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반 정도 무슬림이다. 아버지가 무슬림이고 어머니는 크리스쳔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를 무슬림 학교에 데려가서 코란과 아랍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진짜 무슬림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오랫동안 모스크에 가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금요일 날 기도를 한다.

나의 아내는 매우 진실한 무슬림이다. 나의 아이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대로 맡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로 인한 차별이나 갈등은 없다. 다만 무슬림 자신들이 정부나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니예레레가 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탄자니아를 종족과 종교의 다양성에 불구하고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 대부분의 학교들이 선교학교(미셔너리)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학교에 갈 기회가 더 많았다. 무슬림에 비하면 교육 수준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그들이 좋은 직위를 누릴 기회도 더 많은 것이었다.

주말이나 시간이 있을 때면 나의 샴바에 간다. 매주 토요일. 가서 일도 하고 샴바를 돌본다.  거기에는 샴바를 돌볼 사람을 고용해 두었다.  

텔레비젼은 주로 뉴스를 많이 본다. 시엔엔 비비씨 로칼 뉴스등. 96년에 텔레비젼을 구입했다. 라디오로는 주로 음악을 듣는데 아프리카 음악 레게 카리비안 블루스 등을 좋아한다.

나의 교통 수단은 현재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나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한 다음 내년에 차를 사려고 한다. 우리 직업에 차가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버스는 오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아서 불편하다. 택시는 너무 비싸게 든다.

나는 아침 일찍 5시경에 일어나서 체조를 하고 씻고 아침을 먹고 7시 반에 집을 나서서 오피스로 간다. 더 늦으면 교통 체증이 심해서 늦기 때문이다. 오피스로 출근하여 아침 강의가 있으면 8시부터 시작한다. 방문 학습일 경우는 그 장소로 간다. 지금은 학원에 오는 학생이 엔지오에서 일하는 미국여자, 여기에서 연구를 하는 미국인 대학원생, 아일랜드인 등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오피스로 와서 점심을 먹고 2시부터 다시 오후 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7시경 집에 가서 씻고 다음 레슨을 준비하고 아들과 같이 놀아주고 텔레비젼도 보고 집안 식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저녁은 대개 8시 30분에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독서를 한다. 대개 소설이나 정치 역사 지리 여러 가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나서는 샤워를 하고 10시경 잠자리에 든다.

우리 학원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점차 형편이 좋아지고 있는데 그것이 아주 즐겁다. 또 결혼했을 때 아주 좋았다. 또 아들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으로 이사할 때 등등.

처음 학원을 열었을 때 허가받고 하는 세금을 내고 하는 절차에서 담당 직원이 뇌물을 요구할 때 아주 불쾌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의료는 무료였다. 교육도 무상이었다. 그때의 정책은 모든 어린이는 적어도 7학년까지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문맹률이 매우 낮았다. 나이 많은 사람들까지도 성인반이 있었다. 거의 90%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학비를 못내서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못가고 있다.

전에는 또 1당제였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면 억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당제가 되어 비교적 언론의 자유가 있고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면 반대당에 가입할 수 있다.

지금은 부패가 너무나 심하다. 전에도 부패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고위직 공무원들이 공금을 유용내지 횡령한다. 아주 제도화 되어있다. 전에는 정도가 이처럼 심하지 않았다.  
전에는 텔레비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간직한 우리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소년들이 영화나 텔레비젼에서 본 것을 본뜨려 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선호도도 서양음악을 더 좋아한다. 아랍음악 힙합 음악 등. 청소년은 우리 전통음악이나 전통춤은 싫어한다. 그들은 미국사람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인데 점점 악화가 되고 있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정부의 시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 니예레레 대통령은 좋은 비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니에레레 이후 대통령시절 극심한 부패가 시작되고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두 번째 대통령은 잘못 선출이 된 것이다. 음카파 대통령은 시도는 했지만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그의 내각 선출은 너무 구태의연하고 부패한 인물이어서 도무지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여당과 야당의 관계이다. 정치적 견해가 반대된다고 해서 서로 적이 될 필요가 없는데 그렇다. 전번의 잔지바르 사태도 그렇다.
에이즈 역시 큰 문제이다. 모든 가정이 직간접으로 해당되지 않은 집이 없다. 나만 해도 나의 여동생이 에이즈로 죽었다. 이는 사회경제적인 큰 문제이다. 에이즈로 희생되는 층이 주로 젊은 층이라 노동력 손실이 크다.
지금은 경각심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좋은 점은 탄자니아로 잘 통합되어있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점이다. 우리 주위의 나라들은 다 분란에 휩쓸려있다. 그러나 여기는 평화롭다.
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번창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싶고 내 자신 더 공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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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부구루니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관습에 의하면 반드시 이웃과 알고 지내야 한다. 이웃이란 형제와 같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처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나의 바로 이웃은 인도인이고 다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아마 아이가 열다섯인가 가족이 아주 많다. 두 집다 잘산다. 인도인은 좋은 회사를 다니고 그의 아내도 일을 하고 또 한 집은 차 고치는 큰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친밀하게 모이는 기회는 별로 없고 그저 만나면 인사를 한다.

