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기행 I/서상현의 아프리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03/02/03 말리(The Republic of Mali)
  2. 2003/02/03 세네갈
  3. 2003/02/03 코뜨디부아르
  4. 2003/02/03 가나
  5. 2003/02/03 베넹
  6. 2003/02/03 니제르
  7. 2003/02/03 이집트
  8. 2003/02/03 리비아
  9. 2003/02/03 나이지리아
  10. 2003/02/03 수단
말리(The Republic of Mali)


국 명 : the Republic of Mali

수 도 : Bamako

면 적 : 1,240,192 Km2 (서부아프리카 중 가장 큰 나라)

위 치 : 아프리카의 서부 내륙국으로서 위도 11°와 25°N, 경도 5°E에서 12°W에 걸쳐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네갈과 기니, 북쪽 으로는 알제리와 모리타니,동쪽으로는니제르와 부르키나소, 남쪽으로는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시 차 : 한국보다 9시간 느리며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의정오는 한국의 21시이다.

지 세

: 말리의 지형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속해 일부 지역에만 고원과 평원이 있을뿐 대체로 평평하고 단조로운 편 이다. 남부와 남서부의 고원은 높에 300~600m의작은 언덕들이 연속해 있으며, 동부의아드랄드 데지포라 산괴가 편지에서 약 600m의 높이로 솟아평탄한 지형에 변화를 주고 있다.

북부에 있는 타네즈루프트와타우데니의 광대한 평원은 사하라 사막에 속해 있다. 남서부와중남부는 니제르 강 상류 유역의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니제르 강 전체 길이의 거의1/3이 말리를 관류하면서 내륙 삼각주를 현선한다. 니제르 강유역은 주기적 범람과 삼각주의 비옥한 충적토로 중요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유역중앙부에는 거대한 내륙 델타 및크고 작은분류ㆍ호소가 형성되어있다. 말리의젖줄이라고할 수 있는 니제르강은 우계에는 델타지대 일부에서 범람하나 하류에는 피해를 미치지않고 건계 또한 갈수상태에 이르지 않는다. 세네갈 강의원류가 말리 서쪽 끝에서 시작된다.

전 국토의 약 20%가 경작지이며 1/4가량은 목초지나 방목지로이용되고 철광석, 보크사이트, 금, 니켈, 구리, 망간 등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으나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통 화
: 화폐의 단위는세파프랑(CFA 프랑) 으로 1993년을 기준으로보면 1달러는 293.2 CFA프랑이며 1CFA 프랑은 약4원 정도가 된다.

전 압 : 전압은 220V, 50Hz를 사용한다.

통 신
: 말리의 전신 및 전화망은 질이나 양적으로극히 미약한 형편이며, 보급률 또한 skrw아 1990년에 전화의 보급률이 15,000대에 불과하였다. 또한 시설의 보수 및 개조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서비스 내용도 좋지 못하다. 이블 회선은 바마코~크리코로,바마코~세구, 바마코~부구니 간3 회선 밖에 없다.외국과의 통신이나 전화는 제대로 기능을하고 있는 편이지만 말리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부족한 현실이다.


인 구 : 1,060만명

- 인구 성장률은 2.78%, 인구 밀도는 7명/km2이다. 인구의 90%가 국토의 1/3에해당하는 남부의 비옥한땅에 살며 10%만이말리의 2/3에 해당하는 북부의 건조지대에 살고 있다. 국민의 20%가도시네 거주하고 있으며, 출생률과 사망률이 높은 편에속하는데, 이는 서아프리카의 전체 비율과 비슷하며 인구의 절반 가량이 15세 이하이다.

말리에는 흑인과 백인 주민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백인 가운데는 무어인으로 알려진앏-베르베르족만이 만이 아니라베르베르족의 유목집단인 투아레그족도 포함되는데,이들은 주로 말리중부의 사헬 지 대에 주로 거주한다.

흑인 주민은 농경생활을 하는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며,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밤바라족이전체 인구의 1/3 가량을이루고 있다. 2번째로 많은 페울족은 사헬과 마시나에서 유목생활을하고 있고, 농경민인 소닌케족은 가나제국을 세웠던 부족의 후손으로 사헬 지대 서부에 살고 있다. 마리 제국의 전통을 지켜온말링케족은 남서부에 거주하며 송가이족은 젠네에서 안송고에 이르는니제르강 유역에서 생활한다. 도곤족은반디아가라 주변의 고원지대에상고 있으며 볼타어를  쓰는 보보족, 세누포족, 미니안카족은 동부와 남부에 산다.

주요종족 : Mande(50%), Peul(17%), Voltaic(12%), songhai(6%)등


관습/예절 :다른 아프리카국가들과 특별히 다른관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국민의 34.5%가 원시종교를 믿고있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서는 그 종교특유의 관습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으며 북부 유목부족인 베르베르계와 농겨우족인 흑인계는 관습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남녀교제에 관한 도덕율은 지역에따라 차이를 보인다. 도시에서는 15,6세부터 교제가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방에서는 부족이나사회 집단에 따라 규칙이다르다. 대개의 경우 결혼상대는 가족이 정하며 본인은 그것을 승낙하는 형식으로이루어 지는데, 결혼에대해서는이슬람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는대다수의 아프리카국가에 비해그다지 남성에게 의존적이지 않아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이혼이 가능하다.

일부다처제가 아직까지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제 2, 제3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이지않는여성도 많이 있다. 민족적으로 다양한 면을 가진 말리이지만 악수는 모두공통적이다. 왼쪽손으로 오른쪽팔을흔드는데 이는 존경의뜻을 의미한다. 한편, 남성이여성과 악수를 할경우에는 여성쪽에서 먼저 손을내밀었을때에만 가능하다.

실내나 방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며마을을방문할 경우에는방문처의 주인에게줄 선물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상대방을 칭찬해주면 대단히좋아하지만겸손해서 드러내지않는 것이보통이고 이야기 중에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좋다.

마을의 촌장과 정식으로 이야기를하려면 중간의 소개인이 필요한데, 방문자는 촌장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고몇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이들이 손님의 말을 자신의 견해와 함께 촌장에게 전달하고 또 촌장의 말을 손님에게 전달한다. 또한 말리를 여행할 경우 주의해야할 점은 현지에서사진촬영을 할 때는 반드시정부당국의 허가를 받고나서 해야 한다.


기 후 : 열대성 기후(건기 11~5월, 우기 6~10월)

- 말리는 수단 후대, 사헬 시후대, 사하라 기후대의 세 기후대에 jfcu있으며1년은 우기와건기로 나뉘어진다.우기는 6~10월,건기는 11~5월까지로, 건기 중네서도 12~2월은비교적 시원한 편이며, 9~11월 사이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기후를 보인다.

남부는 열대성 기후인 수단기후대에 속하며, 5~7월사이에 우기가있고, 연간 강우량이 500~1400mm정도에이르며 수림이 무성하다. 온도 및 습도는 지역이나 낮과 밤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평균기온은 24~30℃ 정도이며, 특히 건기에는 사진을 수반한 열풍하르마탄이불어 건조와 더위가 한층 심하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과 접해 있는 반건조지역으로 사헬 기후대에 속하며,연평균 강우량은200~500mm 정도이며udrbsrldhs은 23~36℃이다. 북부의 광대한사막지대는 사하라 기후대로사실상 비가 내리지 않아 몹시 건조하며, 낮 기온이 47℃를 넘는 반면밤에는 4℃까지 내려가는 등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다.


종 교 : 회교(90%), 토속종교(9%), 기독교(1%)

- 적어도 말리인의 90% 정도가이슬람 교도이고 9% 정도가부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약 1% 정도가 기독교를믿고 있다. 프르족,소닝케족, 모루족,송가이족 등은예로부터 이슬람교를믿고있지만 비교적 늦게 이슬람교로 개종한 부족중에서는 부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동시에행하며 가면 등을사용하기도 하고 토템의 동물을 신봉하기도 한다. 그러나대부분 발생되는 일에대해서는 전례를 따르는 것이지배적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별로없다.

언 어 : French(공용어), Bambara, numerous African languages


* 문맹률 :69%

- 말리는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국가 공무원가 도시주민사이에 사용)이며 가장 널리사용되고 있는 현지어는밤바라어이고, 교육의 대부 분이 프랑스어로 행해지고 있다.

교 육 : 말리 어린이의단 15%만이 초등학교를 다닌다. 1990년대 초반에는연간초등학교 입학생수가375,000이었다.약, 88,600명의 학생이 중등학교나 직업학교에입학했다. 수도에는 밤바코에는 행정관리, 의학그리고 공학을 가르키는 학교가 있으며 1990년대 초반에 약 6,700면의학생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정 치

* 정 체 :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 정 당 : ADEMA, CNID, US-RDA, MPR 등
* 정 부 : 1991년까지 말리는1974년에 제정되고 1979년에 수정사항을 포함하여 효력이 발생한 헌법아래 놓여있다. 야당의 반대없이 두 번 당선된 무싸 대통령은 1979년에 결성된 말리의 유일한 정당인말리인의 민주연합당의 당수로서 독재정치를폈다. 1991년 쿠테타로 인해 이 정당은해체되었으며 1992년 1월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헌법에 의해말리는 복수정당의민주공화국이 되었으며5년임기의 대통령이 당선되는 제도가 생겨났다. 대통령은 수상을임명하며, 수상은 내각의원을 임명한다.단원 국회는 각각 5년 임기로 당선되는 129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대외관계 : 비동맹을기축으로 한 전방위 외교 전개


군 대

* 총병력 : 7,350명(육군 6,900, 햐군 50, 공군 400)
* 치안경찰 : 7,800명

영 해 : 내륙국

예 산 : (1996년)

* 세입 2,500억 FCFA/세출 3,199억 FCFA

경 제 : 말리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경제는 주로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작물은 대부분 니제르강과 그 지류의 관수와범람에 의존하고 있다 조면이나 식품 가공과같은 소규모 산업도 존재한다.니제르강 주변에 살고 있는 말리인들에게 니제르강의 어획은 매우 중요하다.말리의 어업은 잉여물 생산하고 있으며잉여생산물은 건조, 훈제되어수출되고 있다. 천연광물에 대한 조사도 활발히 이루어져 금, 소금, 대리석, 인회암과 대리암에 대한 채취가일어나고 있으며,철광서과 우라늄은가까운 미래에 채취될 전망이다. 발견된 다른 광물들로는 석유, 보크사이트, 망간, 아연, 구리 그리고 리튬등이있다. 1990년대 초반에 말리는 약1억 5천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으며이의 대부분은 수력발전에의한것이었다.

* 국민총생산 : 2,800만불 미불(1996년)
* 1인당 GNP : 273불(1996년,최빈 개도국중 하나)
* 화폐 단의 : 프랑 세파프랑(FCFA/0.01프랑스 프랑)
* 주요 산업 및 산품

-농업 : 면화, 땅콩, 밤, 옥수수 등
-축산업 : 소, 양, 산양, 낙타 등
-공업 : 식품가공, 시멘트 등
-광업 : 인광석, 금, 암염 등

* 경제개발계획 : 일련의 정부주도 경제 구조 조정 노력 전개중.특히,

'96년 2월 IMF와 3개년 경제 구조 조정 계획을 합 의하고 재정 수지 개선, 수출 산업 육성, 사회 간접시설 확충 및 민영화 추진중

* 외국 무역(1995녕/단위: 백만미불)
- 수출총액 : 470, 수입총액 : 738
- 주요수출입 대상국

수출 : 태국 18.1%, 중국 13.6%, 벨기에,룩셈부르크 10.7%, 세네갈 4.2%등
수입 : 코트디브와르 26.6%, 프랑스 17.4%, 포루트칼 8.2% 등

- 주요수출입 품목 : 면, 가죽, 금 자본재, 식량, 연료 및 에너지


* 경제원조 수혜 현황(1995년/단위:백만미불):544.9
- 양자간 : 270.9(프랑스 81.7, 일본 47.8, 독일 46.2, 화란 47.8등)
- 다자간 : 274.1(EU 82.5 등)


우리나라와의 관계

* 관계수립일 : 1990년 9월 27일
* 공관 설치현황
- 아국공관 : 세네갈 상주
- 상대국 공관 : 인니 상주

* 주요인사 교류
- 방한 : 85.10 Diakite재무상공장관 및 Diarra 기획장관,IMF,IBRD서울 총회 참석
         90.03 Keita 주벨기에 대사

* 양국교역(말리기준/1998년/단위:천미불)
- 수출 총액 1,148, 수입총액 17,032
- 주요품목 : 철도외 차량, 면류, 고무, 전기기기, 인조 필라멘트, 기계류등

* 경제, 기술 협력
- 무상 기자재 공여
95년 : $7만 (엑셀 6대 및 부품)
96년 : $7만 (엑셀 5대)
97년 : $7만 (소나타 3대 및 부품)
- 기술협력 : 99년도 2명 (행정발전과정 및 광물자원탐사과정 각 1명)
- 기업진출 : (주)영풍산업 말리지점 및 AFKO.lnc

* 교민현황(99년) : 17명



북한과의 관계

* 관계수립일 : 1972.9.11
* 공관 설치 상황
- 북한측 : 상주공관(61.8.29), 운영후 폐쇄(98.2), 현재 주기네 대사관이 겸임
- 상대측: 북경상주

약사

* 9 ~ 19세기 말리제국
* 1898 프랑스 식민지
* 1960.9 말리공화국 선포 (Modibo keita 초대 대통령)
* 1968.11Moussa Traore대령쿠테타 주도Keita 대통령축출후

군사 정권 수립
* 1976.9 말리 인민 민주 동맹(UDPM) 창당
* 1991.3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 발생직후, Troure 공수 부대장 주도의 쿠테타 발생으로 Tarore 대통령 축출, 구금 및 과도구국위(CTSP) 결성
* 1992.3 최초의 민주 총선 실시
* 1992.4 Konare 대통령 선출(1992.6 취임)
* 1994.1 현지화 세파 프랑 50% 평가 절하
* 1997.6.8 Konare 대통령 취임(재선)
* 2002년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 예정


역 사

말리는 서부수단의대제국들의 중심지로가나, 말리그리고 송하이의 툼복투나 가오같은 도시들은 교역, 교육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였다.

가나는 기독교가 탄생할 즈음네기원을 두고 있으며 절정기는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맞았다. 말리 제국은 11세기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전성기는 말리를 1253년부터255년까지 지배한순디아타의 지도 아래 처음 맞았다. 최고 전성기는 14세기 만사무사의지도 아래 KW이하였다. 만사무사는 말리 제국의 영토를 가오의 동쪽 끝 대서양까지 넓혔다.

1645년까지 왕들의 지배가 계속 되긴하였지만 말리 제국의 몰락은급속하게 찾아왔다. 구 뒤를이어 가오의 송하이 제국이설립되었으며 이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들로는 순니 알리(1464~1492),아스키아 무하메드(1493~1528)등이 있었다. 최고 전성기에 송하이는 대서양 연안부터 카노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녔으며 현재 말리 북부의대부분과 기니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의 대부분은 1591년 모로코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니제르강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들이 설립되었은데 이중 세구가 특기할만하다. 이 국가들은19PRL 중엽 이슬람의 지도자인 알 하지 우마가 벌인 전쟁에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그의이슬람 제국은 니제르 강부터 퉁복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아마두는 1893년에 프랑TM군에 패배하였다.

1904년에 말리는 프랑스으 식민지가되었으며 1902년에는 프랑스렬 수단의 일부로 편입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중 하나가 되었다.말리인들의 정치 활동은 프랑스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이는 2차대전이후에나 풀렸다. 다양한 정당들이 설립되었으며 이 정당들은 마침내범아프리키 민주주의 동맹의 말리 지부에편입 되었다. 1957년의 정치개혁때에는 이 동맹이 최대의 정당이 돼있었다.

1958년에 프랑스 수단은 새로이 결성된 프랑스 공동체의 가입을 결정하였으며 1958년 11월 24일에는 수단 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하였다. 1959년 1월 17일에 수단은 세네갈과 연합하여 말리 연방국을 결성하였으며 1960년 6월 30일에는 모디보 케이따를 대통령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연방은 같은 해9월에 해채되었으며 전 프랑스 수단은1960년 9월 22일 말리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새출발하였고, 케이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같은달 말리 공화국은유엔의 일원이되었다. 독립 이후 말리는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경제 발전의 정책을 고수해왔다.

1968년 11월에는 케이따 대통령의 일인독재가 육군 소속 장교들의 쿠테타에 의해 무너졌다. 이 쿠테타로 인해 무싸 중위가 이끄는군사평의 회부가 들어섰으며 이후 무싸는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정부는 자본의 부족과 1970년대 중반의가뭄으로 인해 경제를 발전시키는데실패하였으며 내부 권력 싸움이 벌어져 1978년에 또다시 쿠테타가 일어났다. 이 쿠테타는 결국 실패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억압속에 평의회몇몇 전직 의원들이 체포되어 형을 언도 받았다.

트라오르 대통령은 유일한 후보로나서 1979년과 1985년에 당선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말리는 가뭄이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부르키나 파소와의 국경전쟁은 1985년 말에휴전이 선포되었다. 채권국들의 압력 아래 말리는 1980년대 말에 수익을 보지 못하던 많은 공기업들이 민영화 하였다. 트라오르 대통령은 1991년 3월육군 소속의 장교들의 쿠테타에 의해 전복되었으며 1992년 1얼 다수정당을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이제정되어 알파 오무마르 코나르가 4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코나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1993년 4월밤바코에서 일어나 많은 정부기관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트라오르의 지지자들의 쿠테타가 일어났지만실패하고 말았다.

1990년과 1994년 사이 북부 말리에서 일어난 무장 폭동과 폭력으로인해 15만이 넘는 말리인이 말리를 떠나야했다. 1995년 중반에는 말리 정부의 대국민 화합에 대한노력과 평화/휴전 체결서로 인해북부 말리에는 다시 정치적 안정이 찾아왔다.

휴전 체결과 무장해제 노력은더욱 강화괴었으며 1997년 3월대통령의 인권 보호 선언문의 발표는 수년가느이 폭력을 종지부 짖는산징으로 보이고 있다. 이런 긍정적인요소들은 투아렉과 무어 계통말리인들의 복귀를 부추기고 있다. 1999년 6월 말까지약 131,780명의 말리인 피난민들이 자발적 또는유엔의 비호 아래알제리아, 부르키나파소, 모리셔스, 니제르와 세네갈로부터 돌아오고 있다.

말리의 케잊 지역에는 약6천명의 모리셔스 피난민들과 17개의아프리카국가(대부분 시에라 리온과 리베리아출신)와 동부 유럽 국가들의피난민 1,924명이 살고 있다. 애초 16,800여명의모리셔스 피난민 증약 10,8000명의 피난민이 유엔의 도움을 받아 복귀되었다.

1996년 이래 시행되고 있는 말리피난민들의 복귀 정책은 식수의제공과 같은 서비스의 복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이 정책은제한된 자원과 지급이 연기되고 있는 자본의 어려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이 복귀 정책은 우여곡절 끝에 1999년 6월 30일 마무리지어 뎠다.

말리에 남아 있기러한 모리셔스피난민들은 케이즈지역에 상주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피난민 위원회의기본틀하에 피난민적합성 심의를 거칠 예정이다. 피난민으로남아 있지않기를 원하는사람들은 말리의 이민과 귀화 절차의 결정을 받게 될것이다.



여행에 관하여.....


* 여행하기 좋은 곳

- 바마코 :바마코는 말리의수도로서 상업의 중심지로얼마쯤 번영을 이루기는 하였지만 대도시 냄새를 풍기지 않는 거대한 아프리카의 전원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붉은 모래 먼지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거리에서 파는 꼬치구이와 석쇠구이 고기를 느긋하게 먹고 있다. 저녁 무렵이면 길가에 의자를 들고 나와 시원한저녁 바람을 쐬면서 차를 마시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시답지 않은 편안함이 바마 코의 매력이다. 바마코에서는랜드 모스크와 천과물 시장인 그랜드 마르셰를 둘러보면좋다. 바마코의 교통편으로는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버스가적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시내 중심까지는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말리의 택시는 합승제이기 때문에 손님이 이미 타고 있어도 자신 의 목적지와같은 방향이라면함께 동승해도 좋다.요금은 시내는 300~400CFA 정도이며 야간에는2배의 요금을 지불 해야 한다.

- 몹티 : 바니강과 니제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동서로 웅대한 니제르 강이 건너다 보이는활기에 넘친 도시가 바로 몹티이다. 바마코에서 가오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동서남북의 수상 및 육상교통의 요충지이다. 특히 돈벌 이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많은 이곳은 서아프리카 각지의 사람들이 집합하는 국제색이 풍부한 도시이다. 민가 옥상의 테라스에 올라가면 니제르 강이 한눈에 보여 아침해와 저녁 노을의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 할 수 있다. 몹티의 교통 사정은 바마코로부터 약 630km 거리이며 포장도로가 구비되어 있다. 니제르 강의 배가 운행중인 기간에는 쿨리로부터 약 3일 정도 걸리며, 통북투와 가오에도 배로 갈 수있다. 한편, 몹티에 도착하면 반드 시 외국인 등록을 해야하며경찰서에 가서 패스포드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 통북투: 통북투는 12세기에 투아레그에 의해 세워졌다. 사하라 사막의 남쪽변두리 니제르 강에가까운 이 지역은금을 찾아서사막을 넘어온 아프리카의아랍의 캐러밴과 소금을 구하려고피로그에 타고서 남쪽으로부터찾아온 흑인의 해후장소였다.통북투에 도착하게 되면 곧바로 경찰서로 가서 외국인 등록을해야한다.통북투의교통은다음과같다.가오에서 424km(2~3일) 거리이며, 요금은 트럭 7,500CFA이며, 4륜구동차는 10,000CFA 정도이다. 또한 몹티에서 약 430km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금은 8,000CFA(2일) 정도이다. 그러나 강의증수기에는 통행이 불가능하다. 피로그를 이용할 경우의 요금은8,000CFA(약 일주일)이다. 바마코에서는 약 850km 정도의 거리이며 요금은트럭 12,000CFA 정도이지만트럭을 구하기가힘들기 때문에 담배 수송차를이용하는 것이 좋다. 항공로는반줄에서 감비 항공이 주1편(월요일) 운항하고 있다. 한편,택시 파크에서는 군담이나 딜레행트럭, 4륜구동 합승택시가떠나고 있으며, 바마코, 몹티,가오로도 편수는 적지만 직접갈 수가 있다.

- 젠네 : 젠네는니제르강과 그지인바니강의 사이에모래톱에 세워진도시로서, 니제르강의 수로 운반에 의해서 교역도시로 번영해왔다. 통북투가 사하라 횡단교역도시였던 반면 젠네는 남부의 사바나,열대우림으로부터 농경민의잉여 농산물따위의교역으로 번영했다. 젠네에 가면 월요 시장에 가볼만 하다.

젠네는 말리의중앙부에위치하고 있으며,몹티로부터약 130km 거리에 있고요금은 택시로 1,300CFA정도이다. 상으로부터는 약 150km이며 토요일밤과 일요일 아침에만 택시가떠나고 있고 요금은 2,000CFA 정도이다. 젠네로들어갈 때는경찰서에서 점검을 받은 후에SMERT(관광안내소)에 관광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요금은 인원수에 상관없이 1,250CFA 이다.

- 가오 : 가오는 말리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는 시로서,니제르와의 국경까지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미 7세기에는 오늘날의주민과 똑같은 송가이족의 사람들이 이 일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가오의 영광은 도시 북쪽에 있는 아스키아 왕조의 무덤과 모스크에서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다. 무덤은 거대한 사다리꼴의 피라미드 형으로지주가 멧돼지의 뿔처럼 사방으로삐죽이 나와있다. 모소크가 그 무덤을 두러싸고 있는 벽의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다.현재의 도시 중심은 항구 근처이다.

