성격의 내전

자이르-자이르의 내전은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분쟁, 반독재 투쟁, 외세의 개입이라는 다각적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복합적 성격의 내전이다.
냉전의 원칙에 따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그동안 자이르의 모부투 정권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지원해 왔다. 66년 집권한 이후 '검은 군주'로 군림해온 모부투는 국고약탈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워왔었다. 국내 반정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정권을 쉽사리 무너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으로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은 미국 등 서방국가에게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지나친 독재와 부패로 서방의 골치를 썩이던 모부투 정권은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쏟아부어 그를 지탱해줬던 미국이 94년 원조를 중단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자이르 내전의 요인은 인종간의 갈등이다. 자이르에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종족분쟁이 치열해진 것은 브룬디의 투치족들이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부터이다.부룬디 한의 후투족들은 곧장 피난길에 나섰으며 이후 후투족 난민중 일부가 게릴라로 변신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정부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에 르완다와 부룬디 정부는 자이르내의 투치족 반군들과 합세해 자이르에 거주하고 있는 후투족 난미촌들을 습격하면서 종족분쟁은 살육전으로 비화했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경제적 요인으로서 모부투 정권의 부패와 경제실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이르 경제는 73년 광산과 산업에 대한 국유조치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명목은 국유화였지만 이것은 국부의 원천을  모부투와 그 일족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제도적인 장치에 불과 했다. 인플레도 엄청나서 자이르의 화폐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국가가 가난해질수록 모부투의 부정축재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검은 돈을  그는 야당 인사들을 매수하는 등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쏟아 부었다. 이같은 부패로 민심은  모부투 대토령을 떠났고 반군이 일어나자 시민들이 반군을 반기는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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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아프리카 주요 정치 일지

1900 : 앵글로 보어 전쟁(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불림)
1902 : 앵글로 보어 전쟁에서 보어(아프리카너들이라고도 불림)인들 패배
       세실 로데스 사망(Cecil John Rhodes)
1910 : 남아프리카 연방 형성(Union of South Africa)
       마르크스 가르비(Marcus Garvey) 흑인 권리들을 위해 투쟁
1912 :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조인 남아프리카 원주민 회의(SSANNC) 창설
1914 : 세계 제 1차대전 발발 : 아프리카인들도 참가 그러나 혜택은 거의 없었다.
1917 : 볼세비키 혁명과 반식민지 투쟁
1921 :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 형성
1922 : 남아공 얀스머츠 정부에 의한 광산 파업 분쇄
1936 : 이탈리아 이디오피아 점령
1938 : 남아공에서 실라칸스(중생대의 강극어의 일종) 발견
1939 : 세계 제 2차대전 발발 - 수천명의 아프리카인들 참여
1948 : 흑백인종차별을 법제화한 국민당(NP)이 남아공 선거에서 승리
1950 : 기니아와 가나에서 성공적인 독립운동 착수
1952 : 케냐에서 영국식민지에 대항하는 마우마우(Mau Mau) 운동이 발발
       이집트의 파룩(Farouk) 왕 퇴위
1954 : 알제리 독립전쟁 시작
1956 : 수에즈(Suez) 운하 위기
       수단의 독립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는 영향 미미
1957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 가나가 최초로 독립
1959 : 소부크웨(Sobukwe)가 범아프리카회의(PAC)의 최초 의장의 취임
1960 : 유엔총회 '식민지 국가들과 국민들의 독립보장 선언'
       이디오피아 아데베 비킬라(Adebe Bikila) 올림픽 마라톤 우승
       촘베(Tshombe) 콩고 카탕가 주 분리독립선언
       이집트 소련의 원조하에 아스완 댐 프로젝트 시작
       남아공에서 샤프빌(Sharpeville) 학살로 69명의 흑인들이 사망