한번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 때 이웃들도 왔었다. 우리의 친한 친구가 미대사관에서 일했는데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서 파티를 연 것이었다. 인도인은 매우 사람이 좋다. 보통 인도인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우리들 틈에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 사람은 아주 예외적이다.

나의 집에는 현재 아홉식구가 살고 있다. 나와 아내, 아들, 처제 아이들 둘, 처남 아이들 셋 그리고 일하는 여자아이가 둘이다. 아내의 오빠는 공부하러 어디를 갔는데 그동안 우리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돌봐주고 있다. 큰애가 열 세 살이다.

이런 식의 대가족 형태는 보통이다. 우리는 가족들간에 서로 돕기 때문에 내가 나은 형편에 있으면 다른 형제들의 자녀를 돕는다.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학교에 보내기도 하는 등. 이렇게 해서 우리 풍습은 계속 이어진다. 아마 내가 학교 다닐 당시는 우리 친척 누군가가 도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점차 이런 서로 돕는 풍습이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다. 음식 집 교통 전기 수도 모든 것이. 그래서 서로 돕고 싶어도 감당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아직도 그렇다. 시골에서는 먹는 것은 밭에서 나고 아직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으니까 식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내 역시 수입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우리는 서로 어느 편에서 친척을 데려오건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나의 아내는 아버지 쪽에서는 남자형제가 하나이다. 그런데 아내의 어머니가 남편이 둘이었기 때문에 형제가 더 있다. 또 그녀의 아버지도 아내가 셋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쪽 형제가 더 있다.

현재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부구루니는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나와 나의 아내는 수입을 서로 합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집을 지을 때도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에도.

집을 짓는 것은 우리가 아루샤에서 수입을 많이 올려 가지고 왔을 때 짓고 돈이 없어지면 두었다가 또 아루샤를 갔다와서 짓고 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아루샤에 3개월 가 있을 동안 아들과 아들 돌보는 애를 데리고 간다.
집에는 현재 텔레비젼, 비디오, 스테레오, 가구,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사는 편이다.

나는 하루는 밥 콩 야채 다음날은 우갈리 콩 생선 야채 그 다음날은 칸데 등등 매일 바꾸어 먹는다. 어렸을 때는 늘 바나나를 먹었다. 우리는 부코바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는 바나나야말로 가장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다레살람에도 부코바 바나나가 있지만 비싸다. 나의 집에서도 가끔 바나나 음식을 먹는다. 나의 샴바에 부코바 바나나를 기른다. 진짜 부코바 바나나는 아니고 비슷한 종류이다. 진짜 부코바 바나나는 물을 아주 많이 주어야 한다.

아침에는 만다지나 빵 그리고 우리 밭에서 캐온 카사바 고구마 등을 먹는다. 점심에는 이 학원이 있는 장소에 식당 시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먹는다. 저녁에는 집에서 먹는다.

우갈리 자체는 맛이 없다. 반찬과 같이 먹어야 한다. 사람들이 우갈리를 먹는 이유는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튀긴 생선과 코코넛 밀크로 만든 콩이다.

담배는 거의 피우지 않고 어쩌다 맥주를 마실 때 피운다. 맥주는 킬리만자로를 좋아한다. 주말이나 웨딩같은 때.

나는 건강한 편이어서 말라리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픈 일이 없다. 아플때는 병원에 간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안아픈 사람이 한번 아프면 죽는다는 말이 있어서 내 경우가 거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나의 아내는 위궤양이 있다. 작년에야 알았다. 그래서 지금 특별한 음식을 먹고 있다. 양념이 센 음식은 못 먹는다.
우리는 아프면 병원으로 간다. 우리 전통약초는 파는 데가 없다. 마사이 족한테 가면 모를까. 아니면 전통 힐러가 있는데 이는 즉 위치독터 즉 엉터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코바에서 나는 전통 약초를 썼었다. 아주 잘들었다. 말라리아에 잘듣는 풀이 있었다. 아주 썼다. 그러나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 약초에 대한 지식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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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은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다. 우리는 전 학원에서 같이 일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학원에서 매일 만나고 주말 같은 때는 펍 같은데서 만나 한잔하기도 한다.