가오는 모든방향으로도로가 뚫린자로이다. 북쪽으로향하는도로인가오~아드라드는1,451km이며, 가오~키달은  342km,가오~타만라세트까지는1,000km거리이다.안송고를 경유해서동쪽으로 향하면메나카로부터 니제르의타우아로이어지는 유목민의 이동 루트가 있다.(가오~안송고95km, 가오~메나카 305km) 안송고에서 남동쪽으로내려가면 니제르의수도인 니아메로 가는 버스노선이있다.(가오~니아메 381km)남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부르키나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로향하는 도로가 있다. 남서쪽에는몹티에서 수도인 바마코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있고, 강을 따라서 배로 서부서 방향으로 향하면 통북투에 다다른다. 몹티와바마코로 향하려면 강을 건너지 않으면안되는데, 도시중심에서부터 나루터까지는약7km, 나루터에서는 프랑스어로 바크라고불리는 뗏목같은 페리가 양안을 왕복하고 있다. 트럭을실을 수 도 있는 튼튼한 배이다.


* 여행 수단 : 말리에는 각종 장거리 버스 및 합승택시가각 도시를 연결하고 있어서 북부의 사하라 사막을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이도알 수 있다. 그러나 니제르강 만곡부(특히 몹티~통북투)는 우기동안에는이동이 불가능하거나불가능 하게 된다.

버스는 회사에 따라서 발착장소가 다른 불편함이 있지만 합승택시에 비해 가격이 싸고 안전하게 이동 할 수 있다. 말리 내에서 장거리 이동을할 경우 수차례 검문소를 통과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승차시에 리스트를 만들어 검문소마다 차에서 내리는 일이없이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합승택시는 바마코의 경우만이장거리와 근거리의 승차 장이 분리되어 있고 대다수의 도시 및 시골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각방면으로 가는 차를 탈 수있다.통북투를 비롯한 사하라사막으로의 교통 수단은 4륜구동차와 트럭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매일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행동해야만 한다.

철도는 바마코~다카르 간 열차가주 2회(화,금요일) 운행되고 있으며 국내선인 바마코~카이 간은 매일 운행되고 있다.세네갈 강을통해 카이에서세네갈의 포도루까지 운항할 수 있으며 니제르강의 배는 바마코에서 상류지역인 기니아의 쿠루사까지 운항이 가능하며 8월 무렵부터1월 말 까지는 크리코로에서 가오까지의 약 1,300km를 항해할 수 있다.

말리에는 수도바마코에 있는국제공항을 비롯하여세구, 몹티, 통북투 등 10개의 공항이 있다. 말리의 항공회사로는 국영 말리 항공(AIRMALI)이 있으며 말리 국내를비롯하여 바마코, 주변국가의도시, 카사블랑카 및프랑스와의 국제선을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말리항공이 재정난으로 인해 영업을 중지했을 당시에는 정기편 없이 감비아 항공기가 반줄~통북투간을주 1회 운항 할뿐이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국내항공이 운항을 재개하였다.


* 치안 : 범죄에 관한 말리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아프리카 지역의 다른 나라에 비해 범죄는적은 편이다. 이는 갖2hr에 대한강한 결속력과 늦은 도시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범죄가 점차 증가하고있는 추세로 도시에서는강도, 소년비행, 밀수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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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는 다카르이다. 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 세네갈은 북쪽과 북동쪽으로 세네갈 강을 국경선으로 하여 모리타니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팔레메 강을 사이에  두고 말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기니비사우·기니와 국경을 접한다. 감비아가 이 나라의 남서부에서 감비아 강을 연하여 고립지역을 이룬다. 면적 196,712㎢, 인구 9,404,000(1997).


자연환경

국토는 대체로 평탄하며 구조적으로는 3대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이 나라의 서단을 차지하며 단단한 화산암의 작은 고원들로 이루어진 베르데 곶 지역이다. 2번째는 기니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푸타잘론 대산괴의 하부에 해당하는 고대 산괴의 주변부로 이루어진 남동부와 동부 지역으로, 최고봉은 해발 500m에 이른다. 3번째는 서쪽의  베르데 곶과 동쪽의 산괴 가장자리 사이에 있는 광대하고  얕은 분지지역이다. 세네갈의 대서양  연안은 모래가 많고 파도가 거세다. 살룸 강 하구 남쪽의 해안은 골짜기가 침수되어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이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홍수림 소택지가 많아진다. 대하천 유역인 세네갈 분지(세네갈 내에서 약 6만 4,000㎢의 면적을 차지하며, 말리·모리타니·기니까지  이어지는 분지)가 이 나라의 하천들을 대체로 서쪽의 대서양으로 흐르게 한다.

세네갈의 토양은 겉으로는 어디서나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충적토, 다공성의 점토, 디오르(연한  황토), 사질토 등 매우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기후는 세네갈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건조한 사막과 습윤한 열대지방 사이의 천이성  기후인 수단 기후가 나타나며, 티에와 팔레메 강 하류 골짜기를 잇는 선의 이북에서는 사헬 기후대가 나타난다. 우기는 사헬 기후대에서는 7∼10월이고 수단 기후대에서는 6∼10월이며,  연강우량은 북부에서 약 355㎜, 남부에서는 약 1,525㎜를  기록한다. 기온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4∼38℃이며, 북부에서 가장 높다. 사헬 지대의 식생은 산재하는 관목과  아카시아가 특징적이며, 베르데 곶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사바나가 울창해진다. 여러 종류의 원숭이와 영양이 혹돼지·사자·표범·하이에나·들개 들과 함께 서식한다. 하천에서는 악어·하마와 함께 여러 종류의 거북이 발견된다. 삼림이 전체면적의 약 31%를 차지하고 국토의 약 27%가 가경지이며, 약 30%는 목초지  또는 가축방목지로 이용된다. 인산염과  철광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세네갈은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에 최초로 알려진 서아프리카의 관문에 위치한 나라. 일반적으로 대가족주의이며 혈연과 우인관계를 중시한다. 국립공원 7곳을 비롯  파리 - 다카르 랠리로 유명한 수도인 다카르 노예를 실어가던 고레섬 등이 볼만한 곳이다.



국민

세네갈에는  7대  인종집단인  월로프족·세레르족·풀라니족(페울족)·투쿨로르족·디올라족·말링케족·소닌케족과 그밖의 많은 소수집단이 있다. 7대 인종집단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며, 가나·말리·송가이 등의 과거 서부 수단의 제국들이  있던 사헬과 사바나 지역들에 자리잡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도가 90% 이상으로 가장 많다.

인구의 47%가 15세 미만으로 평균연령이 낮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여전히 높으며, 전체인구의 3/5이 농촌지역에 거주한다


경제

세네갈은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독립 이후 이룩한 경제성장은 경제를 심각하게 후퇴시킬 수 있는 가뭄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중단된다. 국민총생산(GNP)의 증가율은 인구증가율과 비슷하며, 1인당 GNP는 비교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4을 차지하지만, 이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노동인구의 3/4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땅콩은 가장 중요한 환금·수출 작물로 전체경작면적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어 본질적으로 단일재배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식량작물은 기장과 수수이며, 다량의 쌀이 수입된다. 정부는 땅콩에 대한 국가경제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작물의 다양화와 목화·쌀·사탕수수 및 시장용 원예작물의 생산 확대에 힘쓰고 있다.

상업적 어업이 급성장하여 수산물  수출이 총수출고의 약 1/10을  차지한다. 인산염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광업도 확대되고 있다. 카자망스 지방의 근해에는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제조업 부문은 GDP의 거의 1/4을 차지하고 노동인구의 약 1/10을 고용하며, 프랑스어권의 서아프리카에서 코트디부아르 다음으로 가장 발달해 있다. 땅콩기름 추출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며, 섬유공업이 그 뒤를 잇는다. 그밖의 국내기업들이 청량음료·정당(精糖)·유제품·궐련·생선통조림(주로 참치) 등을  생산한다. 서비스업·상업·운송업은  GDP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수도인 다카르는  철도망의 종착역이자 서아프리카의  중요한 항구이기도 하다. 세네갈의 도로사정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계속 확충되고 있다. 관광업은 중요한  외화소득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제발전은 주로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데, 처음부터  프랑스가 원조의 대부분을 맡고 있다. 가뭄으로 인한 농산물 수출파동은  광물과 수산물의 수출로 벌어들이는 보다 높은 소득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지만, 무역적자폭은 여전히 크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나이지리아·코트디부아르·미국·일본 등이다.


정치·사회

세네갈은 사회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의회민주제도 위에 건설된 공화국이다. 198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헌법은 1963년 처음 제정된 헌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행정부의 수반은 5년을 임기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이 맡는다. 대통령은 장관들을 임명하여 각료회의를 구성하고 그 의장직을 맡으며, 국군 총사령관직을 겸한다. 이 나라의 입법기관은 12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이며, 의원들은 5년 임기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가장 중요한 정당은 세네갈 사회당으로 1958년 창당되었는데,  창당 당시에는 세네갈 진보연합으로 알려졌다. 이 당은 독립 당시부터 1980년말까지 세네갈의  대통령을 역임한 레오폴드 상고르의 지휘하에 결성되었다. 그후 헌법개정으로 정당결성에  관한 일체의 제약이 철폐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정당이 10여 개에 달했다.

1982년 세네감비아 연방이 탄생했으며, 두 가맹국인 세네갈과 감비아는 각각 주권을 유지하면서 국방·외교·통화에서 공동정책을  채택했다. 교육은 6∼12세 에  의무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전체의 약 40%에 불과하다. 중등학교에서는 국가발전에 필요한 직업교육을 실시한다. 다카르에는 종합대학교가 있다. 국민 보건 상태는 일반적으로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으며, 이 나라 전체 의사 가운데 약 70%가 다카르에  있다. 평균 기대수명은 남자 44세, 여자 47세이다.


문화

문화유산은 주로 구전되고 있으며, 일종의  음유시인인 '그리오트'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시를 낭송한다. 시인이자 전직 대통령인 레오폴드 상고르는 네그리튀드(Negritude)로 알려진 20세기의 문학운동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역사

세네갈의 주민들과 북아프리카 주민들 사이의 유대는  10세기에 확립되었고, 이어서 11세기에는 투쿨로르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투쿨로르족은 18세기까지 계속 애니미스트 집단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애니미즘은 19세기말까지도 세네갈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444년 카보베르데를 일주하고 이듬해에는 세네갈의 해안지방을 탐험했다. 1638년 프랑스인이 세네갈 강의 하구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1659년 생루이를 건설했다. 고레  섬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잇따라 점령했고, 1677년 프랑스가 자국령으로 선포했다. 노예, 아라비아 고무, 상아, 황금이 세네갈로부터 유럽인들에 의해 17, 18세기에 계속 반출되었다.

세네갈의 해안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1693∼1814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자주 바뀌었다. 1814년의 파리 조약에 의해 프랑스에 양도된 생루이와 고레 섬은 1817년 프랑스가 재점령했다. 1848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프랑스는 내륙으로 세력을 넓혀갔으며,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레옹 패데르브(1818∼89)는 투쿨로르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세네갈 식민지 제도의 기초를 수립했다. 세네갈의 도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19세기에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세네갈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고, 1902년 다카르 시는 그  수도가 되면서부터 급성장했다. 1946년 세네갈의 모든 주민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으며, 이 식민지는 프랑스의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다.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1959∼60년 말리와 연방을 결성했다. 1960년 독립공화국으로 승인되었으며, 독립운동을  지도한 상고르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상고르는 1981년  1월 대통령직을 전 국무총리 아브두 디우프에게 인계했으며, 1963년 실시된 정당활동 제한조치는 해제되었다.  디우프는 1983, 1988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에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73년 5월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세네갈  방문과 1984년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의 방한으로 양국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으며 각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세네갈의 농업연수생을 초청해 훈련시키고 여러  차례 무상원조를 제공하는 등  기술교류와 경제협력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선린우호 관계는 더욱 다져질 것이며, 민간차원에서의 경제협력도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 나라의 교역상황은  1991년 11월 기준 대한수입이 776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이 157만 달러이다.  수입품은 섬유·시멘트이며 수출품은 인산염이 주종을 이룬다. 1991년 현재 이곳에는 소수의 교민을 포함해 305명에 이르는 한국인 체류자가 있다. 한편 세네갈은 1972년 9월 북한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한 이래 한때 친북한 경향을 띠기도 했으나, 친서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리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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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서부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에 연안에 위도  북위 5도 -10도 위치하여 남쪽으로는 기니만에 접하고 있고(해안선 길이 500km)  서쪽으로는 라이베리아(580km), 기니(610km)와 동쪽으로는   가나(670km)와 북쪽으로는   말리(370km), 부르키나파소(400km)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 적> 전체 면적은322,000 KM 로 한반도의 크기의 약1.4배에 달하고 있다.


<지 형>

국토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지세가 높아지는 남저북고형  지형으로 북서부  기니와의  국경  산악지역에 코트디브와르  가장 높은 1,752M의 NIMA산이 있다.CAVALLY, SASSANDRA, BANDAMA,  KOMOE 등 4개의 강이 국토를 4등분하면서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남쪽 해안 지역의 경우 바닷물이 육지에 막혀 형성된 거대한 LAGUNE이 곳곳에 발달해 있다.남부지역은 고온 다습한 기후로 다양한 삼림으로 덮혀 있으나 북부지역은 사바나지역 특성을  나타낸다.


<토지이용실태>

코트디브와르는 전통적인 농업국으로 토지를 주로 코코아, 커피, 팜오일, 파인애플 등 농산물 생산에  이용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별  재배면적을 보면 코코아의경우 160만 헥타, 커피 130만헥타, 고무 6만 헥타, 팜오일 17만 헥타, 면화 21만헥타, 바나나 및 파인애플  2만 헥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농작물 경작지로 활용하는  면적은 전채 국토면적의  약 9%  수준이다. 이외 주요 이용실태를 보면 목축 13%, 산림 26%, 기타 52%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부존자원>광물 등 부존자원은 주로 산악지역인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최근까지알려진 주요 부존자원 매장량을 보면 금  15톤, 니켈 250백만톤, 보크사이트 650백만톤, 철 50-700백만톤, 망간 270만톤 등이다.석유의 경우 53,000평방킬로미터의  해저 유전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생산규모는일일 2만 배럴이며  가스도 일부 생산되고 있다.


<자연경관>

코트디브와르의 국토는 북서부 지역의 산악지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평지로되어  있다. 남부 지역의 경우 열대 우림기후로  인한 두터운 숲이 발달하고 있으나 북으로 올라 갈수록 기후가 건조해져 북부지역의 경우 사바나  기후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파인애플, 팜오일  등 열대 농산물 재배를  위한 대규모 농장(플란테이션)이 도처에 발달하여 있다.


<인구>

전체 인구는 15,300천명(97)으로 이중 인근국에서 유입된 인구는약 400만명(브르키나 100만명, 말리 100만명, 기네  100만명, 니제르 50만명,기타50만명)으로 보고 있다. 주요  도시별 인구를  보면 수도  아비쟌 3,200천명,  BOUAKE  590천명,MAN-DANANE 390천명, DALOA 470천명, YAMOUSSOUKRO 370천명 등이다.인구성장율은 3.8%(97)이고 인구밀도는 47명/KM2이다.  남녀비율은 51:49로 남자가 많고 연령별 인구구성은 15세 이하  48.2%, 15-49세 41.1%등으나 나타나고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 50세, 여자 52세이다.인구분포는 도시 44%, 농촌 56%로 나타나고 있다.


<종족>

BAOULE(23%), BETE(20%), SENOUFOS(14.7%), AGNI(10.7%), MALINKE(6.5%), EBRIE,GOURO, KOULANGO 등 60여  종족이 있으며 각 종족간 특별한 대립관계 없으며 대부분 유순한 편이다.


<언어>

공용어 및 상용어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족내 사용되는 60여개의 지방 방언이 있다. 인근 영어권인 가나, 라이베리아인들이 아비쟌에 많이 거주하고있어 잡일 등 필요시 영어구사 인력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종교>

종교 분포를 보면 회교 38%, 기독교 27%, 토속신앙 30% 등으로 회교  및 기독교간특별한 대립관계 없으며 비교적 융합 및 협력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국민성>

흑인 특유의 다혈질 기질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순박하고  친절하다.가족관 또는 자녀와의 관계는 동양적 사고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으며 노인을 존경하고 친척간 상호 도와주는 것이 거의  의무화되어 있어 집안에 출세한 사람이있으면 친척들을 많이 등용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반면 힘이 들거나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어 일을 수행함에 있어 추진능력 및 창의성 발휘가 부족하고 기술  또는  상술이 인근 가나, 세네갈인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고있다. 현지인의 대부분은 사무직 또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문화수준>

국가  전체적인 문화수준을 매우 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전기 보급율을 보면 주요  도시의 경우 약 60% 정도이고 시골의 경우 극히 일부 지역에만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TV 방송의 경우 국영방송(RTI) 1개사에서 2개 채널을 방송하고 있으나 수신 가능지역은 대부분이  도시 지역에   국한되고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국영방송(RADIO COTE D'IVOIRE)외 50여개의 사설 지역 방송이 있어 아직 라디오 의존도가높은  수준이다.


<보건수준>

각종 세균 및 기생충 관련 질환발생이 많은 지리적 위치 및 기후여건, 낮은 교육수준 및 보건관련 인식  부족, 낮은 소득 수준에 따른 의료시설 미비 등으로 그동안 높은 사망률(1,000명당 15.7명, 유아사망율: 1,000명당 82.4명), 50세 전후의낮은 평균수명 등 낮은  의료수준을 나타내었으나 점차 개선되고 있다. 지난 1957년에  전국적으로 150개소에 불과하였던 의료시설의   경우1980년 700개소, 1994년1,500개소 등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에이즈 예방을 위한 일회용 주사기 사용 홍보 효과 등으로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병원에서1회용 주사기를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일부 대학병원  또는 사설병원을 제외하 아직까지 전반적인 의료설비 및  진료서비스 수준이 낮은 상태이다. 현재  국가 및 사설 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국가의료보험은 공무원에 한해 수혜를 주고 있으며 사설 의료보험제도는 비용문제로 일부 사람들만이활용하고 있다.



역사

<고대>

코트디브와르의 고대 역사는 현재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구석기 시대부터 현 지역에 사람이  살았을 것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 이 지역 거주한 사람들은 여러 종족이었으나 대부분이 북아프리카로부터 내려와서 남쪽으로  이주해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세>

현 주요 종족 역사는   11세기에부터 이다. 이 시기에 BONDOUKOU 지역에 LORHO족거주하고  있었으나 이후 HAUT  VOLTA(현 부르키나파소)로부터 이 지역에 KOULANGO족이 유입하여 12세기에  BOUNA왕국을 건설하였고  동 시기에 말리로부터 SENOUFO족이 내려와 북서부지역에 KONG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16세기에 가나 지역으로부터 AKAN, ABRON 족이 내려와 BONDOUKOU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이어 비슷한 시기에 BAOULE, AGNI 등 주요 종족들이 들어와 중부, 남서부 등  지역에 정착하였다.

<근대>

17세기부터 프랑스인들이   유럽인들로는 처음으로   진출을 시작되었고 189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1904년 모리타니아, 세네갈, 기니, 말리, 니제르, 베넹, 부르키나파소 등 함께 프랑스령 서부 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였고 1934년 아비잔을경제  수도로 건설하였다.

<현대>

1960년 프랑스로   부터 독립하였다.   독립후 FELIX    HOUPHOUET BOIGNY가 현 코트디브와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89년 7선까지 당선되었으나 1993년 갑작스런 서거로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HENRY  KONAN BEDIE 가 대통령직을 승계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동향>

2000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 야당 후보자 출마 자격여부가 현재 중요정치 이슈가 되고 있다.차기 대통령 후부 자격여부가 문제가  되고 있는 인물은 현  유력 야당의 하나인공화당(RDR) 당수인 MR  ALASSANE DRAMANE  OUATTARA 로서 동인은  전 HOUPHOUETBOIGNY 대통령 시절부터 현대통령(KONAN BEDIE)과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1993년 전 HOUPHOUET BOIGNY 대통령  서거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코난 베디에가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국무총리였던 와따라는  IMF 부총재로  코트디브와르를떠났었다. 현정부는 지난해 대통령선거 관련법을 개정, 대통령 후부는 양친이  코트디브와르인이고 10년 이상 국내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문화하였다.  이와 관련  금년IMF 총재를 사임하고 공화당 당수로 취임한 와따라에 대해 현정부 및 여당에서는동인의 양친중 아버지의 국적을 코트디브와르인이 아닌 인근 부르키나파소인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공화당측은 이러한 여당 입장을 수긍하지 않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양측의 입장이 맞서고 있다.  따라서 와따라의 대통령 후보 출마자격 취득 여부가 현재 가장 큰 정치 이슈로 되고 있다.<사회동향>최근 부각되고 있는  주요 사회문제로서는 교육과 국민보건문제라 할 수 있다.

교육문제의 경우 정부에서는 높은 40%가 넘는 문맹율  퇴치 등을 위해 국립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무료로 하고 있으나 학교시설 부족, 부모들의  교육 필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초등학교  취학율이 70%에  그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2010년까지 초등학교 취학율을 80%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과 아프리카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 등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국민 보건문제의 경우 그동안  정부의 시속적인  노력으로 지난 1957년에 150개소에 불과하였던 의료시설이  1994년 1,500개소 등으로  증가하고 정부와의 계약을통한 프랑스 및 스페인의 일부 제약회사들의 저렴한 약품 공급 등 의료 서비스가크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의료시설 등  증가율은 현지의 높은 인구증가율(출생, 유입)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상당수의 일반 서민들은  비용 등 문제로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국가 전체적으로는 의료  시설 등  서비스는크게 부족한 수준이다.


<외교노선>

비동맹중립을 표방하며,외국과는 대화를 통한 협력강화 모색 친서방적이다. 프랑스와는 절대적인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미국, 일본, 중국등과도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웃 인접국과는 특별한 선린정책을추구하고 있다.주요 외교정책 추이를 보면 지난 85년 10월 HOUPHOUET-BOIGNY  대통령은 코트디부아르의 주권을 존중하는 모든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에따라86년에 소련과 국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중국과는 83년에 이미 국교관계를 수립하였음) 이후 체코, 헝가리,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이스라엘과도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인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보면 서부아프리카제국의 정치적 지도국으로서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남아공화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국제기구가입>

UN,  OAU, AFDB, CEAO, UEMOA, ENTENTE,  ECOWAS, LOME협정, OCAM 등에 가입하고있다.


<지역 협력체 참여 정도>

(서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1975년 영어권에서는 나이지리아, 불어권에서는 코트디브와르를 주축으로 16개국으로 구성 창설하였다. 역내 단일관세제도 추진,상호  교역상품 관세 철폐,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상호 산업경쟁력 강화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역내 국가들의 제조업 기반  취약, 수출상품의 유사성, 정치사회 불안등으로  큰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본부는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두었으나 '95. 7월  나이지리아 행정수도 아부자로 이전하였다.96.7.25-7.27 제19회 ECOWAS 정상회담을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개최하여 ECOWAS제2회 TRADE FAIR 개최(99.2.26-3.2 가나 수도 아크라), 역내국간 각종 경제통계집계 기능 강화등을 협의하였고 97. 3월 회원국에 대한 농업부문 차관 공여를 개시하여 운하, 호수 강등의 내륙운송수단 향상, 지역 기상청  설치, 농업개발 프로그램개발 및 교환시스템 구축 등을 추진하였다.(서부아프리카  경제통화 연합:UEMOA)코트디브와르, 베넹, 니제르, 세네갈, 브르키나파소,  모리타니아, 말리, 기니비소  등 서부아프리카 세파프랑권 8개국간 경제 협력  강화를 위한 경제 통화 연합체로서 1995.1.30일 브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정식으로 운영위원 활동 개시하여  공동통화 정책 시행, 역내국간 관세부과  철폐, 단일 관세제도 도입 등 추진 추진하고 있다.