       루툴리 ANC 의장 노벨평화상 수상
1961 : ANC의 군사조직인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창설
       남아공 영연방으로부터 탈퇴
       루뭄바(Lumumba) 콩고(현 콩고민주공화국) 최초의 수상으로 취임
1962 : 남아공에 대한 첫 번째 유엔제재
1963 :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형성
       아지키웨(Azikiwe) 나이지리아 첫 번빼 대통령으로 취임
       리보니아 재판(Rivonia Trial) - 만델라와 다른 9명이 사보타지 혐의로 재판
1965 : 로데지아 독립선언
1966 : 보카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권력 장악
      나이지리아 첫 번째 수상 아부바카르 발레와(Abubakar Tafawa Balewa) 살해
      세레츠 카마(Seretse Khama) 보츠와나 대통령 당선
      남아공 수상 베르워드(Verwoerd) 암살
1967 : 탄자니아 니에레레 대통령 집단농장을 통한 사회주의를 위한 아루샤(Arusha) 선언
      나이지리아에서 비아프라(Biafra) 내전 발발
      남아공의 크리스 버나드 세계 최초 심장이식수술 수행
1969 : 리비아의 가다피(Gadaffi) 이드리스(Idris) 국왕 하야시키고 권력장악
1971 : 이디아민 쿠데타로 우간다 대통령 오보테(Milton Obote) 축출
1974 : 리스본에서의 쿠데타로 포르투갈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시작
1975 : 앙골라 내전 시작
       첫 번째 로메협정 조인
1976 : 이디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 살해
       6월 16일 소웨토 학생들 시위발발
       에볼라(Ebola) 바이러스 최초 확인
1977 : 남아공 흑인의식 운동을 주도한 스티브 비토(Steve Biko) 감옥에서 고문으로 인해 사망
1978 : 케냐의 초대대통령 조모 케냐타(Kenyatta) 사망
1979 : 적도기니 대통령 프란시스코 은구에마(Francisco Marcias Nguema) 처형
       나이지리아 올루세군 오바산조 민간정부 이양
1980 : 세네갈의 레오폴드 셍고르(Leopold Senghor) 대통령 퇴임
1981 : 이집트 대통향 사다트(Anwar Sadat) 이슬람 근본주의 군인에 의햐 암살
1984 : 에이즈가 인간 면역결핍증 바이르러(HIV)에 의해 야기됨을 확인
1986 : 카메룬의 니오스 호수에서 가스로 인해 1천7백명의 사람들이 사망
       모잠비크 대통령 마셜(Samora Machel)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89 : 구 소련의 붕괴로 냉전종식
     : 남아공 드 클레르크가 보타에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 -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협상시작
1990 : 넬슨 만델라 감옥에서 석방
       나미비아 남아공으로부터 독립
       케냐 외무부장관 오우코(Robert Ouko) 살해
1991 : 잠비아 카운다(Kenneth Kaunda)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칠루바(Frederick Chiluba) 새대통령 위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소말리아 대통령 축출  
1992 : 부투루스 갈리(Boutros Boutros Ghali) 유엔 사무총장 취임
       알제리 내전 발발
1993 : 남아공 공산당 당수 크리스 하니(Chris Hani) 암살
       ANC 의장 올리브 탐보(Oliver Tambo) 사망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비행기 폭발로 전원 사망
       에리트리아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
       33년간 집권한 코트디부아르의 부아니(Houphouet-Boigny) 대통령 사망 o
1994 :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로 사망 - 인종간의 대학살 촉발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선거와 만델라 흑인 대통령 취임
1995 : 나이지리아의 작가·환경보호주의자인 사로위아(Ken Saro Wiwa) 처형
1996 : 소말리아 군부지도자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ah Aideed) 살해
1997 :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 취임
       자이레전대통령 모부투(Mobutu Sese Seko) 모로코에서 사망
       이집트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관광객 64명 살해
1998 : 나이지리아 군부 아비올라(Moshood Abiola) 심장병으로 사망 - 나이지리아 민간정부 탄생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의 미 대사관에서 폭탄공격
1999 :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 로크비에Lockerbie) 사건 주범 네들란드 국제사법소에서 재판하는데 동의
       남아공 두 번째 민주선거 - 타보 음베키 대통령 선출
       넬슨 만델라 정계은퇴
       탄자니아 전대통령 니에레레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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