우리는 학원 강습, 방문 학습, 그룹 혹은 개인 교수 등 매우 융통성 있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나는 나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나의 교육 배경으로 보아 지금과 같은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직장을 다닌다면 월급이 아주 작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와힐리 강습을 통해 나는 농토도 사고 집도 짓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풍족한 생활이란 가령 나의 아이가 아프면 좋은 병원에 갈 수 있고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었거나 다른 직장에 다닌다면 지금 내 형편은 지금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와 나의 아내를 포함한 네 명의 동료가 학원을 서로 공동 소유로 하여 그 중에서 원장을 뽑고 내가 부원장이고 내 아내가 총무를 맡고 있고 또 한 교사는 강의 일정을 담당하고 있다. 이 학원을 만든 것은 4년전이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다. 허가를 내야하고 등록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뇌물을 주어야 했다.

우리가 속해 있던 전 학원에서는 물론 우리가 독립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 학원은 수입을 많이 올리는 반면 우리에게 주는 월급이 너무 적어서 우리를 착취하는 셈이었다.
우리는 학원을 늘리려고 생각하고 있다. 광고도 많이 하고 가르치는 수준도 더 높이고 교사 양성도 하여 다른 지방까지 확충하려고 한다.

나의 아내를 만난 것은 전 학원에서 같이 일할 때였다.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나의 아내는 72년 생이니 나보다 열 살 어리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결혼한지 4년 된다.  

나는 아내를 하나 이상 둘 생각은 없다. 나의 아버지는 아내가 셋이었는데 그것은 큰 실수였다. 다른 아내를 얻기 위해서 이혼을 하면 아이들에게 큰 지장이 있다. 우리는 대가족(먼 친척까지 돌보는 제도)제여서 가족들이 다같이 아이들을 돌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장이 큰 것은 사실이다. 여러 아내를 거느린다는 것은 반대다.

나의 아내는 키고마 지역 족속에 속한다. 그러나 다레살람에서 낳고 자라서 키고마에 가본 일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타누(독립 직전의 정당)의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아주 많다. 아내의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고 장인은 다른 아내와 살고 있다. 그도 역시 아내가 셋이다.  

나는 아직 아이가 하나 뿐이다. 두 살 반 된 아들이다. 우리는 아이를 셋 두려고 한다.

결혼식은 다레살람에서 했는데 여러 가지 섞인 의식이었다. 첫 번 식은 아내의 집에서 있었다. 세르(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와서 결혼식을 공인했다. 이는 낮에 행해지는데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이다. 많은 질문을 한다. 가령 아내와 결혼을 원하는가 등등.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모여있고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쉐르가 먼저 나에게 묻고 그 다음 아내가 있는 장소로 가서 묻는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고 나서 잔치와 춤을 출 때는 같이 있는다.

이 공식 결혼식 다음에 아내 집안 친척들이 시내에서 장소를 빌려 샌드오프 (신부 집안 주최 잔치)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집안에서 장소를 빌려 결혼 잔치를 또 했다.

나는 절반 무슬림인데 아버지가 이슬람이고 나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이다. 아내의 집안은 이슬람 집안이다. 종교의식 때는 칸수(흰 긴 아랍식 옷)를 입었다. 그러나 나는 칸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제리아나 가나는 그들의 고유 옷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 우리도 그런 옷이 있으면 좋겠다. 샌드오프 파티와 웨딩에서는 양복을 입었다. 아내는 서양식 드레스를 입었다.

우리는 신랑 신부가 예물을 교환하는 풍습은 없고 하객들이 우리에게 결혼선물을 준다. 물론 나는 신부값을 냈다. 신부값을 치르지 않고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 나는 150000(약 25만원)쉴링을 냈다. 그러나 이 신부값 제도는 다음 세대에는 사라질 것 같다. 여자를 값을 치르고 사 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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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부코바에 자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 은퇴해서 부코바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다레살람 근교 음베지에 농지를 샀다.  코코넛, 오렌지 바나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집을 지었다. 방이 두 개고 거실과 식당과 부엌이 있는 집이다. 은퇴를 하면 그리로 갈 것이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까지 다 합치면 남자형제가 다섯 여자형제가 셋 있다. 다레살람, 모로고로, 부코바, 무완자, 아루샤 등지에 흩어져서 산다. 다들 결혼을 했다. 가까이 사는 남자형제들과는 자주 만난다. 그제도 모로고로에 사는 형이 왔다. 타자라에 근무하는 형은 오늘 만날 예정이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돕는다.