특히  '96.1.15 제 2차 UEMOA 각료회의  개최하여 역내국 교역상품에 대한 특혜관세 실시 협의, 특혜관세율은 각종 관세의 50% 수준 등 역내국 경제통합 행동기준마련 등을 협의하였다.그리고 96.5.10-5.13일간 UEMOA 7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98년 1월까지 1차산품 및 수공예품 상호 면세제도  도입, 96년 7월부터 회원국간  공산품 관세 30 %인하,  98년 1월부터 UEMOA CUSTOMS UNION  운영 등에 합의하고 98.3월 UEMOA는 위원수를 40명(각 회원국별 5명)으로 하고 말리 수도  바마코에 본부를 두는 연합의회 위원회(CONITE  INTERPARLEMENT DE L'UEMOA)와 회원국내 분쟁 조정 화해 등 재판관련 업무수행을 위한 8명의 재판관(회원국  각  1명)으로 구성하는 UEMOA 재판소(LA COUR DE JUSTICE DE L'UEMOA) 등을 설치하였다.(아프리카 공업화연맹)96.10.21-10.24일간 아프리카 5개국 정상 및 33명의 공업장관 참가 아비쟌에서 "아프리카 공업화연맹"을 발족하였다.  동연맹은 아프리카 상호국간   공업화 추진협조를 목적으로 하고 사무국은 아비쟌 UNIDO  사무소에 설치하고 97년도 각료회의는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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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와 언어


적도의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가나는 한반도 전체 크기와 비슷하며 인구는 약2천만 가량됩니다. 한국의 도처럼 1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행정구역에100만에서 20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산지가 적은편이고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볼타호가 넓은 면적에 걸쳐있습니다.  


북부지방-이슬람문화권

중서부는 열대우림지역으로 가나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칸족의 중심지이고 농업이 주산업입니다.


가나의 공용어 - 영어, 현지언어는 100여가지로 그중 아칸어인 Twi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2) 정 치


영국으로부터 1957년에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독립을 한 나라로서 자부심이 많이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인 응크르마박사는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데 판아프리카론을 주창하여 다른 나라의 독립에 많은 영향을 키친 바 있고 현재 가나에 있는 대규모 사업인 수력발전소, Tema항 건설, 알루미늄제련소, 도로등은 다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대통령은 1970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한번 민정이양후 물러났다가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군사정권으로 있다 1992년에 다당제 선거를 통해 민선으로 당선되었으며 지난 96년 12월에 있은 두번째 선거에서 승리하여 재임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는 상황이며 과거 군사정권당시 사회주의 체제였다가 90년대 동구권의 몰락후 자본주의로 전환하여 세계은행의 도움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3) 국 민 성


가나인들은 비교적 착하고 친절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가볍게 눈이나 손짓으로인사를 건낼 수 있습니다. 가나인 스스로도 다른 아프리카 지역보다 친절하고 치안이 나아서 살기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도나 테마같은 항구도시는 여러 곳의 사람들이 모여 시골보다는 순수하지 않으며 범죄도 많아서 외국인들은 밤에는 다니지 않습니다.

가나는 한국보다 가난하지만 주5일 근무하며  한국처럼 열심히 할 것도 없고 기후상 그렇게 일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일을 해도 무리하게 일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으며 한편은 삶이 여유있어 보이고 한편은 가난합니다.



(4) 경 제


연간 일인당 국민소득이 450불로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모범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플레가 심하며 아직은 극소수는 부유한 반면 직장이 없어 쉬고 있어 일자리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중산층이 거의 없고 빈부차이가 극과극이라 부자는 땅과 집과 여러 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은 그 밑에 고용되어 아주 싼 노동댓가를 받으며 일하는 형편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농부와 어부인데 90%가 농업 및 목축업, 4%가 어업, 3%가 광업등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차산업은 잘 발달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외국기업의 현지공장입니다. 최근들어 공장에 투자가 되고 있지만 아직 외국자본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산품은 수입품입니다. 주요 수출품은 코코아, 금, 다이아몬드, 목재이고 이중 금은 옛날부터 황금해안으로 불리울 정도로 유명하며 지금도 주요 산업중의 하나입니다.




(5) 종교


개신교가 28%, 카톨릭이 19%, 회교가 16%이며 아프리카 정령숭배가 20%입니다. 기독교는 남쪽 지역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더 강합니다. 수도에서 가까운 지역은 아주 작은 마을에도 무엇으로든 만든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교회는 좀더 드문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자가 부족한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하여 평소에 누렇고 시커멓고 헤어진 옷을 입다가도 주일이 되면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교회를 갑니다. 예배시간에도 모두들 찬양하며 천천히 줄지어 나오며 춤을 춥니다.  모슬렘은 북쪽지방에 강하며 대개 부족 전체가 모슬렘이며 개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최근에 정부에서 모슬렘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올해 그들의 하지 축제가 공휴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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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포르토노보

인구 : 약 590만명

면적 : 112,620㎢(한반도의 1/2)

주요도시 : Abomey(6만명), Parakou(12천명)

주요민족 : Fon, Yoruba, Adja 등 40여 종족

주요언어 : 불어(공용어) 및 토착어

종교 : 원시종교(65%), 회교(15%), 카톨릭(15%)


   위치
베냉은 아프리카 서부의 국가이다. 베냉만에서 북쪽 내륙 지대로 약 675㎞ 파고 들어간 길고 좁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남쪽끝 대서양으로부터 북쪽 끝 나이저 강까지 뻗어 있다. 서쪽은 토고, 북서쪽은 부르키나파소, 북동쪽은 나이저강, 동쪽은 나이지리아와 접하고 있다.



지세
동서 최대 길이가 320㎞ 정도이고 남쪽 해안선 길이는 121㎞에 지나지 않는다. 면적은 112,620㎢ (한반도의 1/2)이며 인구는 1994년 현재 5,314,710 명이다. 지형적으로 남에서 북으로 크게 5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① 해안 지대는 모래가 많고 평평한 저지대로 조석(潮汐)에 따른 습지와 석호(潟湖)가 발달해 있다.

② 해안 지대 바로 북쪽에 펼쳐진 바르 지대는 홍토(紅土)로 이루어진 비옥한 고지대다. 라마 늪지대로 알려진 광대한 함몰지를 포함하고 있다.

③ 베냉 중남부에 위치한 베냉 고지대는 수정 지반 위에 점토가 쌓여 형성된 지대로, 높이가 해발 90∼230m에 이른다.

④ 북서부의 아타코라 산맥은 남쪽 토고산맥의 연장으로 최정상의 높이가 641m 이다.

⑤ 북동부에 있는 나이저 평원은 나이저강 유역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토질 사암지대이다. 베냉에서 가장 긴 우에매강은 남쪽으로 흘러 포르트노보(Porto- Novo) 석호로 흘러드는데 총길이 450㎞ 중 서 200㎞정도는 항해 가 가능하다.



기후
해안 지대는 적도기후 지역으로 기온이 22∼34℃로 거의 일정하다. 남부지역은 두번의 우기가 있고(3∼7월, 9월하순∼11월), 그 사이에 두번의 건기가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5∼9월까지 우기가 지속되며 그 나머지는 건기이다. 북부는 최고 기온이 46℃에 달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남부지방이 760∼1,270㎜이며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적어진다.

종교
베냉의 종교는 원시 토착신앙(68%), 가톨릭(14%), 신교(3%), 회교(15%)로 다양한 편이다. 가톨릭교가 맨 처음 베냉에 들어온 것은 17세기이며 본격적으로 포교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지 하면서 가톨릭교는 남부의 주민 사이에 보급되었으며 미션스쿨 등을 통해서 이 나라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현재 가톨릭 미션스쿨은 전국에 약 200여개가 있고 신자는 약 20만 정도로 특히 지식 계급 사이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언어
언어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으며 그 밖의 토속어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보아 가장 널리 쓰이는 폰어가 국어의 기능을 한다. 문맹률 은 약 80% 정도이다.



인구
인구는 1994년 기준으로 5,341,710명 정도이다. 폰(Fon)족 계통의 부족이 전체 인구의 3/5 이상을 차지하며 그 대부분은 남부지역에 거주한다. 베냉 동부에 사는 요루바족은 전체 인구의 1/10을 차지한다.

볼타어를 쓰는 솜바족과 바리바족 등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로 주로 베냉 북부에 살고 있다. 유목 또는 반유목 생활을 하는 풀라니족은 반사막지역에 거주한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현재의 추세로 보아 가장 널리 쓰이는 폰어가 국어의 기능을 한다.

전체 인구의 2/3가 아직 아프리카 토착 신앙을 믿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북부와 남동부 지역에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 교도가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15세 이하이다. 구 분포 또한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어 전국토의 1/3을 차지하는 남부지역에 전체 인구의 약 2/3가 살고 있다. 반면 북부의 일부 지역에는 풀라니 유목민들만이 살고 있다. 도시 거주 인구는 총인구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94년을 기준으로 3.3%로 아프리카 서부 국가의 평균 인구증가율을 웃돌 정도로 상당히 높아 정부는 인구증가율의 둔화 와 인구의 균형분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코토누는 베냉의 상업 및 정치활동 중심지로 유럽인이 건설한 현대화된 도시이며 수도인 포르토노보는 아프리카인이 세운 도시로 아프리카풍의 요소 와 유럽풍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민족
베냉은 전체 인구중 폰족 66%, 바리바족 10%, 요루바족 9%, 솜바족 5%, 플라니족 4%, 그 외의 토착부족이 6%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3/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폰족은 12∼13세기 무렵에 베냉 역사상 최초의 왕국을 남부에 세웠던 부족이다. 모노(Mono)강과 쿠포(Couffo)강 유역에 살고 있다. 요루바족은 베냉 동부지역에 살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10을 차지한다. 볼타어 쓰는 솜바족과 바리바족 등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로 주로 베냉 북부에 살고 있으며, 유목 또는 반유목 생활을 하는 풀라니족은 반사막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역사
베냉 북부에 사는 부족들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남부의 다호메족, 그리고 폰족은 1625년에 아보메 왕국을 세웠다. 아보메 왕국 최초의 강력한 지배자인 웨그바자(1645∼1685 경)는 이웃에 있는 약소국의 왕 당(Dan)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당 왕의 시체는 당시 웨그바자가 건설 중이던 궁전 주춧돌 위에 버려졌고, 그 이후 이곳은 다호메(Dahomey : '당의 배 위'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다. 웨그바자의 아들인 아가자 왕(1708∼1732)은 마침내 알라다와 우이다를 정복했는데, 그곳에는 17세기에 인도 회사(Compagine des Indes)가 세운 프랑스 요새들이 있었다.

다호메 왕국은 개조왕 재임 기간(1818∼1858)에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노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과 수차례 전쟁을 치렀다. 1857년 프랑스는 그랑포포에 진주했다. 1878년 다호메의 베한진은 코토누(Cotonou)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것을 거부 1892∼94년까지 계속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베한진은 1894년 1월 프랑스에 항복했고, 다호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904년 다호메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에 통합되 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호메 주둔 프랑스군은 독일령인 토골란드 정복에 참여하였고 1914년에 마침내 토골란드를 정복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다호메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로서 연합국의 대의를 따랐다. 1959년 다호메는 프랑스 공동체의 한 자치국이 되었다. 1960년 8월 1일 프랑스에서 독립하였고 같은 해에 새 헌법을 채택했다. 5차례의 군사 정권 수립 및 2차례의 헌정변화를 포함하여 총 11번의 정권 교체를 거친 끝에 1972년 마티외 케레쿠(Mathieu Kerekou) 소령이 정권을 잡고 74년 11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1975년 12월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막스주의를 표방하는 베냉인민혁명당(PRPB)을 결성하고 국가명을 다호메에서 베냉 인민공화국(Peoplee's Republic of Benin)으로 변경 였다. 1980년 2월 의회는 케레크 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정에 이양하였다. 이후 1989년 6월 의회선거에서도 PRPB 추천 후보 전원이 당선되었고 의회는 8월 케레크 대통령을 3선으로 선출하였다.

베냉은 1974∼1989년까지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고수하였으나 경제적인 문제가 극심하고 또, 1989년 동유럽 민주화 추세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 2월 각계 대표가 참가하는 국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헌법 개정을 결정하였으며 소글로를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12월 국민투표에서 국명을 베냉공화국(Republic of Benin)으로 개칭하고 복수정당제, 3권 분립을 포함한 신헌법안이 승인되었다. 1991년 2월 복수정당제 도입후 처음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소글로가 결선 투표에서 케레크 대통령에게 승리하여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소글로 대통령은 7월 신내각을 발족시킴과 동시에 수상제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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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상징

1. 국기(國旗)
니제르의 국기는 수평으로 3등분화 되어진 등(橙),  백, 녹의 3색기(중앙부에 환인<丸印>)로 등은 사하라 사막, 백은  사헬지역, 녹은 니제르천유역을 상징하며 국기의 중앙부에 있는 등색의 환인은 태양을 의미한다.

2. 국장(國章)
국장은 방패와 방패의 양측에 있는 국기로부터  구성되어져 있어 방패의 가운데에는 금색의 광선을 발하는 태양이 그려져  태양의 왼쪽 상단에는 2개의 검과 창이, 또 오른쪽 상단에는 속(粟)의 수선(穗先) 3개가 각각 그려져 있다. 또 태양 하단에는 물소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방패의 양측에는 니제르의 국가가 2기(旗)씩 장식되어 있다.  또한 검과 창은 역사와 문화를, 속의 수선은 농업을, 물소의  머리는 목축을 의미한다.

3. 국명
니제르 공화국(Republic of Niger)

4. 수도
니아메(Niamey )로 인구는 약 40만 명이다


인구/인종/민족

1. 인구
1994년 총인구는 약 890만 명이며 1㎢ 당  평균 인구밀도는 6.8명이다. 인구증가율은 유아사망률이 높음에도 불과하고 약 2.8%(80∼84)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인구구성은 연령별로 피라미드형으로 20세 이하가 국민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니제르 북부는 기복(起伏)이 많은 사막지대(사하라 사막)에 있어서 전인구의 90% 가까이가 남부  일대에 집중해서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북부지방에는 유목민이  살고, 또 남부지역에는 정착 농민과 풀족 등의 반농반목민이 많이 살고 있다.

2. 인종 및 종족
인구의 50.4%를  하우사족, 제르마  및  송가이족 23.0%,  투아레그족 10.6%, 풀라니 족 2.6%을 차지하고 있다. 하우사족, 제르마족 등은 주로 남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풀라니 족, 투아  레족은  유목 또는 목축민족으로 북부에 주로 거주한다.

Haoussa족은 전인구의 반수 가까이를 포함하는, 이  나라에서 최고 유력한 종족이며 니제르의 중앙부에서  남부에 걸쳐 많이 살고  있다. 이 종족에 부속하는 부족은 대부분 7개  정도 있지만 많으나 적으나 흑인과 베르베르, 풀, 또는  아랍 족과의 혼혈이다. 또 이  나라의 상인에는 이 종족 출신자가 많다. Songhai-Djerma족은 그 수가  약 100만 명으로 추정 되고 니제르의 서부에 많이 산다. 그들의 선조는 그 옛날 2회에 걸쳐 번영을 자랑한 선가이 왕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우사족도 같은 정주(定住) 농경민이다.

Peul족은 서아프리카에서 상당히 광범위 한 지역에  걸쳐서 살고 있는 종족으로 니제르에는 약 60만인이 살고 있다고  추정된다. 정착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도 있지만 그들 다수는 남부 사헬지방에 살고 유목민으로 소를 재산의 상징으로 여겨 소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Touareg족은 그 수 약 50만인으로 북부지방에 많이 살며 옛날에는 용맹한 전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Kanury족은 남동부에서  차드호에 걸쳐 많이 살고 있는  농경민이며, 그 수는  약 33만인이라  추정되고 있다. Toubou족은 차드국경을 따라, 또한 북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이다.


니제르의 하우자(Hausa)족

인구 : 3,781,870명 (1991년) -니제르의 가장 큰 종족집단 이다.
언어 : 하우자 어를 주로 사용한다. 하우자 어는 사하라 남부지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이다. 이 하우자아에는 소코노와 카노의 두 가지 방언이 있다.  
위치 :  하우자족은 니제르의  남부지방에 두루 분포한다.  이곳은 나이제리아와의 접경 지대이다. 단, 극서(極西)지방에는 분포하지 않는다.
경제 : 이들의  전통적인 직업은 농업이고  현재도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상업, 노동, 가축 도살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의 농업생산물은 땅콩, 면, 쌀, 기장, 동부  등이다. 이들은 주변의 모든 종족뿐만  아니라 북부와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종족들을 주요 교역 대상으로 삼고 있다.
종교: 하우자족의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이슬람은 16세기에 이 종족에 들어왔는데 19세기 초에  이미 대부분의 하우자인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무슬림 외에는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

니제르의 마오리(Maouri)족
인구 : 350,000명 (1992년 ; 니제르의 다수종족으로서 전체 인구의 약50%을 차지한다.
언어 : 하우자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니제르의 남서부 지방에 주로 거주한다.
경제 : 농업이 이들의 주업으로 기장을 주로 재배하고 동부도 많이 경작한다. 여성들은 밤바라 땅콩을 재배한다. 건기 동안에는 소규모의 상업활동으로 부수적인 수입을 얻는다. 다른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이나 도시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푸주간의 도살자로 일한다.
종교 : 무슬림이 95%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 혼합주의 적인 보리(Bori)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인구는 0.2% 정도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이슬람의 절기들을 지키고 있다. 때로 이들은 보리(Bori)축제를 열기도 한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이 종족을 더 폭 넓게 이슬람화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하고 있다.

니제르의 송하이(Songhay)족
인구 : 1,506,580명 (1990년)
언어 : 동부 송하이어(자르마 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서부 니제르에 거주하는데 주로 니제르강을 따라 살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소규모의 도시나 마을들에 살고 있다.
경제 : 전통적으로 송하이 인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해 왔고 현재는 상인과 정치인으로서도 많이 일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농업 생산품은 기장이며 주요 교역대상은 주변 종족인 하우자, 풀라니, 투아레그족이다.
종교 : 이슬람과 애니미즘이 이들의 주요 종교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슬림 절기를 지키며 애니미즘의 영향을 받은 축제들도 행한다.

니제르의 제르마(Zerma)족
인구 : 2,000,000명
언어 : 제르마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니제르 남서부의 건조한 지역에 살고 있다. 이곳은 니제르강과 그 지류에 의한 퇴적층을 따라 형성된 곳으로 니제르의 수도인 니아미를 중심으로 티라 베리, 도소 등의 소도시와 여러 마을이 속하여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 송하이족과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덴디족과 접해있다.
경제 : 이들은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니제르강의 수자원을 끌어다 농사에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소, 염소, 양을 기르기도 한다. 그중의 일부는 뛰어난 장인들로서 주변 도시와 마을에 알려져 있다.
종교 : 이들의 75%가 수니  파 무슬림으로서 종족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25%에 이른다. 제르마족은아프리카 서부의 다른 종족들에 비해 이슬람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명목상의 무슬림들은 여러 가지의 전통적인 무슬림 전통을 따르지만 전통적 애니미즘의 영향을 받은 마술이나 심령술 등의 일들도 곧잘 행하고 있다.


역사

2-1. 이슬람 왕국과 니제르
녹색 숲이 우거지고, 그 녹색을 비취는 물이  있었다고 하는 사하라가 사막화를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리스인의 역사가 헤로토토스의 기록에는 이미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막화로 생활의 장을 잃어버린 농업과 어업을 경영하던  주민은 그 때부 터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것에 따라  목축업자들도 남쪽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인기가 없어진 사하라는 유목민의 세계가 되었다. 서 사하라에서는 몰인이, 중앙의 대지에는 파랑 포(布)로  얼굴을 감싼 투아렉족이 남겨졌다.
건조의 기후에 강한 투아렉족이 낙타를 교통기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 기원후의   이지만 그들은 낙타를 이집트에서  옮겨 받아 들였다. 낙타에 의한 교통기관은 4세기에 성대해져 돈과 소금과의 교역이 지중해 세계와의 관계를 강하게 하고, 그 교류에서  7세기 이슬람의 발생에 따라 사하라 주변 민족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손가이왕국과 말리 제국이라는 대국가가 형성되어졌다.
이슬람 왕국의 최성기(最盛期)는 16세기의 손가이왕국에서  그 전설적인 왕 에스키아 무하맷드의 시대에는  차드 호반(湖畔)의 볼느왕국과의 사이에서 현재의 니제르는 이등분 되었다. 18세기가 되면서 현재의 나이지리 아에 포함되는 소유트를 수도로 하는 풀 왕국이  영화를 누렸다. 그 때부터 유럽을 확대하는 세력은  문고 파크와 크랏파트  등의 탐험가를 첨병(尖兵)으로 해서 영토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멀지 않아 평정작전이 전개되어 소유트의 함락을 최후로  아프리카인의 왕국은 자취를 감췄다. 식민지화 시대의 개막이었다. 니제르도  프랑스세력의 진입으로 식민지화 되었다.

2-2. 프랑스의 식민지
1911년 프랑스는 니제르를 프랑스 영서아프리카 총독의 통치하에 두었다. 프랑스는 단기간의 군정 후 민정에 옮겨 21년에  새로운 니제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22년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었으며 26년에 진델이 최초의 수도가 되고, 다음으로 니아메로 옮겨졌다.  이 사이에 니제르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해  프랑스군의 약체화를 틈타 아일지구의 투아렉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17년 진압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니제르에  최초의 지역의회가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해외영토로서의   위가 확정된 니제르에서는 프랑스 국회에 2명의 대의사를 선출했다. 또 프랑스 연합의회  및 프랑스 영서아프리카 대평의회에도 니제르는 각각 2명의 대표를 보냈다. 56년에는 프랑스 해외 영토에 대한 기본법이 제정되어 프랑스의 해외영토는 광범위자치권을 얻었다. 니제르에도 다른 해외영토와 같이  12명의 각료로부터 이루어진 자치정부가  조직되어 직접선거에  의한 지역의회가  성립했다.  58년 12월 18일, 프랑스 공동체의 틀 속에 있어서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여 하마니 디오리가 임시 정부수석에 선임되었다.

2-3. 프랑스에서의 독립
1960년 프랑스 공동체 구성국의 지위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공동체 구성국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니제르는 프랑스 공동체에서 떨어져 60년 8월 3일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디오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디오리  대통령은 65년 재선,  70년에 3선 되어 장기정권을 유지했으나 74년 4월 15일 참모총장  쿤채 중좌의 쿠데타에 의해 쓰러져 14년간의 치정(治政)에 종지부를 찍었다.

2-4. 쿤체 의장의 정치
쿤체는 쿠데타 후 전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최고군사평의회를 설립하여 스스로 의장으로 취임했다. 동시에 헌법의 정지, 의회  및 정당의 해산을 강행하여 잠정군사정부를 발족시켰다. 농업국가인  니제르는 한발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쉬우며 식량문제, 그리고  부수(付隨)한 민족적 감정이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기  쉬우므로 국가원수가 된  쿤체는 군사력을 키우는 한편, 국민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① 식량을  중심으로 하는 기초적 생활물자의 가격통제, ② 최저임금 베이스  개정의 조치를 하는 것과 동시에 군을 이용한 한발지역 구조활동을 강화했다. 그 후로 쿠데타 미수 등이 계속되었지만 우란 개발의 진전에  따른 경제성장의 지원을 받아 쿤체 정권은 기반을 강화했다.

1980년 3월에는 발전사회확립위원회를 설치하여 전 사회계층의 효과적 참가를 재촉하기 위해 최고군사평의회를 정점으로 한 촌락 레벨에 이르기까지 조직화를 계획했다. 니제르는 군사정권이기는  하나, 다른 아프리카제국의 군사정권과는 성격이 다르며 쿤체  정권에 있어서 입법의회의 부활이 최대의 지향점이었다. 1983년에는 개발국민 평의회(CND)가 발족하여 국가헌장 책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84년의 한발에 의해 식량 농업대책이 최우선시되어 입헌의회 부활 움직임은 일시 중단되었다.