나의 아버지는 다레살람에서 살기는 했지만 부코바에 돌아갈 생각으로 집을 짓지 않고 셋집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부코바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는 현재 나의 샴바의 길 가까운 쪽에 다시 큰 집을 짓고 있다. 지금은 셋집에서 살고 있는데 올해 말이면 집을 다 지어서 그 집으로 이사갈 것이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리고는 부코바에 있는 웅고 고등학교에 뽑혀서 그리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성적은 디비젼 씨 였다. 디비젼 씨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좋은 성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학입학 경쟁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에 대학교에는 뽑히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는 1년간 아루샤에서 내셔널 서비스 (일종의 군복무)를 했다. 퍼레이드, 무기 훈련, 정신 단련 등의 훈련을 한다. 나의 캠프에는 1200명 가량이 있었다. 남자 여자 다 같이 훈련을 받는다.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훈련이다. 그런데 정부에 돈이 없어서 몇 년간 폐지되었다가 아마 다음달부터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작은 개인 회사에 들어갔다。건설 회사였는데 나는 견습 회계(어카운트 트레이니)로 일했다. 그러나 그 회사 주인인 인도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혹심하게 다루어서 싫었다. 게다가 월급이 너무 작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문에서 외국인에게 스와힐리를 가르치는 교사 양성을 위한 모집 공고를 보고는 응시해서 면접을 하고는 채용이 되었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래서 나를 나이로비로 보내어 교사 훈련을 시켰다.

나이로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에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단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다레살람에 돌아와서 스와힐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응시자는 무척 많았지만 6명이 뽑혀서 그중 4명은 탈락하고 결국 2명만 훈련을 받아 스와힐리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우라고 하는 사립 스와힐리 교육 기관이다.

나는 거기서 6년 정도 일하다가 독립을 해서 프리랜서로 스와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회사는 무척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한테 주는 월급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 간 나 혼자서 일하다가 다른 교사들이 나에게 동조하여 루사라는 새로운 학원을 만들었다. 현재 우리 학원에는 나를 포함하여 교사가 4명이다. 나의 아내도 역시 교사이다.

우리에게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는데 비수기에는 하루에 4시간 정도 가르친다. 성수기에는 미국 평화봉사단과 계약을 맺어서 아루샤에서 가르친다. 그들은 한번에 60명 정도 자원 봉사자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는 아루샤로 가서 3개월 동안 가르친다. 단기 집중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6시간 가르친다.      

이 직업으로 나는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고 많은 다른 문화에 접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는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즉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학원을 냈을 당시 시다(스웨덴 원조기관)와 계약을 맺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연고로 나는 스웨덴을 다녀올 수 있었다. 1993년이었다. 나는 거기에 2개월 있었다. 내가 간 목적은 언어 교육장 견학이었다. 개발도상 국가들과 문화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스웨덴 인스티튜트에서 후원을 하여 갈 수 있었다. 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여러 기관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카나다인, 그리고 미국인, 일본인 서부 아프리카 그밖에 유럽인 등 순으로 학생 수가 많다.일본인들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해 오는데 미국인은 피곤하면 숙제를 안 해 온다. 북구인들은 매우 친절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니에레레 대통령 시절로 무상 교육정책이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정책이 달라져서 부모가 학비를 일정분 부담하도록 되어 아버지가 학비를 냈다.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이었는데도 대학교에 뽑히지 못해서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학원이 자리가 잡히고 내 두 번째 집을 다 짓고 나면 대학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법률을 공부하고 싶다. 만일 다레살람 대학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개방대학에 등록해서 다니겠다.

법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장차 정치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되려면 물론 법을 알아야 할 뿐더러 학력도 있어야 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한다. 내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 기여를 하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있지만 모두 부패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내가 정치가가 되어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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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번창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싶고 내 자신 더 공부하고 싶다.’

  
내 이름은 “야하야 키오비아”이고 카게라 지역에서 1962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다레살람에서 일하고 있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레살람에서 자랐다. 있었다. 여기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secondary)를 다녔고, ordinary level(중등학교)을 마쳤을 때 내가 태어난 부코바 지역에 있는 이흥고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뽑혔다. 이것의 나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지금은 외국인들한테 키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아버지가 아내를 셋 두어서 가족이 매우 크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 여동생(sisters), 이렇게 셋을 두셨지만  누이들이 다 죽어서 나 혼자만 남았다. 한명은 1979년에 죽었다 - 어렸을 때 죽었다. 내 누나는 아직도 공부 하고 있는 동안에 임신하였다. 부모님이 아실까봐 유산을 하려고 했는데 잘못 되어 감염이 되었다. 부모님이 아셨을 때는 너무 늦어서 죽었다. 여동생은 1988년에 죽었다. 에이즈 때문에 죽었다.  