2-5. 민정이관(民政移管)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1월 쿤체 의장은 병사하고 국군 참모장 알리 세이브가 최고군사위원회에 의해 동의장, 국가원수에 임명되었다. 세이브는 니제르 최초의 여성 각료등용(登用) 등  대폭적인 내각개편, 조직편성을 실시하는 한편 정치범을 사면했다. 또  촌(村), 구(區), 현(縣)에서의 의회선거실시, 헌법제정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는  한편, 헌법 복귀후도 문 군에 의한 조각(組閣)을 표명했다. 89년 9월 신헌법 국민투표 결과 신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제가   고 같은  해 12월에 최초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9.6%의 지지율로 세이브가 대통령에 취임, 민정이관이 완료되었다.

2-6. 최근의 정세
세이브는 90년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10여개의 정당을 합법화하였다. 92년 12월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독립이래 최초의 복수정당제 선거실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3년  2월 총선에서는 6개 정당연합체인 변화세력동맹(AFC)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집권당이던 사회개발국민 운동(MNSD)은 야당으로 천락하였으며 3월 대통령선거에서는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우스마네가 당선되었다.

1994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연합이 우스마네 대통령이 주도하는 집권연합세력에 승리하여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이 계속  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6년 1월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한 이브라 힘 바레  마이나사라 중령은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마이나사라는 같은 해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1996년 총선에서도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독립동맹(UNIRD)과 친 여정당의 승리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국토와 지리

1. 위치
니제르 북쪽은 알제리 및 리비아, 동쪽은 차드, 남쪽은 나이지리아 및 베냉과 각각 국경을 접하는 내륙국이다. 동경 0도에서 16도, 북위 11.5도에서 23.5도 사이에 위치하여 서단(西端)은  북회귀선이 둘러쌓고 있다.

2. 면적
면적은 126만 7,000㎢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또는 반사막지대이다. 거의 중심부에 아일 산지(山地)가 있어(최고봉 Greboun산은 2,000m 이상) 이것에 대치하여 북동부에는 자드 대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아일 산지에서 자드 대지에 걸쳐진 북동부 지역일대와  아일 산지의 서부지역은 사하라 사막의 일부를 제외하고 기복(起伏)이 많은 황량한 사구지대(砂丘地帶)가 계속된다. 또 동부지대는 스텝지대로  유목민과 가축의 무리가 산재(散在)한다. 남부지역   사바나 지대로 남동부의 차드호에서 니아메에 걸쳐 비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나라의 곡창 지대라 불리어 주민의 다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서부를 흐르고 있는 니제르강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나일강, 사일 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을 있어 말리에서  남쪽의 베냉 국경을 따라 나이지리아로 흘러 들어간다. 덧붙여서 말하면 이 나라의 국명은 남쪽의 인접 국 나이지리아와 같이, 이  니제르강에 의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3. 기후
기후는 지역적으로 두개로 구별할 수 있다. 즉,  차드 국경의 Nguighi에서 Tanout, Tahoua를 통해  말리 국경에 달하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그 이북(以北)과 이남(以南)의 사헬기후로 구분할 수가 있다. 북부지역은 연간 강우량이 상당히 적으며 100㎜에도 달하지 않는 건조한 기후이다.

연평균 온도는 장소에 따라서도 약간 틀리지만 최저  18℃, 최고 36℃ 정도이다. 이것을 월별로 보면 1월∼2월 최고기온이 낮으며 7∼8℃까지 내려가는 일도 있지만 5월∼6월경이 되면 기온도 높아져 45℃까지 달한다. 또 일반적으로 이  나라 기후의 특색으로서 낮과  밤과의 기온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들 수가 있다. 남부의 사헬기후가 되면 우량(雨量)도 많아지며(연간 강우량 300㎜∼800㎜) 습도도 비교적 높다. 계절적으로 보면 10월에   6월까지가  건기에 들어가고 7월에서  9월은 우기로, 특히 8월은 우량이 최고 많다. 또 11월에서 2월, 3월에  걸쳐서 1년 중 최고로 지내기 편한 계절로 일중 온도가 30℃ 전후,  밤은 15℃ 가까이까지 내려간다. 이 시기는 또 사하라 사막 방면에서 몰려오는 하마탄이라는 사진(砂塵)을 포함한 계절풍이  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4월∼5월은 기온도 올라가고 일음(日陰)에서도 가끔  40℃ 이상이 된다.



경제

1. 개요
니제르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1인당 국민소득이 매우 낮다. 또한 국민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농업생산으로 충당되며 목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1994년 국내총생산은 46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50  달러였다. 1995년 강우량부족과  메뚜기떼, 기타 육식동물의 습격으로 곡물이 부족해져 인구의 1/4인 최소 200만 명이 기아에 직면해 있다. 농업은 쌀,  솔감 등의 생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형태이며 목축은 유목형태로 역시 기상조건에 좌우되기 쉬운 상황이다. UN 및 식량농업기구(FAO)는 1990년 12월 식량위기에  있다고 해서 각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우라늄은 매장량은  20만 톤, 관련산업 종사자까지 포함한 노동력의 20%가  종사하고 있는 니제르의  경제성장 견인차적인 역할을 해왔다. 1965년에 발견돼 71년부터 생산에  들어갔으나 최근 국제적인 우라늄가격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다. 세계은행, IMF의 지원을 받아 섹터조정을 포함한 구조조정계획(1989∼ 91년)을 실시하여 공무원 급여동결, 공기업의 정리,  보조금 삭감 등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과 동시에 이에 이어 1990∼92년 제 2차 구조조정 계획정책을 입안하여 공기업의 재건, 관세제도의  개혁, 무역수속의 합리화, 수입의 자유화, 은행제도의 강화, 징세기능의  강화 등을 추진하였다.

2. 재정
정부의 재정은 중앙정부의 재정, 사회보장기금(CNSS),  석유가격 안정기금(CSPPN), 지방재정, 공기업 등에서 성립하고  있다. 1988년의 중앙정부의 재정규모는 세입이  677억 4,900만 CFA프랑,  증여(贈與) 284억 CFA프랑, 세출 1,351억 CFA 프랑으로 차감 389억 5,100만 CFA프랑의 적자로 되어 있다. 세입은 세수(세입의 77.8%), 세외수입(세입의 18.5%), 그 밖의 수입(세입   3.7%)에서 성립하고 있다.  증여의 구성은 무상자금(증여의 96.5%)으로 그 밖의 증여(증여 3.5%)이다. 증여는 주로 투자예산의 재원으로 사용된다. 반면 세출은 경상지출(세출의 59.1%), 투자지출(세출의 39.8%), 그 밖의 지출(세출의 1.1%)에서 성립하고 있다.

3. 통화 및 환율
통화단위는 CFA프랑(1 CFA 파랑 = 100 Centimes)이며, 환율로는 CFA프랑은 프랑스 프랑과는 1 CFA프랑 = 0.02 F 프랑으로  고정되어 있다. 1달러당 515 CFA프랑 (96년 6월)이다.

산업

1. 농업
우라늄개발를 중심으로 한 광업부문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니제르 경제에 있어서 또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민의 90%가 농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만성적인  식량부족국가로 근래 95년에는 강우량이 부족하고  메뚜기 육식동물 등의  습격으로 곡물이 부족해져 인구의 1/4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쌀은 약 90%가 관개경지에 의해 생산되고 있으며 남부 사바나 지역에서  자급용 잡곡과 수출용 땅콩, 목화 등이 재배되고 있다.

2. 목축업
니제르는 국토의 약 60%가 휴경지, 목장이며  낙농은 옛날부터 우라늄에 이은 외화확보원으로 니제르 중요 산업의  하나이다. 목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북부 사막지대에서 유목을 통해 사육된다.

3. 광업
니제르의 광업은 우라늄이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 철광석, 텅스텐 등이 생산되고 있다. 광업부문은 1988년에서  GDP의 6.7%, 수출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우라늄은  70년대부터 생산 및  수출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세계 5위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우라늄 생산은 니제르 정부와 프랑스의 합작회사에 의해 개발되고 있으며 관련산업을 합하면 노동력의 20%을 차지하지만 최근 국제적인 우라늄가격의 하락으로 주춤하고 있다.

4. 제조업
대부분의 서부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제조업은  GDP의 5%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미미한  실정에 있다. 땅콩가공을  비롯하여 국내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음료, 야채, 농기구 제조업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송비 절감을 위한 수입대체 산업육성에 치중하고 있다.

5. 에너지
니제르는 전력을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지만 발전량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80년대 초반까지 국내수요 전력의  약 50%를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였으나 1983년 12월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쿠데타 이후 안정적 전기공급에 위협을 받자 니제르는 Goudel에 약 86억 규모의 화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했다. 한편 IDA는 니제르의 에너지 개발을 위해 790만 달러를 원조한 바 있으나 생산성이 낮아 중단된  상태이며 니제르의 원유생산은 현재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유류(油類)  소비량의 대부분도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정치

1. 국가원수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대통령이 국가원수 이다. 현재의 대통령은  이브라 힘  바레 마이나사라(Ibrahim   Bare Mainasara)로 1996년 7월에 당선되었다. 마이나사라는 96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켜 우스마네 대통령을 축출하고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였는데, 7월 대통령선거에서 석방된 우스마네와의 대결에서 당선되었다.

2. 입법부
의회는 83석의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의원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3. 정당
1996년 11월 총선에서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동맹(UNIRD)과 친여 정당들이 다수당으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밖에 사회발전국민운동(MNSD)와 반혁세력동맹(AFC)  등이 주요정당이다.

4. 최근의 정세
세이브는 90년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10여 개의  정당을 합법화하였다. 92년 12월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독립이래 최초의 복수정당제 선거실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3년  2월 총선에서는 6 정당연합체인 변화세력동맹(AFC)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집권당이던 사회개발국민 운동(MNSD)은 야당으로 천락하였으며 3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우스마네가 당선되었다.  1994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연합이 우스마   대통령이 주도하는 집권연합세력에 승리하여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96년 1월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한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중령은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마이나사라는 같은 해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1996년  총선에서도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독립동맹(UNIRD)과  친여정당의 승리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외교

1. 외교정책
비동맹 중립외교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구 종주국(舊宗主國)인 프랑스와는 경제, 군사 등 전분야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쪽의 리비아, 차드 침공에  항의하여 1981년에 단교했으나  1983년 복교, 1990년 12월에는 치안사법협정에 조인(調印)했다. 남쪽의 나이지리아와는 1991년 2월에 최초의 합동각료회의를 열어 국경관리문제와 경제협력을 이야기했으며 이슬람제국회의기구(OIC)에 참가하고 있다.  1996년 1월 군사쿠데타로 프랑스와 캐나다 및 독일은 니제르에 대한 원조중단을 선언하였다. 92년 6월에는 대만고립화를 위해  접근한 중국과 수교하자 대만이 그 보복으로 단교하였다. 니제르는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방제국과의 관계긴밀화에도 노력하고, 또  아프리카  일기구(OAU),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CEAO), 서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통화동맹(UMOA), 니제르강 개발기구(CFN), 사헬 제국 한발대책위원회(CILSS)  등의 지역기구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2.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등거리외교노선을  표방하면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으며 1986년 9월  쿤체 대통령의 방북 이후 한때 친북입장으로 전환했으나  1988년 외상방한과 서울올림픽 참가 이후   거리외교로 복귀했다. 1989년 공관철수조치 이후 일시적으로 소원한 태도를 표시한 바 있으나 한국의  노력으로 태도를 완화하였다. 1993년 4월에 집권한 Ousmane 대통령은 산적한 경제난 해소를 위한 실용주의노선 추구로 서방의 원조를 모색중이며  한국에도 무상원조 등 경제협력을 희망하고 친한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3. 북한과의 관계
북한은 1974년 9월에 니제르와 수교한 이래  1983년 2월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1986년에는 쿤체 대통령의 방북 등을 통해 친북노선을 추구했다. 1990년 이래의 민주화 및 북한의  공관철수(91.3)로 관계가 급격히 소원해졌으며 양국간의 협력관계가 전무한 실정에 있다.

4. 국별 외교관계
4-1. 미국 및 서방측과의 관계
구 종주국인 프랑스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니제르는 지나친 대불의 의존도에서 탈피하기 위해 다변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며 미국, 서독, 벨기에, 일본, 캐나다 등의 원조를 통한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는 1984년 3월에 COOK 미 국방차관보 및 1985년 3월의 Bush 부통령의 니제르 방문 이후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1996년 1월 군사쿠데타로 프랑스와 캐나다, 독일은 니제르에 대한 원조중단을 선언했으나 정권안정화 이후 해제되었다.

4-2. 대공산권 관계
니제르는 비동맹 중립 등거리외교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 쿠바, 중국 등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2년 6월에 대만과의 수교로 중국은 7월 단교했으나 1996년  6월 대만고립화를 위해  접근한 중국과 수교하자 대만이 그 보복으로 8월에  단교하였다. 실질적인 협력관계가 쟁쟁한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4-3. 대아프리카 관계
니제르는 나미비아의 독립과 남아 공화국의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OAU를 비롯 아프리카의 역내기구, 특히 Conseilde l'Entente CEAO 등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OAU의 단결노력   적극적으로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이티오피아∼소말리아 분쟁과 챠드내전 등에서  중립정책을 고수(固守)하였으며 선린관계(善隣關係)의 유지를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다.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사하라 이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서부 사하라 문제와 관련하여 1986년 제 41차  유엔 총회에서도 계속해서  알제리측의 입장을 지지해 오고 있다. 세이브 대통령은 집권 후 1988년 초 코트디부아르, 토고, 베냉, 부르  나파소, 나이지리아 등 인접한  우방국을 순방하고 기존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켰다.

5. 국제기구 가맹
UN, 아프리카통일기구, OCAM 협상회의 가맹국이고  유럽공동체의 로메 협정국이다.

생활
  
1. 의료
니제르의 의료수준은 매우 낮다. 의사와 간호사도 매우 부족하고 병원도 도시에 한정되어 있다. UN의 원조로 전염병과   토병  등에 대한 대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니아메에는 다음 두 곳의 병원밖에 없다.□ H pital National de Niamey (국립종합병원) :  침대 수 700대(단 대부분이 만원) 정도이며 의사 수는 30명이다.(니제르인,  한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등)

□ Clinique de Gamkale : 민간의원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협력으로 운영하고 있다. 의사 수는 2명, 조산부 1명이며 침대 수는 22개, 내과, 외과, 산부인과가 있다. 이들 병원은 어느쪽이든 설비가 불완전하며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하므로 중병, 중상의 환자는 파리 등의 병원에 수송하게 되어 있다. 니아메 체류 외국인은 위 두 곳의 병원 중에서  청결한 점으로는 Clinique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또 현지에서 출산하는 외국인은 적다.

2. 니제르에 있어서 교통수단으로는 도로교통이 대부분이다. 나이저강의 국내 수로를 이용하기도 하나 10∼3월 사이에만 운행이 가능하다. 항공교통은 비교적 잘 발달된 편이어서 니아메∼아가데스∼아리트 사이의 로(空路)가 개설되어 있고 국제공항 및 지방공항이 많은 편이다. 니제르에서 철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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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개요 - 일반적 현황

  면 적 : 1,102,000 ㎢
  지 형 :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북위 22  와 32  사이에 위치하며, 총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5배 정도인 1,002천㎢로 남북간 최장거리는 1,024 ㎞이고, 동서간 최장 거리는 1,240㎞이다. 북쪽은 지중해, 동쪽은 홍해에 면하고, 북동부는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룬다.
  자연환경 : 나일강이 남북으로 관류, 하구에 넓은 삼각주를 이루고 지중해로 흘러든다. 건조기후로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이다. 주민은 나일강유역 및 삼각주지대, 수에즈운하 연안지대에 집중해 있으며, 대부분이 고대 이집트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콥트인이다.
  인 구 : 64,824,466 명 (1997.7월 기준)
  연령구조 :  0~14세 - 36% (남자 12,080,281. 여자 11,556,970명)
              15~64세 - 60% (남자 19,616,790. 여자 19,228,163명)
              65세 이상 - 4%  (남자  1,050,540.  여자  1,291,722명)
  주요도시 : 카이로 (수도), 알렉산드리아, 룩소
  종 교 : 이슬람(94% - 수니파), 콥트교, 기독교 (6%)
          실제로는 기독교 숫자가 10% 이상이다.- 콥틱, 카톨릭, 복음주의등. 다른 이슬람제국과  다르게 종교상의 계율 수호 방법은 관대하고 유럽 생활양식의 영향이 강하고, 종교상의 완고성은 특별히 느낄수 없다. 라마단 시기를 포함해 외국인의 알코올, 돼지고기 등의음식은 자유이다.
  언  어 : 아랍어, 영어, 불어
  기 후 :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기후.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서 기후이다. 사막성 기후로 연중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지역도 연중 강수량이 800㎜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80           ㎜ 이하이다. 하절기에는 내륙지방의 기온이 38。C~43。C로 매우 더운편이고, 지중해연안 지방은 최고 기온이 32。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비' 를 뜻하는 말이 아예 없을 정도로 대체로 건조한 편이다.
  시 차 : 우리나라보다 7시간 늦다. 근처의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체제 = 공화제
  의회형태 = 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
  자원 = 석유, 천연가스
  공식 이름 = 이집트 아랍공화국
  산업 = 산업은 농업 중심이었으나 공업, 수송, 통신의 투자액이 증대하고 있고, 석유 산출국으로서 석유화학공업 등의 신장과 풍부한 천연자원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목화, 옥수수, 사탕수수, 곡물 등이 있고, 이들을 산출하는 관개농업이 경제의 기본을 이룬다. 교통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에즈운하를 비롯하여, 나일강 연안과 삼각주지대에 운하, 철도,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카이로 주변의 가자와 시카라의 피라미드군, 록소르의 테베유적과 각종 신전 등이 나일강 주변에 산재해 있어 관광 수입이 국외 근로자의 송금과 석유수출 다음으로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우리와의 관계 = 우리나라와는 61년 12월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과는 63년 수교하였다.


☆주요도시 카이로
  - 도시 개요 :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남단부터 10 수㎞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 아랍 공화국의 수도이다. 카이로는 주변에 고대도시 멤피스, 헬리오 폴리스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집트에서는 비교적 신도시이다. 마을의 발생은 7세기에 아랍의 장군이 모스크(회교사원)를 세워 마을을 만든 이래, 차츰 큰 마을로 발전해 갔다. 몇 차례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면서, 도시는 북쪽으로 확대해 갔다. 10세기에 파티마조가 신도시를 건립, 카이로(아라비아어로 멜카헤라: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 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12~13세기에 아이유브조 시대에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 13~16세기의 마믈루크조 시대에는 최고 성수기를 맞았다. 현재 시내에 남은 역사적 건조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프.영 점령시대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다. 카이로 시가는 구시가, 19세기 중엽 이후의 신시가, 제 2차대전 이후의 교외 주택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에는 후스타트의 서쪽에 수많은 모스크가 서있고, 신시가는 타아리루 광장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도로가 되어있고, 루쿠문의 근처에는 정부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2] 역사와 문화, 종교 그리고 경제..

@역사와 문화

♧ 그리스 & 로마 치하의 이집트

# 마케도니아의 이집트 점령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32~30년경)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 - 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그리스까지 이름이 나있던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 아문 신전을 방문하여 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을 따라 친누이와 결혼을 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통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초기 160년 동안이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였고,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 로마(기원전30년 - 기원후 395년경)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395~641년)
  야심차고 보기 드물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게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들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 문학이 이집트에서 발전한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는 616년 페르시아에 합병된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정복된 후, 1805년 모하메드 알리가 새 왕조를 세운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영국에 무력 점령당하였으며,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22년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으며, 1836년 영구-이집트 동맹의 체결로 영국군은 수에즈운하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나세르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가 성공, 1953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 및 아랍 통일을 두 기둥으로 삼아 농지개혁에 따라 소유지를 제한하고,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2차 중동전쟁을 벌이는 등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과 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 시나이 반도의 가자지구를 상실하였다. 1970년 나세르의 사망 직후, 부통령 사다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979년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1981년 이슬람교 과격파와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국민투표에 의해 무바라크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계승한 무바라크 정권은 1982년 이스라엘로부터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고, 1987년 무바라크는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에 재선되어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 1989년 아랍석유수출기구에 복귀하고, 레바논과의 재수교와 리비아와의 국경봉쇄 해제를 실시하였다. 1989년 시리아와도 국교를 재개하고, 이라크. 북예멘. 요르단 등과 새로운 경제공동체인 아랍 협력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페르시아만 전쟁 때는 반(反)이라크 아랍군을 주도하였으며,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및 시리아와 집단 안보체제 형성을 추진하였다. 1991년 GCC 이집트 경제부흥을 위해 100~150억 달러 규모의 원조기금 창설을 결정하였다.


♤ 피라미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경에 만들어졌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기원전 2690년 제 4왕조의 2대왕인 키오프스(cheops)의 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명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라고 불리운다. 높이 147m, 밑변 230m, 경사각 51도50분으로 정확하게 쌓아져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르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m, 폭 2m,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개(또는 250만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쌀 수 있다고 하며, 높이 3m, 두께 30㎝로 자른다면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 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 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대 가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케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이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 돌은 채석장에서 현장까지 나일강을 이용해 운반하였다. 그런데 나일강은 수량이 풍부한 봄 한 철 석달 밖에 이용할 수 없다. 그러면 필요한 석재 전부를 운반하는데는 20년에 걸쳐 무려 50만번을 왕복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쌓을 때는 물론 사람의 힘으로 거대한 돌을 위로 위로 밀어올렸다. 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겉부분의 돌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었으나, 내부의 돌은 거친 그대로 사용했다.
지구 표면에 있어서의 위치는 놀라운 점을 시사한다. 조셉 시즈와 그의 동료의 연구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위치는 대륙의 질량 중심에 위치해 있고 지구 전체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4등분하는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즉, 북남방향으로는 그리니치 동방 31도선인 가장 긴 경선과 동서방향으로는 북위 30도선으로 대륙의 가장 긴축을 이루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래 전에 세워졌는데도 동서남북방향으로 정확히 곧게 서 있으며, 단지 진북방향으로 3분 빗나가 있는데, 현대에 잘 지어졌다고 하는 파리 천문대도 진북방향에서 6분정도 빗나가 있는걸 보면,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광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이민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미드 건설자에게 피라미드가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성한 파라오들의 무덤을 의미했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그의 무덤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에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에는 그 지명도와는 반대로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히에로글리프가 해독되어 만자 자료가 고대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지만,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건조되었는가에 관한 기록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수에즈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ts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100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프랑스인 레셉스의 이해 다시 건설, 총 연장 161㎞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프랑스에 이서 영국이 경영하고 있었으나,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에 의해 1956년 7월 수에즈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여 폐쇄 8년 만인 1975년 재개통 되었다.
운하는 얕은 대형의 단면형태로 되어 있으며, 1869년 개통 당시 깊이 약 8m, 흘수 약 5m 이었으나, 1956년 깊이 13~15m, 흘수 11m 가 되었다. 80년 평균 수면나비 약 200m , 깊이 15m 가 되어 만적시에는 6만 t, 공선시에는 15만 t급 유조선의 통행이 가능하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현재 운하의 폭은 200미터, 평균 수심은 20미터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주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에 달한다.
수에즈운하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최단의 해로이다. 그러나 선박 통과율은 수용능력의 53%에 머무르고 전세계 해상무역량의 6%밖에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한해동안 하루 평균 통과 선박수는 40.2척을 기록, 전년의 41.2척보다 감소했다. 한해에 1만5천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수에즈운하가 한창 호경기였던 80년대와 비교하면 감소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82년에는 하루 평균 61.8척, 연간 2만3천척이 통과했다. 또 최근 통계를 보면 금년 6월 한달동안 운하를 통과한 선박수는 1188척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1226척보다 감소했다. 통과료수입도 95/96 회계년도의 18억 9200만달러에서 96/97 회계연도에는 18억2400만달러로 줄어들었다.
수에즈운하의 매력이 줄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속속 건설된 송유관과 가스파이프라인이 유조선을 대체하고, 초대형 유조선들은 희망봉을 돌아가는 먼 길을 선택하고, 운하를 대체할 육상수송루트가 개척되었다. 수에즈운하청장 하르카드 파딜은 수에즈운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높아지는 가운데 유조선의 유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유조선은 현재 운하청 수입의 1/3정도이나, 67년 전쟁으로 폐쇄되기 직전에는 65%까지 도달한 바 있다. 석유를 만재한 듀조선은 제대로 운항하려면 68~70피트의 수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에즈운하는 현재 수심이 58피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91년부터 95년 사이에 홍해에서 지중해 쪽으로 가는 만재 유조선은 한해 3500척에서 2400척으로 30%가량이나 감소했다.
수에즈 운하청은 초대형 유조선을 유치하기 위해 운하의 수심을 72피트로 늘이기로 했다. 오는 2010년까지 계속될 이 공사를 위해 3만마력에 가격이 1억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최신의 준설선을 투입했다. 그러나 운하수심을 깊게 하더라도 유조선들이 수에즈로 돌아오리라는 전망은 불투명하다.