나의 아버지의 연세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70대쯤 되신 것 같고 지금도 살아계신다. 나의 아버지는 테크니션으로 탄자니아 부두조합(하버 오소리티) 에서 일했는데 지금은 은퇴해서  고향인 부코바로 돌아갔다. 그는 부코바에서 미셔너리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왔다. 퇴직할 때까지 하버 오소리티에서 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았다. 적어도 그의 모든 자녀를 학교에 보낼만큼 넉넉하게 지냈다. 우리 형제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단 하나 험이라면 여러 아내를 둔 것이다. 그는 무슬림이기 때문에 아내를 셋 둔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의 어머니는 둘째 아내이다. 그는 나처럼 키가 크고 건강하다. 그는 지금은 부코바에서 농사를 짓는다. 그는 다레살람에서 일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큰 농토를 물려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갈 때 땅을 아버지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코바에 넓은 농지가 있는데 커피와 바나나 옥수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는 또 시멘트 블록에 함석(양철) 지붕으로 된 크고 좋은 집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잘사는 편이다. 오래전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는 족장이어서 아내가 아주 많았다. 아마 열이나 열다섯 정도 될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많았다. 나의 아버지 형제는 아주 많다.

나의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어머니는 부코바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무완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다레살람으로 와서는 국립 제분회사에 속한 병원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은퇴하기 전에 아버지와 이혼했다. 아마 나의 아버지가 셋째 아내를 얻고 싶어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기 때문에 이혼을 한 것 같다.

어머니 역시 은퇴한 후 부코바로 돌아가셨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아들 넷 딸 셋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재 부코바에서 외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 연세가 아마 100세쯤 되실거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어머니는 내가 있는 다레살람으로 도로 올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정확히 숫자 세는 개념이 없어서 그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러나 세 세대는 그렇지 않다.  “새 새대”는 50년대 이후부터를 가리킨다. 우리 전통에 상대의 나이를 묻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부코바에 가서 친척들과 아버지를 만난다. 내가 너무 바빠서 못갈 때는 안부편지를 쓰지만 일년에 한번은 꼭 시골에 가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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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건강은 고혈압이 문제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최근 자동차에 받쳤는데 다리를 약간 다쳤지만 괜찮다.
말라리아, 에이즈가 흔한 병인데 이웃에도 에이즈 환자가 꽤 있다. 위험한 병이다. 항상 아이들에게 이른다. 학교에서도 교육을 시킨다.

고향친구, 학교친구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서 멀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고 주고 이웃과 잘 지낸다. 이웃에서는 마마 살로메와 제일 친하다. 그녀는 간호원이다. 남편은 회계사이다. 그들은 수입이 많아서 잘산다. 그들은 집이 있고 차도 있다. 마마 뇽게자는 (하진)시내 관청에서 일한다. 거기도 역시 월급이 적다.
우리 이웃은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하고 그러는 일은 있지만 말다툼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바쁘지만 늘 서로 인사하고 조금 뜸하다 싶으면 가본다. 주로 일요일날 교회에서 만나고 집으로 찾아 오간다.  

나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어려서 선교회가 집 근처에 있었다. 그들은 약을 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카톨릭에 대해서 가르쳤다. 나의 아버지도 아플 때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도 나이가 많아지자 영세를 받았다. 남편은 성공회이다. 그러나 별로 열심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카톨릭이다. 일요일마다 다 데리고 성당에 나간다. 미사가 3번 있다. 한번은 8시 한번은 10시 한번은 12시이다. 오늘은 성당에 못나갔다. 그러나 큰 딸은 무슬림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데 제한은 없다.  

내 월급은 아주 적다. 92000(약 15만원) 쉴링이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는 조금 많지만 생활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편은 은퇴 후 내내 놀다가 한달 전부터 겨우 밤 경비원으로 나가는데 수입은 형편없다.
우리 식구의 한달 식비로 80000쉴링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의 월급을 가지고 애들 학비내고 먹고 살고 하려면 정말 힘이드는 것이다. 게다가 내 월급에서 세금도 내고 연금부금도 내야한다. 편의 퇴직금은 그 당시 6000쉴링이었는데 없어진지 오래다. 지금 시대는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만 하는데 학비를 대기가 힘든다. 첫째, 둘째는 학비들어가는 것이 끝났지만 그 아래로는 여전히 학비가 들어간다. 때로는 학교에서 가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돈이 아주 가치가 있었다. 전에는 월급을 받으면 한달이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월급을 받아도 그 다음주면 끝난다. 물가가 정말 올랐다. 뭐든지 너무나 비싸다. 설탕이 250쉴링에서 500쉴링으로 올랐다.
이렇게 살기가 힘드니 자연 병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직업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니 돈이 없어서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종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소년도

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남편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데 그가 너무 술에 취하면 슬프다. 그가 술을 안마시면 매우 기쁘다.  
그는 돈이 생기면 술을 많이 마신다. 나는 마케레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고혈압이어서 더 그렇다.

나는 은퇴한 후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투쿠유에 집을 지을 생각이다. 커피샴바가 벌써 있다. 나는 은퇴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다레살람에서 살 것 같지가 않다. 돈이 없이 다레살람에서 산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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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군인이어서 이리저리 멀리 가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가면 6개월 씩 집에 안오기가 일쑤였다. 지금은 은퇴해서 집에 있다. 그동안 아무 하는 일이 없다가 얼마전부터 밤 경비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아들 둘에 딸 다섯 아이들이 모두 일곱이다.  큰딸이 1971년에 태어나서 스물아홉이고 그 밑으로는 대강 세살 터울이다. 큰 애는 비서양성소를 나왔는데 결혼해서 지금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코바에 살고 있다. 결혼할 때 우리에게 신부값을 4만쉴링 냈다.  
둘째는 스물 여섯된 딸로 이 근처 유치원에서 가르친다. 중학교를 마치고 교사양성 컬리지를 다 끝냈지만  교원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수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셋째는 스물 넷 아들이다. 이녀석은 도무지 공부를 안한다. 이 애가 원하면 무슨 교육이든지 교육을 다 시킬텐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놀면서 이것을 해보라고 해도 말을 안듣다가 지금 오후에 하는 어덜트 스쿨에서 기술을 배운다.
넷째는 딸인데 가장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다레살람 대학을 다닌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공립이기 때문에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오히려 용돈을 타서 집에 가져온다.
다섯째는 부코바에서 증학교를 다니고 있고 여섯째도 중학교에 다닌다. 이 애는 천식으로 고생을 한다. 막내가 아들로 지금 열두살이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나는 아침에 7시에 출근을 한다. 걸어서 10분 걸린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씻고 아이들한테 티를 만들어 주고 내자신은 집에서 티를 마실때도 있고 너무 피곤할 때는 그냥 학교에 가서 티를 마신다. 학교에서 티가 제공된다. 막내는 아침에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데 어떨때는 그냥 학교로 달아난다.
나는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을 하고 10시에 티 브레이크가 있다. 티 브레이크에는 티와 챠파티나 삼부사나 빵등을 곁들여 먹는다. 티는 학교에서 제공되고 다른 것은 각자 사야한다.
인노센트는 돈을 주면 무엇을 사먹고 아니면 집으로 뛰어와서 티를 마시고 간다.
학교는 2시에 끝난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는다. 그때는 아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다.  
오후에는 약간 쉬고 나서 세시부터 집에서 과외를 해준다. 지금은 과외학생이 5명이다. 한명당 한달에 2000쉴링씩 낸다. 일주일에 세 번 한시간씩 가르친다. 키스와힐리와 산수를 가르친다.
그 다음은 빨래를 하고 저녁을 짓는다. 저녁은 8시나 그 후에 먹는다. 늦은 식구들은 나중에 따로 먹는다.
아침은 티와 빵으로, 점심은 거의 항상 우갈리를 먹는다. 준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밥을 지으려면 돌도 골라야 하고 시간이 걸린다. 우갈리와 콩, 시금치, 가끔 고기, 생선 등을 곁들여 먹는다. 가끔 도마토도 같이 먹고. 아이들이 밥하는 것을 도운다.
우리는 게나 새우같은 것은 싫어한다. 음베야 전통요리는 바나나를 벗겨서 쌀어서 햇볕에 말린다. 그런후 찧어서 가루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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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8학년을 마쳤다. 키사 미션스쿨이었다. 학교까지 12킬로 정도 되었다. 아침 일찍 5시경 일어나서 가야했다. 매우 멀어서 항상 뛰어가야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니고 시험에 통과하면 5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고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더 집에서 멀기 때문에 나는 매우 겁이 났다. 거기서 4년을 가르쳤다. 나는 결혼도 거기서 했다.
사실  아버지는 학교를 마친 후에는 바로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나의 큰 언니는 아버지가 신랑감을 골라주었다. 아버지의 말을 안들으면 쫓겨나고 어머니가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신랑감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때 미스터 마가울라(남편)은 다레살람의 무굴라니 제이케이티에서 군인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 부모를 방문하러 왔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이 되자 그리로도 찾아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고향집으로 데려가서 나의 부모님께 소개하자 승낙을 했다. 남편은 다우리를 치르고 결혼했다. 결혼식은 내 근무지의 성당에서 했다. 작은 어머니와 브라더가 왔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에는 참석을 안하는 것이 관습이다. 1970년 이었다. 나는 그때 22살이었고 남편은 25살이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 후 시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고 일 주일을 머물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결혼하고 남편의 부모 집에 일 주일 머물때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시어머니가 다 일을 했다. 나는 2주 휴가를 받아서 1주일은 나의 친구의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결혼식 한 후 1주일 동안은 시댁에 머물렀다. 시부모님은 아직도 살아계신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남편은 양복을 입었다.    