  ♨ 나일강(The Nile)
나일강은 근원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이루는 청나일이 수단의 카루틈 남방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의 젖줄이 된다. 여기부터는 전혀 유입되는 물 없이 곧장 지중해까지 북으로 흘러간다.
아프리카 중부 고원의 봄비는 몇 달 후 이집트를 범람하는 큰 송수로 변하는데 대개의 홍수는 수해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나일강 홍수는 7월에서 10월에 걸쳐 이집트의 완만한 사막을 서서히 흘러가면서 온갖 수목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뭇 짐승들이 서식 할 수 있도록 한다.
수백 ㎞를 흘러온 나일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둘로 나누어져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땅이 한때는 세계의 곡창이라고 알려진 비옥한 땅인데, 이것은 홍수가 싣고 오는 아프리카 내륙 지방의 부엽토가 서서히 침전 되면서 자연의 퇴비를 깔아주는 결과이다. 이와같이 해마다 부엽토를 더해 가면서 이 비옥한 땅은 검은 색을 띠게 되었고, 그래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검은 땅이란 뜻에서 케미(Kemi)라고 불렀다. 이처럼 나일강은 자연의 선물을 남겨 주면서 서서히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약 6500㎞의 장구한 여행을 마친다.
연중 행사처럼 매년 어김없이 범람하여 수해가 아닌 수해를 안겨주는 나일강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았고 또한 숭배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계절은 3계절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나일강의 범람과 연관된 것으로 홍수가 나서 델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는 7~10월은 농한기, 물이 빠져나간 11~2월은 농번기, 그리고 3~7월은 추수기이다.
이렇게 수 천년을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을 사람의 힘으로 조종해보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 되어서 19세기 초 케네디 모하멧 알리((Khedive Mohammed Ali)는 이집트 현대화 작업을 시작하여 나일강을 알렉산드리아의 식수원이 되게 하였고, 카이로 북쪽에 갑문장치를 설치하여 많은 농토를 확보하기도 하였으며, 1972년에는 아스완 하이 댐을 만들어 매년 범람하던 나일강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강변의 많은 땅들은 전천후의 농토가 되었다. 그러나 나일강의 선물인 천연퇴비는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 이집트, 출애굽기, 그리고 이집트 왕자 (Egypt, exodus and Prince of Egypt)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한 연대에 관한 견해로는 두 가지의 학설이 유력하다. 보다 빠른 견해는 이 사건을 기원전 1445~1440년 무렵 아멘호텝 2세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 다른 견해는 람세스2세 치하에서 기원전 129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은 초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열왕기상 6:1에는 성전 건축이 출애굽(애굽 - 이집트) 사건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재위 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 재위 4년이면 기원전 960년경이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기는 1440년이 되는 셈이다. 또 11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다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사사기11:26)고 말한 것으로 보아 출애굽의 연대는 기원전 1440년경이 되는 셈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더욱 성경이 초기설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실제적으론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445~14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집트 상형문자 (Egyptian Hieroglypshs)
최초의 이집트 상형문자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98년 12월15일 AP통신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군터 드라이어(Gunter Dreyer) 박사가 중부 이집트에 위치한 아비도스(Abydos)의 "전갈(scorpion)" 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조그만 진흙판에 갈대 펜으로 새겨진 초기 단계의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전갈 왕은 서기전 3300년경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인들보다 200~3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옥스포드 대학의 베인스 교수의 말처럼 단순히 이 증거만으로 이집트가 수메르보다 앞섰다고 볼 수는 없으며 두 지역 모두 비슷한 시기에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우표 크기의 매우 작은 이 진흙판들에는 동물, 식물, 산 등이 새겨져 있으며 삼베와 올리브 기름 등의 세금 목록으로 밝혀졌다. 또한 같은 시대에 관리들의 이름은 각각 생쥐, 송골매, 쌍 송골매 등의 동물 이름이 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드라이어 박사는 1985년부터 아비도스 지역의 묘지를 발굴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300여점에 달하는 토판문서와 토기에 잉크로 그려진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
카이로 남쪽 약 500㎞ 지점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아비도스는 이집트 최초의 수도로서, 초기 파라오들의 묘지와 특히 오시리스 종교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오시리스 신화에 의하면 동생 셋트에 의해 살해되어 산산조각이 난 오시리스의 신체 중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아비도스미여 이곳에는 서기전 1300년경 세티 1세가 건설한 대규모의 신전과 오시레이온(Osireion), 그리고 람세스 2세 신전 등의 유적이 있다. 특히 세티 1세 신전 내부의 벽화는 3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방금 칠한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다.


◎ 최근 정치˙사회 동향
- 1981년 10월 사다트 암살로 당시 副統領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87년 10월 大選에서의 재선, 1990년 11월 總選에서 여당인 國民民義黨(NDP)의 압도적 승리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였으며, 1993년 10월에 대통령에 재차 당선되어 집권 3기를 맞고 있다. 또한 1995년 11월 29일에 실시한 총선에서 집권당인 國民民主黨은 전체 454석 중에서 417석을 차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 1990년 걸프事態 이후 IMF 등 서방측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經濟改革에 두고 경제전반에 걸쳐 經濟民主化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국내 이슬람 보수세력의 반발을 감안,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수행상 耐乏生活 강요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으며, 최근 북부지역에서의 回敎原理主義 세력의 빈번한 테러사건 발생, 최대 在野勢力인 무슬림 血盟(Muslim Brotherhood)에 대한 대중적지지 확산과 주로 고학력 노동의 높은 실업률(20%) 등 각종 不安要素가 산재해 있다.
- 外交的으로는 非同盟中立主義 및 均衡外交路線에 입각, 아랍권내 온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걸프전쟁시 미국 주도의 多國籍軍에 참여함으로써 아랍권내 최대의 리더쉽을 인정받는 한편, 이후 國內經濟 안정과 中東平和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경제, 군사적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
- 한편, 최근 核擴散禁止協定 문제와 대이란 제재 동참문제로 미국과 다소 불편한 관계가 표출되고 있으나, 매년 군사원조를 포함한 20억 달러의 미국원조 자금 지원 등을 감안할 때 양국의 밀월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인접국인 이스라엘과는 1979년 평화조약체결 이후 1992년 양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관계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나, 수단과는 수단정부가 자국내 회교과격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계개선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대 신화
▩ 오시리스와 이시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시에 로제타석을 입수함으로 프랑스의 학자 상포리옹에 의해 이집트 문자가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화나 정신 문화 등을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 중에 중요한 것은 사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고, 미이라를 만들어 불멸의 신앙을 신봉했다. 그들의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은 '사자의 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신화는 창세 신화로 시작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창세 신화보다는 체계적이지 않다. 기록의 손실 때문일까? 태초의 Nun이라는 바다가 있어 거기서 아툼이 태어났다. 이 아툼은 태양신 라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라는 스스로 게브, 슈, 테프누트, 누트를 낳아 이들 4명은 다툰 후에 게브는 대지가 되고, 테프누트는 공기가 되고, 슈는 증기가 되고, 누트는 하늘이 되었다. 게브와 누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낳았다. 오시리스에 관한 신화는 이집트인들이 좋아하는 신화였다. 오시리스는 전 세계의 미개 문화에 문명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느날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오시리스를 시기한 세트가 음모를 꾸민 파티에 오시리스를 초대한다. 거기서 세트는 상자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이 맞는 사람에게 금화를 준다고 말했다. 여러명이 상자에 들어가 보았으나 오시리스 몸에 맞춰 만든 상자가 그들에게 맞을리가 없었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그 상자에 들어가자 세트의 부하 72명은 달려들어 상자를 닫아 나일강에 버렸다. 그것을 안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혈육동생인 이시스가 그의 시체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안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체를 산산조각 내어 이집트 각지에 버렸다. 스는 다시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아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생을 살리는 의식을 행했지만, 오시리스는 이 세상에 살수가 없어 사자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는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 종교
Ψ 이집트 종교의 변천
5000년에 걸친 이집트 역사에는 시대에 따라 종교의 주류가 바뀐다. 고대 이집트 시댕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가 꽃을 피우고, 그레코 로만 시대 말기에는 원시 기독교인 콥트교가 번영한다. 다음으로는 이슬람교가 아랍군과 함께 전파되면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가 된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결국 이집트의 국교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대 이집트 종교는 다신교로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이크나톤 왕(기원전 1379~1362년) 시기에는 종교 개혁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신교가 된 적도 있으나, 그 후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가 시대의 기본적인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의 최고신은 고왕국 시대부터 변함없이 태양신 라신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수호신이었던 아몬라신이라 하여 국가의 최고신으로 군림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 후 그레코 로만 시대에도 한동안은 세라피스 신과 이시스 신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이집트 종교와 그리스도 로마의 종교가 혼합이 된 듯한 종교가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에 따라 콥트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 경제
- 석유수출 收入, 海外勞動者 送金, 수에즈 운하 通行料, 그리고 外國援助 등을 재원으로 경제개발에 주력한 걸과, 1970년대~ 80년대 중반까지 연 7~9%의 비교적 높은 성장을 기록.
-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世界經濟 침체, 油價下落 등 대외여건이 악화된데다가 과거 統制經濟體制下에서의 누적된 非效率性 등 경제의 內在的 문제가 연쇄적으로 표출되면서 1987~92년 (2차 5개년 계획기간) 중에는 연 4.7%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 1991년 들어 걸프전쟁시 다국적군 참여에 따른 IMF, IBRD 및 서방측의 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市場經濟 도입 확대 같은 광범위한 經濟改革을 추진하여 왔다.
- 1993년도 실질 GDP 성장률은 긴축정책에 따른 국내수요 감소와 관광수입의 급감으로 2.9%에 그쳤으나, 1994년도에는 건설, 제조업분야 등 경제전반에 걸친 회복세에 힘입어 4.0%의 성장률을 실현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4.6%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3] 기독교에서 본 이집트

- 근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 문명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서 시작된 문명이다. 이스라엘은 양대 문명 사이에서 두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 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연결해 주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조건은 때로는 무역의 통로로, 때로는 전쟁의 길목으로 사용되면서 강대국들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고대의 앗시리아(지금의 이라크), 바벨론 제국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거쳐야만 했으며, 마찬가지로 이집트가 북진정책으로 진군을 하면 무장한 군대는 이스라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전쟁이 지나간 지역은 폐허로 남겨졌다.
바벨론 제국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 헬라,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유대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땅에 소수의 유대인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주후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 제국은 로마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후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십자군, 이집트 맘룩, 오스만 터키가 차례로 이어받았다.
그럼 이렇게 침략을 받기만 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집트(고대 명칭 애굽)와 이스라엘의 관계..-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여년이 넘는 시간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집트에서 도망 나올 수 있었다. 출애굽 후에 그들은 40여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대로 여러나라의 침략으로 그들은 땅을 잃어버렸고, 그들은 전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잃어버린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 인들이 돌아와 팔레스타인들을 쫓아내고 다시 차지를 한 것이다.(중동전쟁)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동 평화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평화공존 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9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 등이 성립, 이집트는 아랍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세계의 추세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팔레스타인국가 설립에 반대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의 교섭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수교는 하였으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 걸친 본격적인 교류와 협력은 중동평화협상이 장착될 때까지 활성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정치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달라진다. 성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 임이니라" (이사야 19장 24~25절)
지금 여기에는 세 나라가 나온다. 다시 읽어보면 애굽은 내 백성이라 했고, 앗수르는 내가 지었다고 했으며, 또 이스라엘은 나의 산업이라 하시며 세계 중에 복이 된다 하셨다. 지금 현재의 지명을 보면, 애굽은 이집트임을 알 수 있고, 앗수르는 이라크임도 알 수 있다. 분명히 나라를 달리하고 종교도 달리 하는데도 이 세나라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서 430여년간을 식민지 생활을 했고, 앗수르 즉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정복했으며,  유대땅은 예수님께서 박해 받으신 후 1900여년간을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세나라를 나의 백성, 나의 지음, 나의 산업이라 하셨음은  무엇일까..?
여기서 앗수르(이라크)는 살펴보지 않겠다. 이집트를 살펴보자.

이집트는 저주받은 함의 자손 미스라임이 시조로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애굽을 내 백성이라 했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이사야 19장 12절)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일시라 하리라" (호세아 2장 23절)
이것은 애굽을 이방인의 대표적 나라로 택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이라 한 것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나라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서 2장 11~12절)
언젠가 이집트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이사야 19장 21~22절)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인 이집트를 먼저 믿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품어야 할 것이고, 또한 기독교 국가들도 이집트를 품고,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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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에 대한 정보

Ⅰ. 일반
1. 위치 : 북아프리카 중앙부, 지중해 연안
2. 기후 : 북부:지중해성 기후, 남부:사막성 기후
3. 면적 : 1,759,540㎢(한반도의 8배)
4. 인구 : 550만명(1997)
5. 수도 : 트리폴리(Tripoli 170만명)
6. 주요도시 : 벵가지(Benghazi 80만), 미수라타(Misurata 40만)
7. 주요민족 : 아랍(Arab)인, 베르베르(Berber)인
8. 주요언어 : 아랍어(영어, 이태리어도 통용)
9. 종교 : 회교(Islam, 97%)
10. 교육 : 의무교육 - 대학까지 무료교육, 문맹율 - 60%
11. 언론:
- 신문 : 알 파즈르 알 자디드(약 5만부);
- TV : 국영 테레비젼(1 및 2방송);
- 라디오 : 국영(1 및 2방송, 이슬람방송)

Ⅱ. 정치
1. 국가성립 : 2차대전중 영, 불에 의하여 분할점령, 51년 유엔결의로 왕국 탄생
2. 독립일 : 1951.12.24 국경일 : 9.1(혁명기념일)
3. 정체 : 사회주의 인민공화제
4. 원수 :  무아마르 알   가다피(Muammar Al-Qadhafi)  Leader of  the  Great First  of September Revolution
5. 의회 : 총인민회의
6. 수상 : Abdul Majeed Al Gaud
7. 외상 : Omar Mustafa Al Muntasser
8. 주요정당 : 없음
9. 국제기구가입   : UN(1955.12),   ILO,  FAO,   UNESCO, WHO,  IFC,   IDA,  IMF,  ICAO, UPU,OPEC, 비동맹
10. 영해 : 12해리
11. 국방 : 85,000(육군 55,000, 해군 8,000, 공군 22,000)

Ⅲ. 경제
1. 국민총생산량 : $332억(1995) (1인당 $5,650)
2. 계획및중점정책 : 6차 5개년개발계획, 농공업개발계획 추진
3. 화폐단위 : Dinar($1=0.36D, 1995.1)
4. 주요자원 : 석유(매장량:450억배럴,일산:139만배럴), 천연가스
5. 무역(1996) : 수출 $97억, 수입 $78억
6. 외채 : 약 49억불


리비아의 아랍(Arab)족

인구 : 5,200,000명 (리비아 인구의 97%이며 도시화율은 70%이다.)
언어 : 모든사람이 아랍어를 사용한다. 또한 20%정도의 사람들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
위치 : 아랍족은 리비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수 종족으로서 리비아 전역에  두루 거주한다. 다만 리비아는 해안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전 국토의 90% 이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해안지역인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몰려 살고 있다.
경제 : 이들의 전통적인 산업은 농업이었으나  1959년 석유가 개발되자 대규모의 이농현상이 빚어졌다. 1961년 석유수출이 개시됨에 따라 석유산업을  기반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석유 일변도의 취약한 산업구조를 이루고 있다. 리비아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89년부터는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종교 : 수니 이슬람이 국교지만 세속화 경향이 강하다. 다른 종교의 포교는  불법이고 '이슬람 선교'를 위해 매년  상당한 액수의 예산을 세운다.  이슬람의 행사와 예배가 엄격히 지켜진다.
기독교 현황 :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무지하다. 선교에 대해서도 완전히  닫혀있고 매우 적대적이다. 알려진 그리스도인이나 사역단체 혹은 선교사는 없고, 해외 이주자를 위한 작은 교회와 로마 카톨릭 성당이 5개정도 있을 뿐이다.

리비아의 근대사

1912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으나2차대전 후  영국,프랑스가 분할통치.  1951년 독립을 선언하며 왕국을 수립(아이르 이드리스 국왕). 1969년 9월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자유장교단이 무혈쿠데타에 성공, 리비아아랍공화국(LAR)을 탄생시키고 혁명평의회가 실권을  행사. 1975년 우라늄 매장지인 차드 북부 사하라를 합병했고 1977년 국명을 사회주의 인민 아랍공화국 (SPLAJ :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으로 고치고 혁명평의회를 전인민회의로   개편.  혁명이후   국가  지도자인   무아마르   가다피는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혁명 공약으로 삼아 교육혁명과 농업혁명 등을 추진해 왔다.

정치상황
1977년 3월 통치기구를 개혁해 전인민회의 서기국(5인으로 구성)이 실권기관이 되어 가다피가 서기장으로 취임. 77년 3월 인민주권확립(신헌법)채택, 인민의 직접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인민위원회(내각) 창설,  카다피는 3월 전인민회의  서기직을사임했으나 `9월혁명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국가원수직 보유. 아랍사회주의연합이 유일 합법정당.

대외관계
아랍사회주의를 제창하며 `아랍통합의 기수'로 자처하는  가다피는 아랍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반시오니즘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음. 86년 1월 미국은 가다피의 국제테러행위지원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인과 미국기업의 여행금지  및 거래중단 등 경제제재를 발표한데 이어, 4월 트리폴리 등지에  공습을 감행, 100여명의 사상자를 냄.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또 88년 270명의 사상자를  낸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리비아인 2명을 지목, 인도를 요청했고 리비아  정부는 이들의 인도를 거부함에따라 미국과  영국 등은 리비아에 경제제재를 가함으로써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음. 92년 3월 31일 유엔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금지, 무기금수 등 제재결의. 95년 4월 19일 이를 무시하고 리비아기의 사우디 운항을 강행.

리비아 경제
세계 4위의 석유생산국으로 OPEC에서 강경입장. 석유  무기화를 제창하며 생산제한, 금수,  가격인하 등의  문제에 선봉에 섬. 매장량 211억 배럴(세계 8위).

리비아의 사회문화
문맹률은 61%, 초등교육은 의무제, 대학까지 무상교육.  문화혁명을 추진, 각종 표시에서 외국어 일소. 아랍어 사용 철저. 신문 3개는 모두 정보, 문화성에서 발행하며 라디오와 텔레비젼 방송국 2개 모두 국영. 국영 자마히리야(JANA)통신이 있음.

대한(對韓)관계
남,북 동시수교. 한국과는 80년 12월, 북한과는 74년  1월 각각 외교관계 수립. 대한수입 1억 3973만달러, 대한수출 739만달러 (92년  11월). 동아건설이 리비아대수로 1,2단계공사를 수주하여 완료중이며 3,4단계 수주예상.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 개요

▲ 총 5단계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리비아 동남부 및 서남부 내륙지역 지하에.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수자원(추정 매장량  35조톤 : 나일  강의 200년 유수량)을 취수, 리비아 북부지역  지중해 연안과 수로 인근의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그리고 공업지역의 공업용수를 공급하여 사하라 사막 북부를 옥토로 바꾼다는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 대수로 공사는 녹색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리비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대수로공사를 국가 최우선 사업으로 지정하고, 이 공사를 방해하는 경우  중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이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 현 리비아정부는 혁명집권 후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는 기치 아래  산업 및 사회복지 향상을 위한 종합계획을.수립하고 각 분야에 걸쳐 정책적으로  혁명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국기도 그린(Green) 단일색으로 변경(녹색혁명은 전국토의 옥토화 내지는 초원화를 의미함) 했습니다.

▲ 방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대수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추진 하기  위해 공사 발주 당시 이미 기금을 확보하였으며. 특별법상 GMR Tax를 신설, 자금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국가지도자인 가다피의 혁명공약사업으로 545만 리비아인들은 한정된 원유고갈 시대를.대비하고 강대국들로부터 식량을 미끼로 한 간섭을 배제하며, 식량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아랍인(1억8천만)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식량생산국이 됨으로서 아랍통일 꿈을 실현시키는데 주도권을 잡고,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지 말자는 국민감정에 기반을 둔 사업입니다.


대수로 공사 효과

▲ 1단계 통수식에 이어, 2단계공사의 통수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됨으로써 `녹색혁명'을 꿈꾸는 리비아 국민의 열망이 더욱 가시화 됐습니다.

▲ 한편, 지중해 연안의 주요 거점도시인 벵가지와 서트, 트리폴리 지역의 사막지대의 옥토화가 가속화 됨으로써 리비아의 경제는 더욱 안정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게 돼 리비아 국민의 삶의 질을 한층 높일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그동안 불모의 땅으로만 생각하던 리비아 사막이 한국의 동아건설에 의해 곡창지대로  탈바꿈 함에 따라 자급자족을 향한 리비아 정부의 원대한 목표가 하나, 둘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리비아 양국간의 경제적인 협력관계가 . 이를 계기로 더욱 공고해  질 것으로 보이며 양국간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의 교류도 , 또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 이 공사를 통해 우리 한국이 얻은 경제적 이점은 외화가득,  고용창출, 기술축적 효과,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 향후 공사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가 약  300억달러에 이르는, 문자 그대로의 초대형공사인 만큼 외화가득 효과는 막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2천 6백만명에 이르는 연인원 (한국인 1,250만, 3국인 1,346만)에서 보듯이 여기서 얻는 고용창출 효과 또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 아울러 이 공사는 한국의 동아건설이 유수의 외국건설업체를 하청업체로 거느리고 참여해,신기술을 개발하고, 노하우를 축적함에  따라 우리 건설업체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원청건설사로서 완벽하게 공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효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 특히 이 공사를  계기로 한국의 건설산업은 종래의  노동집약적 건설수출에서 벗어나 기술집약형 건설수출을 하게 됐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소득 중 하나입니다.