결혼 후 다레살람으로 와서 남편이 있는 제이케이티의 캠프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캠프 가까이에 있는 재활교육원에서 가르쳤다. 거기서 2년 가르친후 음토니 초등학교에서 내내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나는 캠프에서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거의 30년을 살아왔다. 남편이 87년부터 94년까지 8년간 숨바왕가(탄자니아 남쪽 국경근처)로 전출이 되어 거기가서 산 해를 빼놓고는 내내 여기서 살았다. 우리가 숨바왕가에 갔을 때는 나의 큰언니의 딸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애가 계속살고 나머지는 세를 놓았다.  
남편이 숨바왕가로 전근을 했을 때 나도 그곳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남편은 그곳에서 은퇴를 했다. 그후 다시 다레살람으로 와서 나는 지금의 소코이네 학교에서 내내 근무하고 있다. 나는 아마 이 학교에서 은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55살에 은퇴하게 되어있는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60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년이면 55세여서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60살까지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좋아한다. 다른 교사들과도 잘 지낸다. 경조사가 있을 때 참석하고 서로 돕는다. 한반에 125명이 되기도 하다. 너무 학생수가 많다. 교과서도 모자라고 책걸상도 모자란다.  
학교에서의 문제는 주로 학부형에게 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교육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학생들은 결석을 많이 하고 남학생들은 아주 거칠다. 교실 밖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고 담배를 피우고 훔치고. 고학년들.
벌을 주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오늘 벌을 주어도 내일 또 그런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학부형들이 학비를 못내서 학생들이 결석하는 일이 많고 학생들이 안나오기도 해서 애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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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내 이름은 오스타이고 아버지는 아브라함 킬라사이다. 나는 음베야 지역에서 왔다. 냐큐사가 나의 부족이다. 1948년 생이다.
나는 소코이네 국민학교 교사이다.
나의 아버지는 1976년에 돌아갔다. 아마 70세 정도였을 것이다. 아주 나이가 많았다. 나의 어머니는 이름이 레지나이고 ( 나의 딸 이름이 레지나이다. 어머니를기억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다.
나의 아버지는 chief 였다. 큰 치프와 작은 취프가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작은 취프였다. 그래서 돌보는 지역이 작다. 타누 시절에는 그는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수많은 커피 밭이 있었다. 나큐사는 소나 다른 짐승은 기르지 않고 농사만 짓는데 주로 커피와 바나나이다.
아버지는 아내가 여섯명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어머니와 맨 마지막 아내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다 죽었다.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이 모두 25명 태어났다. 지금은 그중 몇은 죽고 나머지는 살아있다.
각 아내들의 집이 따로 있고 아버지의 집 역시 따로 있었다. 아버지의 집은 커서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서 모였다.
우리 어머니한테서 난 형제는 언니 둘뿐이고 남자형제가 없다. 큰 언니는 죽고 나와 둘째언니 만 남았다. 어머니는 고향인 음베야의 투쿠유에서 지금 언니와 살고 있다. 둘째언니는 아이들이 8명이다. 남편은 죽었다. 농사를 짓는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장례식에는 물론 갔었다. 매장은 낮에는 하지않고 저녁에만 한다. 수많은 사람이 왔었다. 이웃들, 다른 칩들. 장례기간동안 가족들은 배 부분을 천으로 묶고 신발은 신지 않는다. 딸들은 걸으면 안되고 무릎 걸음을 걸어야 한다. 여자들은 장례 절차는 볼 수 없다. 칩의 장례식 기간은 길다. 2주일 정도 걸렸다. 응고마(전통 음악과 춤)가 있고. 소를 여러마리 잡았다. 또 다른 칩들이 소를 가져오고 아들들이나 사위가 소를 가져와야 한다. 그밖에 밥, 바나나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장례가 끝나면 가족들은 머리를 깍는다. 머리가 남아 있으면 액운이 온다고 믿는다. 장례 때는 아무도 씻으면 안되고 매장 후 우리는 몸을 씻는다.
딸들과 아내들을 마을 여자들이 업어서 강으로 데려간다. 아직 걸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강물에 가서 몸을 씻었다.
아버지의 밭은 그대로 거기 있고 우리 어머니를 위시해서 가족들이 살고 있다. 맨 큰 아들이 전체적으로 돌본다.
큰 언니는 학교에 안다녔고 둘째언니는 초등학교 3년까지 다니고 결혼했다.
나의 한 남자형제는 나이로비 대학을 마치고 한 여자형제는 중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4 남자형제가 폼4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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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교사직을 1978년부터 키고마에서 시작했다. 키고마는 아주 멀어서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키고마에서는 잘 지냈는데 나는 아직 젊었고 그 지역은 여기보다 모든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키고마 지역에는 와하 부족이 산다. 그들은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 대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거기서는 키와 말을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는데 그 애들은 아직 스와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나는 산수와 스와힐리와 지리를 가르쳤다.