공사현황

▲ 리비아대수로 1단계 공사 내용
리비아 동부의 아즈다비아(Ajdabiya) 남방  약 400Km 지점인 사리르(Sarir)  우물지역과 약 670Km 지점인 타저보(Tazerbo) 우물지역의 지하수를  개발해 북부 지중해 연안의  아즈다비아를 경유, 서트(Sirt)와 벵가지(Benghazi) 지역까지 1일 200만톤의 지하수를 송수하기 위한 공사로 총 연장 1874Km의 길이에 관을 생산, 운송, 매설 공사

▲ 리비아대수로 2단계 공사 내용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Tripoli) 남방  약 620Km 지점인 Jabal  Hasouna 지역의 지하수를 개발, 수도인  트리폴리지역까지 1일  200만톤의 지하수를   송수하기 위한 공사로  총연장 1755km의 길이에 관을 생산, 운송, 매설하는공사

▲ 리비아대수로 2단계 추가공사 내용
2단계 공사의  북쪽 끝인  타루나/제파라(Tarhunah/Jeffara)지역에서  서방쪽 아부지안(Abu Ziyyan)에 1일 80만톤을 송수하는 관로 공사(83Km)와, 트리폴리 부근에서 서쪽 비어알가남(Beer Al-Ghanam) 지역에 1일 100만톤을  송수하기 위한 관로 공사(68Km),  그리고 2단계 우물지역의 1일 200만톤 취수 능력을 250만톤으로 확장하기  위한 취수관로(185Km)와 신규 우물 개발(116개) 공사

▲ 리비아대수로 3단계 공사 내용
3단계 공사는 1단계 공사의 송수량을 증대하기 위한 공사로  다음의 3개 지역 송수관 건설공사로 총연장 1300여km

1) 1단계 송수시설의 서쪽 끝인 서트지역에서 2단계 공사구간까지 연결하는 알 가르다비아/아스다다(Al-Gardabiya/Assdada)구간의 송수관 건설공사로 총 연장 190km (3단계 1차분 공사)

2) 리비아 동남쪽 쿠프라(Kufra) 지역의 취수장  개발과 사리르 남부지점(1단계 공사구간)까지의 송수관 건설공사

3) 1단계 지역인 아즈다비아에서 리비아 북동쪽  토브룩(Tobruk)까지 연결되는 송수관 건설 공사


화폐단위

리비아의 화폐 단위는 '디나(D/L)'인데, 정부 공시환율로 100달러  정도를 환전하면 33디나 정도로 바꿀 수가 있으나 암시장에서는 그 열배인 330디나 정도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그런일은 드무나 거래를 하다가 적발되면 구속되는  수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식적으로 리비아내에서는 달러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인삿말 및 생활언어

리비아는 아랍 베르베르족의 혈통에 유럽 민족(특히 이태리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기존의 아랍어에 베르베르어와 이태리 방언등이 섞여 있다.  이태리어의  영향을 들자면 음식의 경우 '만자리야'이며 아기가 '밤비노'인 경우등을 들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표준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며 부수적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 습관을 들여다 본다면 할 말은 다 하고 살 수 있는곳이 리비아라고 생각한다.

케이파 할락?(어떻게 지내?)
쉰 아크바락?(근황이 어때?)
쉬누 할(어때?)
보통 만나면 오른 손을 가슴에 얹었다 떼고 일분정도 같은뜻의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응답 - 꾸와이스 알 함두릴라!(남자일 때)
       꾸와이사 알 함두릴라(여자일 때)

Welcome - 아흘란 와 싸흘란
응답 - 아흘란 비크(남), 비키(여), 비쿠(복수)

Bye - 마앗 쌀라마, 일랄 리까.

And you? - 와 엔따(남자에게), 와 엔띠(여자에게)

How much does it cost? - 비 캄 , 캄 따만, 캄 풀루쓰?  깎을 때는 '낚쓰(부족하다)'
'캄'은 How many or How much의 뜻이다.
모두 얼마 입니까? - 마주무아 캄?  꿀루 캄?
비싸다 - 가알리,  싸다 - 라키쓰

Thank you - 슈크란

What is this? - 쉬누 하다(하디히) 쉬누'는 '무엇'이냐는 뜻이고 '하다(하디히)'는 '이것'이라는 뜻이다.

What's your name? - 쉬스막? 쉬누 아스막?

Where are you from? - 엔따(엔띠) 민웬?  민 씨르트 (씨르트에서 )'웬'은 Where의 뜻이고 '민'은 from 이다.

I'm from Korea - 아나 민 꾸리야(물론 쟈말리야이다. 샤말리야는 북한) 천천히,조금 - 슈웨이 슈웨이, 슈웨이야.   반 반 - 누쓰 누쓰

I'm sorry - 마알래쉬        뭐가 문제니? - 쉰 무쉬킬라?

No problem - 무쉬 무쉬킬라.  마피쉬 무위킬라.

Yes - 아이와 , 나암. No - 라(단호하고 강하게)

O.K - 마쉬, 하디르, 바-히

Sit down, Here you are - 타파딸
내일 - 부크라, 고두아 . 오늘 - 알욤.   어제 - 암쓰, 알바리하
가능합니까 - 뭄킨.   불가능합니다 - 무쉬 뭄킨

Finish, done.. - 칼라스
직진 - 알라 뚤
오른쪽 - 야민, 왼쪽 - 야사르, U턴 - 리프
버스 - 우뚜비스 , 하필라

Go away. Leave - 엠쉬(다소 명령조의 분위기), 마 쌀라마

Again, another - 마르라 따니(아띠니 푸르싸 마르라 따니 - 한번 더 기회를 줘)

Do you have ---? 안닼(남) 안딬(여)....?

Let's go(do) - 얄라 비나!  헤야 비나!

I want - 아나 누삐,        I hope, By(If) God's will - 인슈알라

I understand - 아나 페헴, I don't understand - 아나 무쉬 페헴

I know - 아나 아아리프 , 아나 아드리

I remember - 아나 페케르

Do you know...? - 엔따 타레프....?  할 타레프?

I want to see... - 누삐 아슈프

Please(부탁할 때) - 민파들랔(남) 민파들맄(여), 라우 사마흐트(남)  라우 사마흐티(여).

What do you want? - 엔따(띠) 쉰 투삐?

How old are you? 안닼 캄 싸나?

Just a moment - 캄싸 다끼끄. 바으다 슈웨이야 라우 사마하트(티)

Not yet - 마자알
축하할 때 - 마브루크

Happy new year - 꿀루 사나 와 엔뚬 꾸와이쓰!

Like this - 히끼

There is no... - 마피쉬



역사
리비아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지중해계 인종 리비아인과  아프리카계 인종 에티오 피아인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후 BC 10세기에 이르러 트리리폴리타니아로 그리 스인이 와서 지중해 무역의 기지로 정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트리폴리타니아는 카르타고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번창했다.  BC 2세기에 카르타고가 몰락한 후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의 리비아는  무역활동의 기지로서 올리브, 포도, 보리, 밀 따위를 로 마에  공급하여, '로마 제국의 곡창'으로 불 리는 등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쇠퇴와 함께 반달족의 침공을  받아, 5세기에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회복돠 함께 일시적으로 번영을 되찾았으나,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아라비아인이 침입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인데, 670년 우마이야 왕조가 튀니지의 카이루안에  마그레브 지방을 통치할 총독을 배치한 뒤로 이슬람화되기 시작하였고, 아라비아어가 보급되었다. 11세기 중엽 아라비아인들이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에게 추방당하여 리비아에 이주했다. 그 결과로  부족 간의 항쟁이 벌어져 국토가  황폐해지고 동시에 아라비아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에 한때 스페인과 몰타의 기사단의 지배아래 놓이기도 했으나 1561년 오스 만투르크 제국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그후  1911년 이탈리아에 지배당하기까지 오스만투르크 제 국이 세운  괴뢰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다.  1911년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에 침공하고, 그 이듬해에는  발칸전쟁에서 패한 오스만투르크와 조 약을 맺어 리비아를 식만지로 삼았다. 그러나 세누시 파 교단을 중심으로 한 리비아인의 저항 때문에,  해안지대 이외의 식민지화는 좀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대두와 함께 1940년에는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식민지 처리를 유엔  총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1951년 리비아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3개 주의 연방제에 의한 독립국으로 인정, 세누시 파 교단의 수장 모하메드 이드리사가  국왕이 되었 다. 1963년에는 헌법 개정에  의해 연방제가 폐지되고, 단일국가로서의 리비아 왕국이 탄  생했으나, 1969년 카다피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지리
북아프리카의 지중해안에 위치하고, 국경은 이집트,  수단, 차드, 니제르, 알제니,  튀니지와 닿아 있다. 지중해의 해안선은 2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리비아'란 말은 일찍이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막을 가리키던 그리스어인데,  그 이름대로 해안지대를 제외한  국토의 약 90%가 사막지대이다. 국토 면적은 약 177만㎢로 동부의 키레나이카 지방, 서부  해안지대의 트리폴리타니아 지방, 그리고 서남부의 사막지대 페잔 지방 등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을 향해서 돌출한 표고 약 700미터의 자발 알 아흐다르 고원을 포함한 키레나이카 지방의 중심지는 벵가지이다.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은 해안선에서부터 차츰 높아지는 단구가 알주프라 오아시스에 이르기 까지의 지역으로서 트리폴리가 그  중심이다. 이상의 북부 해안지방에 전인구의 90%가 집중되어 있다. 국토의 0.5%밖에 안되는 농업지대도 이곳에 있고, 주로 곡물이 재배되고 있다. 페잔지방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인데, 세부하 등이 오아시스들이 군데군데 있다.


기후
대기후는 해안지방의 경우에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간  평균기온 20도 전후이고, 12월에 강우량이 가장 많아 150밀리미터 전후에 이른다. 봄, 초여름, 가을에는 때때로 기브리라고 불리는 건조한 연풍과 모래폭풍이 사막에서 엄습한다. 고온인데다가 모래먼지로  가득 찬 공기에 싸이면 매우 불쾌해지지만 2, 3일 만에 괜찮아지는 수가 많다. 내륙부는 사막기후로서 평균기온이 훨씬더 높고, 강우량은 연간  10밀리미터 이하로 매우 적다. 하계  4월 - 10월 : 6∼8월은 극도로 더움. 동계 11월 - 3월 : 온난하고 가끔 비가 옴.


사회 문화
정식국명은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이고, 총인구  약 374만명이다. 엄정한 이슬람주의에 입각해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적인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으나, 카다 피의 테러지원 행위 때문에 리비아는 시만 국제적 고립속에 있다.  국가 경제는 석유산업에 의존 하고 있다.  석유매장량은 세계 최대라는 쿠웨이트에  못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정부는 석유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경제정팩을 중시한여 관광사업에는 별로 힘쓰지 않고, 특히 1987년 8월 이후로는 일반 외국인에게  좀체 입국 비자를 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화유적, 아름 다운  해안선 등의 관광자원에 기초한  관광정책이 세워지면서 얼마 전에는 3500만 달러를 들여서  트리폴리의 붉은 요새에 자마히리 박물관을  세우는 등 몇몇 박물관을 새로이 세웠다. 또한 1989년 11월부터는 일반외국인 고나공객에의 비자 발급 제한도 완화되었다. 한국은 건설 수주 (대수로공사)를 주로 하여 연간 1억 500만 달러를 수출하고 2600만 달러 어치를 수입하여 약  1억 2400만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1989) 그러나 대수로공사  제2차 공사까지  동아건설에서 수주함에따라 리비아와의 교역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인종, 언어
인구는 약 500만명이다.  주로 아라비아인과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키레나이카 및 트리 폴리타니아에는 아라비 아인이  많고 남부의 페잔 지방에서는  아라비아, 베르베르, 흑인의 혼혈이 보인다. 남서부에는 투아레그 유목민이 있다. 이밖에 아랍 각국에서 온 노동자. 동유럽, 인도, 파키스탄, 미국,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한국등의 사업관계자 등이 약 30만 명 있다. 공용 어는 아라비아어  이다. 입국카드 등도 아라비아어만으로 쓰며, 시내의 표지등에도 외국어는 쓰지 않고 있다. 그나마 약간 통용되는 외국어는 영어이다.


종교
종교는 대부분이 수니 파 이슬람교이다. 그리고 카톨릭교와 유대교도 조금 있다. 보도기관은 모두 국영이다.



유럽에 유화 제스처

리비아는 유엔이 자국에 부과하고 있는 경제 제재조치의  해제를 위해 도움을 제공하는 일부 유럽국가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유럽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자국 대사들을 통해 현재 계획중인 주요 프로젝트 관련 정보를 조심스럽게 제공하고 있다. ‘아프리끄’지에 따르면 리비아는 현재 45억달러 규모의 원유, 가스산업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사업전망 조사 및 연구, 유전  확장, 3개 정유소의 현대화, 쎄브하 지역의 제 4 정유소 건설이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이다.

또한 리비아는 튀니지의 경계선과 이집트의 경계선을 연결하는  선로(線路)와 북부의 지중해 해안과 남부의 페잔을 연결하는 선로(線路)를 건설하기 위해 4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3천km의 철도망,  96개의 역사(驛舍), 544개의 선교(線橋)를 건설하고 244개의 기관차를 구입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리비아는 재래식 항공기를 교체하기 위해 25기의  유럽산(産) 항공기를 구입하는데 25억달러의 경비를 지출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흘리고 있다.

한편 유럽 주재 리비아 대사들에게 보낸 기밀 서류에 따르면, 리비아는 봉쇄조치가 해제될 때를 대비해 트리폴리,  벵가지, 쎄브하 공항과 같은  주요 기간산업 프로젝트에 많은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보들이 사실인 경우  위에 언급된 프로젝트에 약 1백10억달러의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시에 리비아가 과연 이러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랍 연맹은 경제 제재조치로 리비아는 2백35억달러의 손실을 입었으며 유가하락은 리비아의  수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리비아는 지난 6월에 개최된 제2차 OPEC 정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원유생산을 일일 13만배럴씩 감축해야 한다.  최근들어 세계 주요 원유생산회사들이 리비아에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했으나 1998년의 원유생산은 봉쇄조치에 의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재  조치로 인해 유전지대를 가동하는데 필요한 장비의 사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비아 전문가는 리비아정부가 재정감축을 실행하기 위한 1998년  초의 계획에 따라 1.3% 이상 소비를 줄여야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리비아가 역점을  두고  있는 대수로  공사(the  Great Man-Made River)를 포함한 모든 계획들에 대한 예산삭감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지출예산을 줄임에 따라 이러한 프로젝트의 완성 시기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예산이 삭감되고 GDP 성장률이 -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리비아가 과연 새로운 프로젝트에 소요될 1백10억달러에 달하는 경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 주요 석유수출국의 모임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이  석유수입의 안정적인 확보를 목표로  1960년에 결성했다. OPEC는 가격카르텔뿐 아니라 생산카르텔의 색체도 띠고 있다. 현재 회원국은 알제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리비아, 아랍에미레이트연방, 이란,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이라크, 카타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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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치
나이지리아는 북서 아프리카 해안인 기니아만에 위치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국토는 남북쪽으로는 1,050km, 동서 쪽으로는 1,130km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923,770km이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 아래쪽부터 시작되고 남쪽은 기니아만까지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의 주변 국가로는 서쪽에 있는 나라가 베냉이고 동쪽에는 카메룬이 있으며 북에는 니제르가 있고 차드호를 끼고 차드와 접해 있다. 나이지리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남서쪽으로 흐르는 베뉴강에 의해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니제르 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국명도  니제르강에서 유래된 것이다. 니제르강은 북동부 산악 지대인 시에라리온 고원에서 시작하여서 수단을 거쳐서 흐르고 있으며 강줄기가 나이지리아 북동부로 이 지면서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로코자에서 합류하게 되고 Y자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니제르강과 베뉴강 하류에는 삼각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기름진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2.지세
나이지리아를 기후적으로 나누게 되면 북부의 고원지대는 차드의 초원지대에 속하고 있어서 숲과 풀밭이 우거진 스텝 지역이다. 북부지역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500mm정도이고 우기가 짧은 편이다. 또 기니 아만  연안지대는 연 강수량이 2,000mm가  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 야자와 카카오가 우거진 열대 우림의 밀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와 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대륙 고원으로 남쪽과 동쪽부터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원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 고원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의 낮은 지대들이 침식되어진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기니아만에  면한 연안지대는 남북의 폭이  16~96km MANGROVE가 우거진 습 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니제르강 하류에 넓고 비옥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기니 아만 연안에는  야자수 숲이 있다. 북쪽에는  80~160km 폭으로 고도 300m 이하의 기복 심한 열대 우림 지대가 펼쳐져 잇고 500km에  걸쳐 드문드문한 수풀과 초원지대가 계속되고 있다.

3.기후
나이지리아의 기후는 기니아만과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년이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부와 북부의 기후가 많이 다르다. 남부 기니아만에 가까운 지역은 고온 다습하며 북쪽 사하라 사막에 가까운  지역은 사하라로부터 남하하는 열기로  고온 건조하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기온이 제일 높은 때는 2월에서 4월까지이다. 평균 기온이 제일 낮을 때는 7월에서 9월까지이다. 나이지리아에서 평균적으로 강수량이 제일  높은 때는 6월이고 강수량이 제일 낮을 때는 8월과 12월, 1월이다. 나이지리아의 연 강수량은 동서쪽이 비슷하다. 연 강수량이 남부지역은 3,500mm이고 북부지역은 500mm가 되지않는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기후는 고온이기는 하나 건조하고 약 8개월 정도 계속된다. 그리고 건기 동안에는 한 울의 물도 내리지 않는 곳도 많으며 일교차가 평균 17도를 넘을 때도 있다. 그리고 10~4월에 걸쳐서는 강한 바람과 천둥을 동반하는 사하라 사막의 뜨겁고 모래 섞인 하마 탄이라고 하는 회색의 미세한 먼지와 함께 열풍이 불어오게 된다. 이때에는 안 내부에까지도 수북이 모래와 먼지가 쌓이게 된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기후는 습기가 매우 높고 장마철이 일년 내내 계속되며 평균기온이 32도로 덥고 습한 기후이다. 남부지역은 11~3월간은 건기이고 남서쪽은  지역에 따라 5~8월간이 우기이며 남동쪽은 5~10월이 우기이다. 강수량은 1,788-4,318mm이고 기온은 2~4월이 최고이고 8월이 최저이다. 남부지역은 평균 기온은 28도~32도  이다. 콜레라,말라리아,활 열병,뇌막염 등 열대 풍토병이 많으므로 건강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은 건기이다. 접경 지역은 6~9월이  우기이며 강우량은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하고 508~1,270mm정도이다. 기온은 3~6월간이 최고이고 12~1월이 최저를 기록하며 평균 13도~34도를 유지하나 계절에 따라 기온의  차가 크다. 나이지리아의 내륙지방 한 여름의 평균기온은 평균 38도이다.


4.역사
나이지리아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기니 아만이 있고 북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국가이다. 유럽의 여행자들이나  지도 제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는  slave coast Niger empire 등이 있다. 나이지리아는  고대부터 아프리카의 교차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많은 부족 국가들이 형성되어 great empires of the western Sudan의 일부를 이루고 살았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다양하여 약 25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10대 부족으로는 하우사족,풀라니 족,이보족,요루바족,카누리 족,에도족,티브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부족들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르고 있다. 10대 부족 중에서도  가장 큰 3대 부족이 있는데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하우사, 플라니족 , 요루바족 , 이 보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북부지역에는 주로 하우사족과 풀라니 족이 거주하고 있고 남서부 지역에는 요루바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동부 지역은 이 보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3대 종족들의 비율은 전체의 약65%이고 기타 250여 부족이 35%을 차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000년경 다. 조스 프라튜 지역에서 철을 사용하였고 흙으로 만든 물건들과 주거 흔적을 발견하였다. 북부 나이지리아에는 서기 7세기경부터 사하라 사막을 근거로 하여 아프리카인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하우사 풀라니 문화권이 형성되게 되었다.  남부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5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까지 원주민들이  생활하였고 그 후로는 카넴 보르누 왕조의 하우사족,풀라니 족,카누리 족이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 했다. 일명 노크 문명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갗추게 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된 왕국이 바로 카넴 보르누 왕국이다. 이 왕국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부족 국가들과의 교역이었다. 카넴 보르누 왕국은  상류층들이 1086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로부터 이슬람문화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삼아서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우사족들의 영토와 차호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약  800년 동안 번성하였다. 14세기  말에 세파와 왕조에 의 다스려지던 카넴 보르누 왕국은 부라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보루 누 지역만 남게 되고 차지하고 있던 니제르강과 베뉴강 대부분을 잃어버린 체 왕국이 축 되었다. 11세기에는 나이지리아 북부지역에 하우사 자치 지구가 건설되었고 나이지리아 지역을 하우사족들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하우사 왕국은 인근의 북부 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였고 하우사족 들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전파된 이슬람교로 인하여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하우사 왕국은 이슬람교를  통치 방식을 채택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 곳은 서부 수단 왕국에 속해 있었고 서부 수단 왕국 중에서도 송하 이와 멜라 왕국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었고 왕들은 무슬림이  되었다. 송하이 왕국의 모하메드 마스키나는 철저한 무슬림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왕이다. 200년 동안 북부지역의 하우사 지역은 송하이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기에 아라비아 문도 전래되었다.

1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북부 나이지리아  전 지역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왕조들과 상류층의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로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이슬람교를 이용하였다. 상류층들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반 국민들에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각  부족간의 유대를 강화 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율법인 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는데 메카 순례로 인하여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는 북부지역 뿐만이 아니라 서부지역의 요루바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요루바 지역은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므로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고 있었으나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에 이슬람교도의 수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요루바족의 문화 유적들은 이집트의 유적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부 해안 지역까지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열대  우림으로 숲이 울창하여 인적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는 남동부지역에는 전파가 되지 못했다. 나이지리아 북부로 이주해서 살게 된 풀라니 족,카누리 족도 17세기 이후에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부터 전파된 이슬람교를 믿으며 왕들도 모두 이슬람 교도가 된다.카크시나와 카노는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이집트의 트리폴리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카노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카노에는 방직과 수직 그리고 가축이 유명했으며 특히 장신용 가죽이 유명하였는데 모로코의 가죽이라고 불리는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사하라 사막 위에 있는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까지 알려지는 특산물이 되었다.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북부 아프리카의 철제 수공품, 유 제품,유럽 산 옷감 등과 물물 교환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카노는 발달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가 북부 아프리카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교통의 발전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보르누 서부지역에 남아서 살고 있었던 하우사족은 인접 국인 수단의 송하이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풀라니 족은 하우사족이 살고 있는 영토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풀라니 족들은 농작이 아닌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풀라니 족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풀라니 대제국을 세우게 되었고 이  제국은 획일적인 중앙 집권적 통치제도를  행하여서 통치를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며 학문을 발전시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통치 질서와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학문을 발전시키고 고유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베뉴강을 경계로 하여 베뉴강 상부에는 풀라니 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니제르강 서남부지역은 루바족이 살게 되는 자연스러운  자연 환경에 의한 경계로 인하여 각자의 왕국을 발전시켜 나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 항해사 헨 리가 최초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의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때 기독교와 함께 기독교 문명,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나이지리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계기로 기니 아만을 통해서 처음에는 약 1,500명의 베냉족을 포르투갈에 노예로 잡아가게 되었다.  베냉왕국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가진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속수 무책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베냉 왕조는 포르투갈에 외교사절을 보내어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5세기 말부터19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의 무역업자와 선교사들은 베 냉을 장악한 이래로 왈리의 일세킬리 왕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세기 이후에 약 300년 동안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선두주자로 악명을 날렸으며 연간 약 1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노예무역은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서인도제도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노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고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나이지리아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인들이 대거 진출해서 노예무역에 참여 하였다. 특히 영국은 16세기 중엽부터 노예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17세기가  되어서는 영국 노예선 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으로 밀어닥치게 되었다. 노예무역업자들은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와 기니 만 해안 주변에 살고 잇는 여러 종족들을 잡아갔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노예 상인들은 더 많은 노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앞 다투어 기니 아만으로 밀려들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영국은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한편 말라리아 예방약인 기니 네가 발견되기 전까지 탐험가 망 고 피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는 노예 해안이라는 속칭 이외에도 백인들의 묘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노예무역금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 정부의 선언이 곧 노예무역의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 선박들은 대서양을 통해서 계속해서 노예를 실어 나르게 되었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항상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감시하였다. 1826년 영국 선박은 나이지리아의 보니 강을 이용해서 내륙 지방까지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영국 선박들은 노예무역이 아닌 야자유,  상아를 거래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과 나이지리아간의 무역량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노예무역은 지속되었고 노예 공급은 아프리카의 족장들과 흑인 노예상인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으나 오래 있지 않아서 노예무역은  완전히 폐지 되었다. 노예무역이 나이지리아인 들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 에게 끼친 나쁜 영향들은 무수히 많으며 종족간의 유대감을 파괴하고  불신을 높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재능까지도 말살시켰고 과거에 노예였었다는 심한 열등감과 피해 의 식을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의 유럽 사회와 아프리카 사회의 교류에도 보이지 않는 장애가 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은 노예제도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제도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400여년동안 문화를 발전시키는 동안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제자리에 머물게 되었다.한편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나이지리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된 지역에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이나 서인도제도에서 요루바족의 문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프니카니즘이라고 한다. 시에라에온의 수도인 프리 타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흑인 2세들은 요루바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1861년 영국은 야자유와 상아 등을  상업무역품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라고스 지역을 합병하였고 영토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나이지리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영국은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니제르강 일대의 권리를 인정 받게 되었다. 1893년에는 니제르강 독점권을 선포하였고 1899년에 영국과 나이지리아의 무역업자들은 죠오지 골리 의 주도로 나이지리아에 설립된 개인 회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영국 정부가 특허권을 인정하는 왕립 니제르 회사를 통해서 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상인과 전통 족장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무역의 권리를 뺏게 되었고 니제르강 유역의 행정과 조약 체결 권,세금 징수관등의 권리를 행사하였고 니제르가 일대의 무역을 약 15년간 계속 독점하게 되었다. 1900년 영국 정부는 왕립 니제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라가도 총독 아래에 있던 전통적인 왕족과 족장들이 왕립 니제르 회사의 역할을 담당하여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도록 교묘하게 통치하는 이른바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영국은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가가  구분하여 선포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보호령에 감시자를 파견하였다. 프레드릭루가드는 나이지리아의 니제르강 일대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남부 해안지대인 비아푸라만 베냉만에서의 나이지리아  무역활동을 감시하였고 사법,행정,조세 권을 가진 영국 영사를 나이지리아에 파견하였으며 영사가 관할하는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점차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으로 보호령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비아프라만과 베냉만에서의 보호령은 남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행정을  식민지 중앙정부구조와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식민지 중앙정부구조로는 총독과 부총독,참모,지방 관료, 군인  ,경찰들로 구성하였고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는 부족장들로 구성하였다.1906년 영국은 수도인 라고스에 보호령을 선포하고 라고스 보호령과 남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을 합병하여 라고스 식민지를 통합하게 된다. 1914년에는 북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과 남부 나이지리아의 식민 보호령을 통합하여서  영국의 식민 보호령인 나이지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 영국 총독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공식적인 식민지이며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나이지리아의 전역을 빼앗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라고스에 총독으로 있던 올드 카라바 영사와 특허권을 가진 무역회사의 도 이었다.