내가 거기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레살람에 왔더니 아버지는 무힘빌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마 후 돌아갔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굉장히 크다. 학생수가 2천 5백명이다. 교사의 수는 54명인데 7명만 남자선생이고 나머지는 다 여교사이다. 나는 이 학교에 벌써 18년이나 근무를 해서 이제 다른데로 옮기고 싶다.
지금 내가 있는 초등학교에는 한 학급이 100명이다. 교실은 17개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이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뉜다.

초임교사의 월급은 40000쉴링 정도(약 6만원)이고 정년은 60세이다. 은퇴 후에는 연금이 나온다.

내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와 학용품을 주고 급식을 했으나 지금은 그러는 아무데도 없다.
요즈음은 교과서가 너무나 부족하다. 가령 책방에 가서 교과서를 사려해도 6학년 산수교과서가 겨우 열권 밖에 안된다. 세 학급이면 한 반에 겨우 3권이 돌아가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책에 있는 문제를 몽땅 칠판에 베껴놓고 풀라고 한다. 전에는 둘이 앉는 책상 하나에 책 한권이 돌아왔는데 지금은 책상하나에 네명 여섯명이 앉고 그나마 어떤 교실은 책 걸상이 없어서 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나의 월급은 70000쉴링이다.(약 12만원) 생활비가 비싸기 때문에 월급은 충분하지가 않다. 한가족의 하루 생활비가 최소 2000쉴링 드는데 한달이면 그것만도 60000쉴링에 집세를 생각하면 월급이 모자란다.

더구나 큰 딸이 있어서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그 애는 작년 중학교를 마쳤는데 시험성적이 별로 안좋아서 공립 고등학교에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 애를 사립고등학교라도 보내려고 두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1년 학비가 매우 비싸다. (약 50만원) 아이 교육 시키는데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나는 지금 큰 딸이 하나니까 고등학교를 보내려고 하지만 아이가 여럿이면 보낼 수가 없다.

우리는 음췌조라는 것이 있다. 가령 6사람이서 한달에 25000 쉴링씩 돈을 내서 한 사람이 가져가는 제도이다. 나와 내 동생과 다른 교사 4명이 이 음췌조이다.      

월급이 너무 작기 때문에 과외를 안 할 수가 없다. 과외학생이 25명인데 교사 3명이 교대로 가르친다. 나는 이 수입으로 음췌조를 낸다.

다레살람에는 여교사가 훨씬 많은데 대개 여교사들은 그 남편들이 충분한 수입이 있기 때문에 과외를 잘 안한다. 남교사들이 많이 한다. 학생들은 그 부모과 과외비를 낼 수 있는 학생만 과외를 한다.

나는 매일 7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한 다음 아침(티)을 먹는다. 그 다음 학교에 간다.  7시 반부터 수업을 시작해서 1시까지 끝내고

다음 집에 가서 우갈리를 먹고  3시부터 과외를 한다. 그 다음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바에 가기도 한다. 저녁에는 다음날 수업을 약간 준비한 다음 잔다. 금요일에만 기도를 한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맥주 한병 정도 마신다. 일주일에 하루정도 바에가서. 죵고와 술마시는데 어떨때는 그가 어떨때는 내가 돈이 있는대로 번갈아가며 낸다. 절대로 따로 계산하지 않는다.  맥주는 킬리만자로보다 필스나 아이스를 좋아한다. 찬 맥주가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따뜻한 맥주를 좋아한다. 나는 폼배(전통술)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키고마에 있을 때 품베를 마셨다. 저녁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클럽에 가서 로컬 비어를 마신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집을 짓고 싶다. 나는 키마라에 땅을 가지고 있다. 2년 전에 샀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딸은 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

( 2000. 5. 24, 25  다레살람 민속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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