1922년에 영국 식민 정부는 신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 회의가 창설되었으며 나이지리아인 10명을 포함한 46명의 의 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총독인 프레드릭 루가드에 의해 새로운 통치 방법인 이중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중  위임 통치는 나이지리아인들과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영국인들간의 문화와 지식의 교류를 통하여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과 평등성을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사린다는 취지로 나이지리아인들의 전통적인 관습과 활양식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허울 좋은 제도 였다. 이중 위임 통치 방식은 나이지리아를 영국이 통치하면서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의무 수행을 위한 방법은 두가  지가 있다. 첫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발전을 위하여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통치 방식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나이지리아에서 착취를 할 때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채택한 통치 방식으로 영국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 의식을 피하고자 하는 저의가 깔려있으며 사기가 저하된  부족장들의 권위를 회복시켜서 이용하자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 투자될 관리 운영비와 인건비로 충당할 세금을  걷어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부족장들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세금 징수를 강화하기 위하여 야자유,코코아,면화,고무 등 환금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고 적극적으로 수출하도록 하였다. 영국은 간접 통치 방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족장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효과적인 세무 방식을 도입하였다. 족장들의 권한은 모든 정책과  통치지역 내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이지리아인들 의 의식 속에 토지란 전통적으로 부족 전체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으로 영국 식민 정부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화정책을 통하여 부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영국인들의 토지 소유와 거주지 확장이  억제되었고 영 정부 차원의 투자가 아니면 개인이나 단체의 투자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경제,정치와 교육 등 전반적인 사화발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민족주의 의식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1946년 리차드 헌법이 영국 식민 정부에 의해 공포되었고 리차드 헌법에 의해서 나이지리아에 대하여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법 대표 의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나이지리아인들은  리차드 헌법을 반대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대표부를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리차드 헌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50년 맥퍼슨 헌법에 의해서 입법기관을 나이지리아인들로 구성한 입법 대표 의회를  만들고 중앙집행기관으로 내각을 만들게 되었다. 1951년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북부 나이지리아와 남부 나이지리아를 합쳐서 식민지정책을 펴 나가게 되었다. 한편 맥퍼슨 헌법에 의해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나이지리아 국민  평의회,급진파,북부 국민 회의 등 3개의 자치구를 확립하게 되었다.

1954년에 제정된 리텔톤 헌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연방제 형식을 취하고 지방 정부와 의회는 연방 정부의 승인 아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이지리아에 사법관도 설치하였다.1957년 런던  회의 결과에  따라서 나이지리아  동서부지역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1957년 9월에는 벨레와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수상으로  지명되었다. 나이지리아는 3개의 정당을 규합하여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였고 1958년 런던 제헌회의 의 결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 10월 1일 나이지리아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카메룬의 북부지방을 병합하여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 연방에 속한 상태로  독립 국가가 되었고 구제연합에도 가입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960년에 벨레와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1963년 NCNC의 아지키웨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됨으로써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인 제1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행정구제도는 4개 주에서 모두 12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나이지리아는 NCNC와 AG,NPG 등 3대 정당간의 다툼,긴장  무질서상태로 인해 혼란한 정국은 계속된다.

1966년에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북부의  일부지방을 장악하고 연방 정부의  바레와 수상 및 서부, 북부지역의 수상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이론시 장군에 의해 진압된다. 한편 북부에서는 하우사족과 이 보족간에 무력 충돌이  생겨 옛 행정구인 북부지역에서만도 수천명의 이 보족이 하우사족에 의해 살해되게 되었고 수많은 이보족들이  북부지역에서 도망가게 되었다. 이론시 장군(동부 이보족 출신)은 정권을 이양 받아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헌법의 일부를 중단시키고 정당들의 활동도 금지시켰으며 이론시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권을 수립하게 되어 제1차 군사정부가 탄생되게  되었다. 문민 정부 이후에 13년 동안의 군사 통치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게 되었다.

1966년 7월 군부에서 제2차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북부지역의 소요 사태 책임을 이론시 장군에게 돌리고 쿠데타 세력들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야쿤바 고원 중령(베뉴 프라트주 소속 부족 출신)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국민 의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과 행정 전권을 최고 군사 평의회,연방 집행 평의회로 된 군사정부에 일임한다고 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고원정권은 특사령을 발표하여 제1차 구데타에 의해 구금되었던 주요 정치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1967년 고원 장군은 동부와 서부,북부의 각 지구간의 단결을  막을 목적으로 나이지리아 연방을 12개 주로 계속 유지하였으나 이조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7년 4월에 동부지역의 군정 장관인 오주크와 장군은 동부 나이지리아의 자문 회의의 결정에  따라 [비아프라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의 연방에서 분리하게  된다.비아프라 독립을 선언한 후 나이지리아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비아프라 독립 선언 후 연방 정부와 비아프라 자치구는 이로부터 2년 반간의 내란이  시작되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미국과 소련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나이지리아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비아프라 내전은  국제 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00만인에 이르는 아사자를 내게 하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 되었다.

1970년 1월 오주크와 장군은 비아프라 정권을 에피옹 소장에게 이양하였고 오주크와 장군은 아이보리코스트로 망명하였다. 연방 정부군에  의해 비아프라군은 비아프라  지역을 뺏기게 되었고 비아프라 정권은 연방 정부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내전은 2년 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고원 정부는 1970년 4월에 나이지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제2차 국가개발 4개 년 계획을 계속해서 실시하였으며 국내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3년 이후 나이지리아는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석유개발을 하게 되었고 수출 증가로  인해서 국가 수입이 증대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수입으로 인해서 경제 부흥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81년 까지 계속적인 국가개발정책을 진행시키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경제력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3년 12월 말에 제 5차 군부무혈쿠데타가 일어나고 샤가리 대통령의 민간정부는 붕괴하게 된다. 군사정권은 부하리 소장을 의장으로 하고 19명으로 구성된 최고 군사회의를 설치하고 최고 통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부하리 군사정부는 샤가리 민간정부 말기에 만연했던 정치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 부흥을 꾀하며 사회 모든 기관의 기반을 재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서 정책을 펴 나갔다. 부하리 정권은 노동 시장을 보호하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중장기 계획으로 대외 채무의 반환을 행하는 등 노력을 하여 국제수지의 흑자를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석유의 지나친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오히려 경기가 악화되었고 국제적인 석유가격 폭락 율로 인하여 인플레,실업률,산업계 불황이 계속되었으며  경제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하리 군사 정권은 언론의 통제 등 인권 억압적인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게 일게 되었다.

1985년 8월 제6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부하리의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신 군사 정권은 전 육군 참모총장인 바방가다를 대통령 겸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고 28명의 군사 통치  위원회를 설치 통치기관으로 삼는다. 바방가다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관시키는 과도기적인 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방가다 정권은 부하리 정권의 지도력  상실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 부족,지도층의 권력남용,경제개혁정책 실패 등 부하리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단정하였으며 정권 확립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경제를 재건하여 경제적 낭비를 없애고 정과 부패척결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계획보다 앞당긴 1992년에 민정 이관을  목표로 해 1987년에 [민정  이관 프로그램]을 발표하게 되었다. 부하리 정권은 부패한 문민 정권의 정치적 전통과 결별하기 위하여 공의 경험이 있는 정치가와 정치 경험이 있는 군인의 정치활동의 참여와  과거에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한편 1991년에 정치활동의 규제조치를 해제하였다. 1990년 4월에 북부지역의 군부세력 들이 부 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10시간 만에 진압되었고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쿠데타 가담자 69명이 모두 총살당하게 됨으로써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93년 8월에 하기로  한 민정이양계획을 바방가다 대통령은 3차례나 연기하였고 민정이관을  완료시킨 후에 퇴임하겠다고 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3년 6월 12일 양대 정당 대선을 실시하였으나 바방기다 대통령이 아비올라 후보에게 패배하자 선거 부정을 이유로 무효화 시킨다.  국내외의 강한 반발 여론과 압력에 의해 바방기다 대통령을 1993년 6월에 사임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군사정부가 민간정부에 이양한 것은 1979년 오바산죠 군사정부가 선경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샤가리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이 최초이다. 바방기다 대통령은 스스로 민간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의 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1993년 1월부터 과도내각을 이어 온 쇼네 칸을 수반으로 바방기다 대통령이 물러난 후 임시국민정부가 출범하였다.1993년 11월에 아바차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주도하여 쇼네 칸이 이끄는 임시국민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하게 된다. 기존의 행정과 입법기능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정당활동도 금지시킨다. 군부가 국정 운영을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아바차 장군은 PRC(임시통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지사 전원을   군부 인사로 대체   하였다. 1994년 NCCC(헌법 회의 위원회)를 발족시켜  제1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정치 일정은 제일 먼저 기초 단위인 선거인단을 선출할 예정이고 헌법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헌법 회의를 출범하며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정부 심의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1993년 대선에서 승리한 아비올라는 자신이 정통성 있는  대령이라고 1994년 6월에 선언하였으나 아바차  정권에 의해 강제 구금된다. 1994년에 석유가스노조는 아비올라의  석방을 촉구하며 파업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995년에  나이지리아의 아비올라 군사정권은 정치활동의 금지를 해제하였고 제2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나이지리아의 헌정복귀는 아직까지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5.인구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12,628만 명이다.(92년 통계)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다.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아직 인력을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여 실업률이  높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성장률은 3.3%이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수명은  50세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인 53세보다 낮으며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의 지리상 위치는 대륙 횡단의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여러 민족과 문화를 접촉할 수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서 살게 되었고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전 세계에서 9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는 인력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약 250개의 부족이 살고 있으며 각 부족들은 고유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10대 부족은 나이지리아의 약 250개의 부족  중에서 90%을 차지하고 있다.  즉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9/10라고 보면 된다. 10대 부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가진 부족을 나이지리아의 3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3대 부족들에는 하우사 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들어가게 된다. 3대 부족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65%이고 약 250개 부족은 35%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교적 살기 편한 북부지역의 카노 남부지역의 라고스에 집중되어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65%가 거주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인구 조사를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몇몇 부족들이 인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출생률이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인구 조사에 정확도와 신뢰도 등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정확한 인구 추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6.민족
나이지리아는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나이지리아에는 현재 약250개의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3대 부족이 있는데 하우사/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하였는데 영국이 지배하고 있을 때 나이지리아를 연방 공화제로 통치하게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3대 부 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경계선을 삼아서  통치하였다. 북부지역은 하우사/풀라니족,남서부 지역은 요루바족, 남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3대 종족의 비율은 나이지리아 전체 부족의 약 65%이고 기타 250여 종족이 35%를 차지하고 있다.

3대 부족 외에 더 작게 세분하면 10대 부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근거는 언어이다. 10대 부족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쓰고 있다. 3대 어족에 해당되는 하우사/풀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있고 그 밖에 카누리족,티브족,에도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이 있고 이들 부족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른다. 부족간에는 서로 강한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지역 안에서 잦은 충돌이 있다. 그러나 북부지역과 남서부지역, 남동부지역에는 각각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부족이 있으므로 소수 부족들은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각 부족이  고유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족에 대한 우월감이 높은 편이다. 나이지리아의 정, 사회에 안정을 찾지 못하는데 대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권 대부분 사람들은 3대 부족 중에서도 최대의 부족인 하우사/풀라니족의 출신이다.하우사/풀라니족들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서 북부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요루바족은 나이지리아의 남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요루바족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의 비율이 반반이다. 나이지리아에 이슬람교가 울창한 삼림지대인  지역적 요인으로 인하여 빨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동부지역에서 주로 살고 있으며 1967년 비아프라 내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북부지역의 하우사 풀라니족의 이보족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게 되자 마침내 비아프라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예전부터 포루노  왕국과 풀라니 대제국, 하우사 왕국, 베냉 왕국, 오요 왕국등 각 부족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에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단결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나이지리아는  각 주가 부족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각 부족들을 잘  화합하는 것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며 그로 인하여 정치와  경제,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7.언어
나이지리아의 언어는 방언을 포함하여 250여 종의 언어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나이지리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교육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각 종족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와  상거래에서는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진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고유 언어에 종족의 색채를 가미한 언어로써 상거래가 활발한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영어에서  언어를 많이 차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식민통치 때부터 계속해서 하우사어가  공식,비공식 언어로 사용되어 졌다. 북부지역에서는 하우사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수 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포기하고 강제적으로 하우사어를 써야 했다. 하우사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남서부는 요루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으로 대부분 요루바인족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는 데 이 지역은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으로 주로 이보족의 언어가  사용되어져 왔으나 현재는 정치와 경제  변화에 따라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통 영어가  아니고 그들의 고유언어와 혼합되어져 나이지리아화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는 지역마다 영어의 악센트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이지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를 실용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상호간에 사용하는 영어를 독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쓰기도 한다. 영어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다른 언어보다 간단하게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지역마다 사용되어 지는 언어는 가가 다르다고 하였는데 크게 세 개의 언어군으로 나눌 수가 있다.먼저 아프로-아시아틱 언어군과 니제르-코르도 파니안 언어군,닐로-사하란 언어군으로 나누게 된다.아프로-아시아틱 언어는  차드어인대 드어는 북부지역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우사어가 바로 여기에 속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인의 25%가 사용하는 제1의 언어군이고 나이지리아인의 10%는 아프로-아시아틱언어를 제2의 언어군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로 닐로-사하란어군에 포함되는  언어는 사하란어, 송하이어 자르마, 덴디어 등이 있다. 사하란어, 송하이어는 나이지리아의 다수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주로 북동쪽의 카누리족이 사용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니제르-코르도파니안 언어군은 150여 개의 언어가 베냉어 , 콩고어, 이비비오어, 아나앙어, 티브어에 속하고 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1%이다.또 기타 어족으로 크와어가 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50여 개의 종족이 사용하고 있다.크와어족에는 요루바족과 이보족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밖에 구르어, 만데어, 서대서양어가 있다.


8.종교
나이지리아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기독교가 약 30%를 차지하며 부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10%을 차지한다.나이지리아에는 국교가  없다. 북부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데 하우사족이 대부분이다.한편  요루바족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각각 50%씩 이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충돌을 일으키키도 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다. 타 지역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도층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로 약 95%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져 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 보아서  나이지리아에 종교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11세기 하우사 왕조 EO에 이슬람 문화와 함께 전파되었고  이때 아라비아 문자도 전래되었다. 이슬람교의 다수를  이루는 종파는 수니파이고  남서부의 이슬람교도인들은 인도에서 발생된 수니파가 아니면 이단이라고생각하는  아흐마디야파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교의 주종을 이루는 수니파는 집회가 특색이 있어서 집회에 의해 구별할 수 있도록 차림새와 의식을 갖추게 된다. 기독교는 예전에 비해  급속도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선교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수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나이지리아 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도 신자수를 증가 시킨 요인이 되었다.나이지리아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융합 되어 있다.  19세기에 나이지리아에 전파된 기독교는  분파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의 생활과  도시 생활을 반영하여 신앙의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교리, 의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토속 신앙과 융합하여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으로 토속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믿음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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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o 공식국명 : 수단공화국 (The Republic of the Sudan)

o 수 도 : 카르툼(KHARTOUM)

o 위 치 :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이집트, 이디오피아,  챠드, 콩고, 우간다, 리비아, 에리트리
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케냐 등과 접경. (인접국 9개국)

o 기 후 : 북부 - 사막지대 (섭씨 40도이상 건조)  

중부 - 사바나지대 (우기와 건기구분, 일교차 심함)

남부 - 열대우림지대 (우기 8개월, 강우량 2천미리)

* 카르툼 지역 기후 - 최고 : 6월 (섭씨 26도 - 45도)

최저 : 1월 (섭씨 16도 - 32도)

4월 - 10월 : 모랫바람(Habub) 계절
  
수도 카르툼의 기후는 일년 내내 높은 편이고  대개 11월∼3월, 4월∼6월, 7월∼8월, 9월∼10월의 4가지로 나눠진다. 11월∼3월 사이에는 비교적 서늘하고, 연중 가장 참고 견디기  쉬운 시기로 비는 내리지 않고 공기는 건조하며 오히려 밤에는 춥게 느껴질 정도이다. 3월 하순에서 4월에 걸쳐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연중 가장 더운 계절이 되는데 이때 옥외의  기온은 섭씨 50℃ 이상에 달한다. 이  시기에 하부부(HABOOBS)라고 불리는 모래먼지폭풍이 시 하는데 5월∼6월이 가장 많고 7월∼8월까지  이어진다. 여러 종류의 하부부(HABOOBS)가 있는데 맹렬한 것은  그리 자주 오지는 않지만,  소규모의 하부부(HABOOBS)는 빈번한 편이다.

하부부(HABOOBS)가 습격해오고 있는 사이에는 모래먼지가 강풍으로 난무하고, 낮에도 어둠침침해지며 시계(視界)도 극도로 좁아진다. 물론 집은 거의 꼭 문을 닫아두어야 하고 워터쿨러는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실온은 더욱더 상승한다. 이렇게 문을 닫아두어도 모래먼지는 공기와 같이 실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가장 불쾌한  시기가 된다. 그러나 하부부(HABOOBS) 후에는 비가 이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온도도 낮아지고 지내기 쉬워진다. 7월에서 8월은 우기이지만 내릴 때에는 스콜같이 내리는 편이라 우기라고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우 는 대개 9월 가량까지 이어지고 그후  9월부터 10월까지는 맑은 하늘이 이어지기 이전의 혹서시기이다. 현지인중에는 이 시기가 5월에서 7월 사이보다 더워서 불쾌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북부에서는 하부부(HABOOBS)가 자주  발생하며, 남부의 大저습지대(사드)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우계가 8∼9개월간 이어진다.


o 면 적 : 2,505,813 평방 킬로미터 (한반도 면적의 11.3배,  아프리카 대륙의 8.3%로 아프리카 최대)  

작열하는 사막의 나라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집트,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자이르, 중앙아프리카, 챠드 및 리비아의 근접한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면적 2,505,813㎢의 아프리카  최대 나라로 한반도의 약  11.4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북위 4°에서 22°에 이르는 남북 약 2,250㎞, 동서 약  1,930㎞의 지역을 점유하며 그 지형은 대개 표고 50m 이하의 평탄한 지형이다. 1994년  1월 1일부로 전국을 25개의 주로 분할한 수단은 全국토의 약 12%가 농지이며 18%가 삼림이 차지하고 있다. 나라의 대부분은 대평원이고 서쪽은 나일강과 콩고강의 분수령까지, 동쪽은  홍해연안의 구릉지대까지 넓게 퍼져있다. 광대한 사막과 함께 지리상 가장 중요한 것은 수단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총길이 약 6,700㎞의 나일강이고, 우간다의 빅토리아호에서 출발한 백나일강과  에티오피아의 타나호에서 출발한 청나일강이 카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강의 본류가 되고, 이집트를 지나 먼 지중해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 지세  
수단은 우간다의 빅토리아호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타나호를 출발하여 서북상하는 청나일의 양대강이 수단 중앙부의  카르툼에서 합류하고, 이집트의 국경까지 북상하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모든 국가기능이 발달하고 있다. 수단은 기후상 이집트와의 국경에서부터 카르툼까지의 북부 즉, 북위  22°에서 16°, 북위 16°에서 10°까지의  중부 및 북위 10° 이남의 남부지방으로 나눠진다. 북부는 주로 사막지역으로 되어 있고,  나일강 및 그 지류에 닿아 겨우 발달한 녹지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른 한편 카르툼 이남의 중앙부에서는 백·청 양나일강 사이의 삼각지대에 관개농업이 집중 발달하고 카르툼을 중심으로 수단에서 가장 진보한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  관개지대는 게지라 (섬이라는 뜻) 지역으로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센나르 댐으로 관개(灌漑)하여 수단의 외화소득의 반정도를 점유하는 면화를 다량으로 생산하며  그 외에도 주된 농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남부는 광대한 늪지역과 아프리카 특 의 사반나 지대로 이뤄지며 동아프리카와 콩고에 보이는 것 같은 열대성 삼림이 있어 농경에는 적합하지만 아직 미개발단계이다.

나일강의 동측에서 부분적으로 강이 유입되는 굴곡부를 따라 둘러싼 사막을 누비아  사막이라 부르며  서 은   리비아 사막이고 중앙사하라로   이어지고 있다. 서부의  산악지대에는 3,000M를 넘는 고산도 있지만 대부분은 표고 350∼500M의 모래언덕이고, 특별히 현저한 지형상의 특징은 없다. 또 우간다 및 에티오피아의 국경 가까이에 동물보호지역이 있 , 불충분한 설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구미에서의 사파리 여행자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수단에는 사자, 표범, 코끼리, 기린, 얼룩말, 하마, 침팬치 등의 야생동물과 수많은 종류의 영양이 살고 있으며 북위 12°이남지역에는 체체파리가 서식하고 있다. 백나일 직선화(直線化)때문에 죤글레이 운하의 사업은 1986년에 중지되었다. 오히려 이 운하의 완성에 따라 스토 평야 세계 최대의 늪지는 바싹 말라가고 야생동물은 절멸, 사막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북부의 사막은 점점 중앙의 목초지와 남부의 열대 관목으로 바뀌고 있으며, 나일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다. 1985이후 1,500,000명이상이 전쟁 계획적인 대량학살, 기근으로 사망,5,000,000명이상의 남부수단인이 국내에서 거주지를 상실하고  난민이 되었으며, 다른 200,000명도 주변국가에서 남민으로  거주하고 있다. 대도시권은 1,676,000이지만 여기에 대략 2,800,000의 주로 남부 난민이 추가되었고 도시화는 30%

o 인 구 : 3.071만명(96년 EIU 자료, 평균수명 57세)  년 증가율 2.9%
  
수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6년 추정인구는 3천만명이고 인구증가율은  2.9%, 인구밀도는 1㎢당 7.1명이다. 그러나 최근의 수단 주변의 국제정세의 악화 및 남부내전에 따른  다수의 난민이 유입하고, 또 시로의 인구집중이 현저해졌지만  인구의 실태 파악은 충분하지 않다. 1991년의 발표에 의하면 인구는  27,220,000명이며 인구증가율도 3.0%로 증가하였다. 북부와 중앙부에 사는 아랍화된 사람들이 약 40%이고, 소수파인  누비아민족(8%)은 북 의 나일강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남부 수단에 사는 딩카, 훈지, 누에르, 실루크  등은 나일·사하라어를 말하고 대다수를 점유하는 북부의 아랍어족과는 관습도  꽤 틀리다. 10세 이하의 인구가 약 30%이상을 점유하고, 인구의 약 20%가 도시에  살고 다. 또 국민의 75%는 아랍계로 북부에 살고 있으며  그외 25%는 흑인계로 남부에  거주하고 있고 유목민 생활을  하는 국민이 200만명에 달하고 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이 높으며 전체인구의 2/5이상이 15세 이하일 정도로 평균연령이 낮다. 또 출생  , 사망률이 높은 반면 평균기대수명은 50세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o 주요도시 : Port Sudan(항구), Wad  Medani, Kassala, Juba,  Wau,  Malakal, El  Obeid,  El Fasher, Dongola

o 주요민족 : 아랍계(70%),  Dinka(12%), Bija(7%), 서부아프리카인(6%) 등  약 597개 부족 (주요종족 19)

인종은 아랍계가 약 75%를 차지하고 흑인계는 약 25%이다. 수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흑인계는 거의 남부에 집중하고 있지만 세분하면 약 500개의 부족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수단 중부의 코르도환주 누비아 산지에 사는 누비아족도 이러한 흑인 부족의 하나로서 아랍인의 노예사냥을 피해 사막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누비아 산지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누비아족은 총 50만 정도이지만 이 부족자체에도 50 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지만 아직 전통적  종교의 힘이 강하다. 남성적인 이들의 부족특성이 이들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남성이 존경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투기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레슬링은 누비아족에게 있어서는 국기(國技)와 같다. 레슬링 시합의 승자는 부족 전원에게 상을 받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얻을 수 있다. 또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것이 딩카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인종중의  하나이다. 북 및 인구가 높은 달훌지역에서는 비아랍그룹이 몇개 있는데 이슬람식의 복장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혐오받기도 하고,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형을 받기도 한다.인종은 아랍계가 약 75%를 차지하고 흑인계는 약  25%이다. 수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흑인계는 거의 남부에 집중하고 있지만 세분하면  약 500개의 부족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수단 중부의 코르도환주 누비아 산지에 사는 누비아족도  이러한 흑인 부족의 하나로서 아랍인의 노예사냥을 피해 사막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누비아 산지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누비아족은 총 50만 정도이지만 이 부족자체에도 50 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지만 아직 전통적  종교의 힘이 강하다. 남성적인 이들의 부족특성이 이들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남성이 존경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투기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레슬링은 누비아족에게 있어서는 국기(國技)와 같다. 레슬링 시합의 승자는 부족 전원에게 상을 받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얻을 수 있다. 또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것이 딩카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인종중의  하나이다. 북 및 인구가 높은 달훌지역에서는 비아랍그룹이 몇개 있는데 이슬람식의 복장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혐오받기도 하고,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형을 받기도 한다.


o 주요언어 : 아랍어(공용), 영어 등 115개 언어, 방언 사용중
수단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라비아어로서 공용어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부와 중부에서만 주요 언어로 쓰이고 있다. 남부에서는 1956년까지 영국통치의 잔재 때문에 영어가 주요 언어로 인정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도시부에 있어서는 영어를 쓰는  사람도 많다. 나일·사하 어(딩카語와 누에르語)와 병행하고 있으며 135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주요한 언어만도 30종을 넘는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딩카어, 누에르어, 실루크어 등이 사용되고 있고, 최근 아라비아어 교육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통용 지는 않고 있다. 북부의 나일강 유역에서는 소수부족이 지금도 누비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o 종 교  
종교에 대해서는 1973년 4월 발효한 항구헌법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북부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 순니파(약 70% 이상)이고, 도시부와 누비아산지에는 약간의 크리스트교 교도가 있다. 남부에서는 90%가 크리스트 교도이고, 나머지는 전통적인  각 부족의 정령을 숭배하는 원시종교를 믿고 있다. 수단의 이슬람 교도는 안사르, 카도리아, 정통 카도리아, 베다위아, 사마니아, 샤도리아 또는 마크도비아, 이도리시아, 티가니아 등의 각파로 나눠지고 있지만 영웅 마하디를 중심으로 한  안사르파는 수단의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막대한 세력을 자기고 있으며 특히 서부에 많고 일찍이 1969년 5월 군사혁명정권성립전까지는 운마당(黨)으로서 유력한 정치세력이었다. 현재에도 사딕·알·마하디 수상을 지도자로서 유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1972년 평화조약과 주로 기독교인과 전통주의자로 구성된 남부인 들의 극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1983년 회교 공화국임을 선포함.  회교도와 비 회교도에게 공히  적용하는 위압적인 회교법적용이 전쟁을 재발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임. 비 회교도들에 대한 경솔하고 강압적인 회교화 시도가 정치적 반란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은폐되었다.  온건주의 회교도 집단에 대한 압제 또한 심함.

회교70% 전통종교9.9% 무종교1.1% 기독교19%(개신교7% 카톨릭교12%)-수치는 추정치임

1) 수단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회교 혁명의 주도자들이었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 아랍의 소수집단은 이 사실을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회교 혁명으로 100만이 죽고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나라는 분열되었다. 생활의 고통과 파괴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 수단 북부에는 강력한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8세기에서 15세기사이에 회교화 되었다. 현재 회교화는 비회교지역인 남부까지 확장되고 있다.

2) 남부지역 사람들과 온건한  회교도들의 고통은 외부세계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엄청난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지역으로부터 외국인들이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위기가 대중매체를 장악해 버렸다. 대부분은 국제 구제 기관들은 수천명을 죽음에서 구해내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애썼지만 심한 방해를 받거나 추방을 당했다.

3) 교회에 대한 핍박이 지난 40년간 있었는데 1985년 이후에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적인 시도가 극에 달했다. 주일 예배시에  폭탄을 던지고 교회와 기독교인이 있는 마을을 파괴하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량학살이 자행됐다. 목사와 교회지도자를 죽이고 하르툼근처의 사막지역으로 추방당한 난민들이 개종하면 식량을 주겠다는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특별히  누바 산악지역에서 그 핍박은 심각했고 회교도들은 누바인들에 대해 지하드, 즉 성전을 선포했다. 전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영토는 아랍인들에게 넘어갔다.

4) 교회가 고통가운데 성장해 왔다. 수단에  있는 카톨릭, 성공회 그리스도교회(누바지역)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거대한 인국 이동이 관습과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사람들을 다양한 미전도 종족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회교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명목상의 기독교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누에르(장로교), 마바안, 우두크(수단내지교회), 딘카(감독교회), 토토샤, 아콜리(아프리카내지교회), 누바부족(수단그리스도교회)가운데 의미있는  회심집단이 있었다. 정치적 차이와 유혈사태는 부족의 노선을 따라 남부지역사람들을 심하게 분열시켰다.

5)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이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외국인  사역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64년 선교사들은 남부에서 추방당했으며, 하르툼지역과  누바지역 그리고 에티오피아난민거주지에서 제한된 사역만이 허락되었다. 1990년이후 추방되거나  비자 신청이 거절되는 일이 늘어났다.

o 정부형태 : 대통령제 연방 (26개 STATE, 66개 PROVINCE)

o 의 회 : 96. 3월 총선으로 연방의회 구성

o 독 립 일 : 1956. 1. 1.

o 유엔가입일 : 56. 11. 12

o 국 경 일 : 1. 1. 독립기념일 ,    6. 30. 혁명기념일

o 화폐단위 : 수단파운드 , 1$ = Ls. 2,572 (99.10.31현재, 단일변동 환율제임)

  수단디나르(Dinar), 1$   = SD.   257.2  (99.8.1부터  주재국  모든  은행의  화폐단위를 Dinar로 변경)
  * 현재는 일반 시중은 병용하고 있음.

o 회계 연도 : 1.1 부터 12.31까지

o 도량형 : 미터법 널리 사용

o 토지면적 : Feddan을 사용(1 Feddan = 1,270 평)

o 근무시간 : 정부기관( 카르툼) 토-목 08:00-14:00

   정부기관(기타기역) 토-목 07:30-14:00

  은행 토 -목 08:30 - 12:00

  상점 08:00-14:00,   18:00-20:00

o 국 기 : 수단국기는 1976년도에 새로 제정된 국기법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각 색깔의 의미는 아래와 같음.

적 : 투쟁, 혁명
흑 : 검은대륙의 국가
백 : 평화
녹 : 농업

o 국가 : 수단 국가는 독립년도인 1956년에 만들어짐.

   - 곡명 : 국가 찬양

   - 가사 내용 : 우리는  신의병사, 국가의 병사  국가을 위해  이목숨 바치리 고난속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모든 것을 다바쳐 영광을 챙취하리  이땅은 우리의땅 영원히 번영하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토를 수호하리

   - 주재국 약사

BC2150 - AD350 : PHARAOH 전국시대(이집트화)

AD 350 - 1504 : NUBIA 기독교 왕조시대

1504 - 1821 : FUNJ  SULTAN국

1821 - 1885 : 이집트를 정복한 오토만 터키계의 MUHAMMAD  ALI의 정복으로 이집트의 1개주로 전락하여 OTTOMAN 제국의 이집트총독치하에 들어감.

1885 : MUHAMMAD AHMED ABDULLA 는 스스로를 MAHDI (회교 구세주)라 선언, 오토만터키에 반대하고 이슬람의 개혁투쟁세력을 규합 종교적 폭동을 일으킴.

1889 : 이집트를 정복한 영국의 이집트군과 함께 수단정벌 영-이집트간 수단 공동통치 협정을 맺고 실질적으로 영국식민치하에 들어감.

1924 : 영국 식민통치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반발로 수단총독 살해사건이 발생.  영국은 저항운동이 극심한 북부수단에 대해서는 NATIVE   ADMINISTRATION제를 도입.   남부수단에 대해서는  SOUTHERN POLICY를 채택하여 영어, 토착어 장려 및 기독교포교를  강화함으로써 남북부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관계를 단절시켜 상호 괴리를 심화.

1956. 1. 1 : 영국과 이집트 승인하에 수단 독립성취, 그러나 영국 식민정책 결과로 남북부간 지역대립 및 다수 정당 난립으로 혼란계속.

1958.11.17 : IBRAHIM ABBOUD 장군 무혈 쿠테타로 군사 정권수립. 군부내 마찰 및 분열로 정국불안.

1969. 5.25 : GAAFAR MUHAMMED NIMEIRI 군사혁명 신정부는 수단 사회주의 선언, 국호를 수단 민주공화국으로 개칭, 구정치인 및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 단행, 외국인  자산은행을 국유화하고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의 대공산권 의존도를 급속히 높임.

1972. 1 : 공산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좌익 장교단 쿠테타음모 분쇄) 총선에서 니메이리대통령 취임, 수단 사회주의연맹(SSU) 창립 및 단일정당제채택.

1985. 4. 6 : 니메이리 미국방문중 소수 군사령관에 의한 군사 쿠테타 성공,   니메이리 대통령 축출, 과도 군사위원회 설치

1986. 5. 6 : SADIG AL MAHDI 민간연립정부 수립

1989. 6. 30 : AL BASHIR 준장에 의한 군사 쿠테타 성공 (헌법정지, 국회 및 정당의 해산, 언론통제)

1991. 1. 1 : 회교율법 SHARIA LAW 실시 (남부 3개주는 제외)

1993. 8.18 : 미국정부,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양국관계 극도로 악화

1993.10.16 : 혁명위원회 해체, OMER HASSAN AL BASHIR 혁명위원장겸  수상을 수단공화국 대통령으로 임명

1994. 1.13 : 행정구역 9개주를 26개 주로 재분할

1994. 2.14 : 남부출신 기독교인 GEORGE KONGOR AROP을  제2부통령으로 임명.

1994.  3.17 ; 수단남부문제 관련 IGAD 주선 제1차 나이로비회담(남부지역 난민구조 소위원회설치 및 SAFE HAVEN 지역선포 합의)

1994. 5.14 : 남부문제해결을 위한 평화분위기 조성목적으로 JUBA 평화회의 개최

1994. 5.16 : 수단남부문제 관련 제2차 나이로비회담(합의실패)

1994. 7.19 : 수단남부문제 관련 제3차 나이로비회담(합의실패)

1994. 9.27 : 대화분위기 조성을 위한 전담기구인 HIGH COUNCIL FOR PEACE 창설

1994. 10. 8 : 국제민간친선평의회주최 국제종교회의 개최(30개국참가)

1995. 3.30-4.2 : 제3차 민간 아랍. 이스람 회의 개최 (85개국 참가)

1995. 6.26 : 무바락  에집트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아디스아바바) 발생으로 수단과 이집트 및 이디오피아간의 관계 악화

1996. 1.31 : UN안보리 수단 규탄 결의 (1044호) 채택 (UN과 OAU헌장에 따라  테러지원활동 중지 등)

1996. 3.6-17 : 대통령 , 국회의원 선거(3.20. 당선자 공포)

1996.  4.26 : UN안보리 결의 1054호 채택 (외교공관 및 영사관 인원축소 및 여행제한, 수단정부 고위관리 및 수단군 요원에 대한 입국 또는 통과 제한)

1996. 8.16 : UN안보리 결의 1070호 채택 (안보리 결의 1044호 및 1054호 이행치 않을 경우
수단항공의 국제선 운항 금지)

1996. 12.10 : Sadiq Al Mahdi 전수상, 에리트리아로 피신

1997. 4.21 : Khartoum 평화협정 서명 (수단헌법체제, 법적권리와 자유보장,  국민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4년간 과도기간 설정)

1997.  6.10 : 전야당 DUP 사무총장이며 반정부 인사인 Al Hindi (전의장)귀국

1997. 7.8-9 : 케냐 IGAD 정상회담에서 94년 원칙선언을 토의, 기초를 채택

1997.  8.30 : 남아공  평화회담, Mandela 남아공  대통령 주선으로 Al  Bashir 수단대통령, Mugabe 짐바브웨 대통령, Museveni 우간다 대통령 등 4자회담 개최, 수단-우간다 관계 및 수단남부문제 토의 (Garang불참)  

1997.10.29-11.11 : 나이로비 평화회담 : SPLM/A는 연방국 (Confederation) 및 2년간 과도기간 설정을 제의한 반면 수단정부는 연방제 (Federation)을 제의하였으나, 98.4월 재회담키로하고 회담 종결

1999.1.1 : 헌법개정과 정치 결사법 실시로 복수정당 등록 개시 및 총선을 통한 새 민주국회 계획 발표.

1999. 5.22 : Gaafar Muhammed Nimeiri 전  대통령 귀국, 인민노동세력동맹이라는 정당 결성.

1999.7.19-24 : 나이로비 평화회담. 사무국 설치등에 합의함. 성과없이 종료.

1999. 8.5 수단 정부, 반군측에 대해 99. 10.15까지 일방적 휴전 선언.


- 아국과의 관계

1976.  4.21 : 영사관계 수립, 아국 총영사관 개설

1977.  4.13 :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대사관으로 승격

1990. 11 : 서울 상주 수단 대사관 개설

1998. 9 : 채수동 대사(8대) 부임


- 협정체결 현황

무역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 78. 6.27 발효

문화 협정 : 79. 10.14 발효

항공 협정 : 81년 가서명, 91년 재차 가서명



2. 역사


고대와 중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당시 수단에 구석기시대 사람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역사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의 수단 북부는 누비아라고 불렸고 이 지방은 고 이집트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750년경 쿠슈인의 왕국이 누비아에서 번영하여 나바타, 메로에 등을 중심도시로서 한때는 이집트, 시리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340년경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쿠슈왕국도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판도는 남 함과 동시에 수도를 나바타에서 메로에로 옮기게 되었다. 쿠슈 왕조는  기원전 350년경 에티오피아 중부를 거점으로 한 크리스트 왕국인 아크삼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후 누비아에 3개의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고, 543년 테오도라  여왕의 보호 하에 이집트에서 크리스트교가 이 지역으로 도입되었다. 639년 이슬람교도가 이집트에 침입하였지만, 누비아왕국은 그들과 협정을 체결하여 그후 6세기간 이슬람  교도의 침입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1250년경, 이집트에 바하리, 아무르크 제왕이 일어나고 북방의 누비아 왕국은 이슬람 교도의 침입과 잡혼(雜婚)에 의해 쇠미하였다. 1504년까지 이어졌던 남방의 왕국도『훈지』라고 불리는 흑인세력에 의해 붕괴하였다. 이 훈지세력은  침입하였던 아랍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센나르 거점으로 중부 및 북부 수단으로 세력을 뻗었지만,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쇠망하고, 이 영역은 소왕국 난립의 상태가 되었다.



근세

1820년 이집트의 지배자 무하마드 알리가 수단에 군대를 파견하고, 1821년에는 센나르와 오베이도를 점령, 카르툼에 수도(首都)를 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하마드 알리의 침입으로 인해 수단은 1874년 이집트에 병합되었다. 이후 1885년까지 이집트의 지배하에서 수단의 무역은 이집트인이 장악하고 상아와 흑인노예의 무역이 성하게 이뤄졌다. 1881년 무하마드 아하마드가 자신을 마하디(이슬람교의 구세주)라고 자칭하고 이집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오베이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증대한 이들은 1883년말 히쿠스 파샤 지배하의 이집트 군을 전멸시키고 수단 전국토 지배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그 세력 하에  넣은 영국은 1885년 마하디군 진압을 위하여 영국의 고든 장군이 파견하였으나, 장군은 카르툼에서 10개월 남짓 포위된 후 전사하였다. 수단의 독립은 마하디의 후계자 압둘라에  의해 영국과 이집트 지배에 저항하여 1898년까지 이어졌지만, 영국의 원조를 받은 이집트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만회하였으며 1899년 영국·이집트 협정성립에 따라 수단은 양국의 공동지배하에 놓여졌다.


현대

1911년 달훌에 반란이 어나 1917년에 진압된 이외에는 1899년부터 1924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시기로 이어졌고, 근대국가로의 기초확립을 위해 각 방면에서 점진적 진보가 보였다.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 주의자의 반발로 1924년 수단총독 리·스톡이 카이로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1952년까지는 수단에 대한  주권을 둘러싼 영국, 이집트  양국간의 항쟁이 이어졌으며 행정기관에 대한 수단인의 진출이 보였다. 또 이 시기에는 1929년의 나일강 협정에 따라 이집트의 나일 수리(水利)권이 확인되고, 1936년의 영국·이집트 공동조약에 따라 이집트의 공동통치의 존속과 그 주목적이 수단인의 복지증진에 있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그후 이집트 측의 수단에 대한 영유권의 주장은 점차 강해져서 1945년부터  동맹조약개정교섭을 행하여 온 이집트는 51년 10월 공동통치협정 및 영국·이집트 공동조약의 파기를 선언하였다.

한편 영국은 이같은 일방적인 파기에 반대하고, 이들 조약은 유효하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2년 이집트에 혁명이 일어나고,  나기브 정권은 前정권의 주장을  받아들여 재차 영국과 교섭하여 1953년 2월『수단의 자치 및 민족자결에 관한 영국·이집트협정』이 체결되고, 이것에 의해 수단은 구체적으로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수단은 3년 이내에 스스로 수단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고 인도인위원을 의장으로 하고 수단, 이집트,  영국, 미국의 위원으로 이뤄진 국제위원회의 감독 하에 1953년  11월 제 1회 의원선거가 이뤄졌고, 이 선거에서 이집트와의 통합을 목표로 한 아즈하리가 이끄는 국민통일당이 승리하였다. 1954년 1월 1일에 소집된 의회에서 아즈하리가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1월 9일 조각이 완료하여 3월 10일 의회가 개원되었다. 영국, 이집트 양국 군은 1955년 11월 15일까지  철수하고, 이윽고 아즈하리는 이집트와의 통합주장을 버리고 1955년 12월 19일 수단의회는 수단을 공화국으로서의 독립을 선언하고 1956년 1월 1일 수단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독립이후의 역사

독립후의 정당정치는 대이집트관계를 둘러싼 정당간의 항쟁이  격화하고, 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1958년 11월 아부드 군사정권의 성립을 야기시켰으며 의회 및 정당은 해산되었다. 아부드 정권은 친이집트정책에 의해 경제 개발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독립이래 남부 3주(洲) 약 3,000만의 비이슬람교도의 자치 또는 분리독립을 구하는 운동은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정부의 이슬람교화정책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인근제국에 약 100만명에 달하는 다수의 이민이  이뤄지기에 이르렀다. 이 남부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964년 10월 카르툼에서의 대학생을 선두로 하는 광범위한 반군사독재운동이 발발하여 아부드의 군사정권은 붕괴하였다. 이  군사정권 타도의 쿠데타는 아프리카에서는 예외적인 민간인에 의한 쿠데타였다.

1965년 4월 제헌의회의 총선거가 행해지고, 운마당 및 국민통일당이 대세를 차지하고, 제  1차 마하쥬브독립내각이 성립하였다. 1967년 6월의 중동전쟁에 즈음해서는 수단의 제 2차 마하쥬브 내각이 전후의 아랍수뇌회의를 주하는 등 외교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였지만, 내정적으로는 정당간의 이합집산과 지도권  다툼, 남부문제, 항구헌법제정을 둘러싼  여야당의 대립으로 정당정치는 재차 위기에 봉착하였다.


니메이리 정치

1969년 5월 25일 니메이리 중좌를 중심으로 하는 육군 중견장교에 의한 무혈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군사정권이 등장하였다. 니메이리를 의장으로 하는 혁명평의회는 전권을  장악하고, 잠정헌법을 정지, 의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명을 수단공화국에서 수단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新정권 최대의 과제는 역대정권이 완수하지 못했던 국민통일 달성과 헌법의 제정이었다. 국민통일에 대해서 니메이리 정권은 1969년 6월 남부자치의 원칙을 선언하고,  1972년 3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이레·세라셰의 중개에 따라 남부 방세력대표와의 사이에  아지스아베베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7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남부 3개 주의 지방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남부와 북부의 문화, 사회의 차이에 따라 야기될 긴장감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헌법 제정에 있어서 니메이리 의장은 1971년 9월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표를 차지하여 대통령에 선출되고 10월 12일 수단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정치기구의 정비에  착수하였고 1971년 10월 혁명평의회를 해산하고 유일한 정치조직으로서  SSU(수단사회주의연합)을 창설하였다. 1972년 1월 SSU입헌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행동헌장, SSU강령, 헌법기본원칙을 채택하고, 또 8월 인민의회설치법 공포, 9월 인민의회가 발족되었으며 1973년  4월 헌법 제정에 성공하였다. 당초에는 용공적인 색채가 짙었던  니메이리 정권은 당면한 적대세력이었던 보수, 종교세력을 1970년 3월 이마무·마하디의  본거지인 아바섬을 공략하여 소토함과 동시에 대공산권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차차 니메이리 의장 등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와의 반목이 높아졌으며 1970년 11월  공산당 신파로 보였던 누르중장 등 3명의 평의원이 추방되었다. 또 마하쥬브 공산당 서기장도 체포되었으며 1971년 2월에는 공산당의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1971년 7월 19일 반격을 계획하였던 아타소좌 등 우익군인의 쿠데타로 인하여 니메이리 의장은 일시 정권에서 쫓겨났으나 리비아 등의 개입으로 인해 3일후 역(逆)쿠데타에 성공하여 즉시 공산주의자에 대한『피의 숙청』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니메이리 정권은 좌우의 적대세력을 극복 고 또 1972년 2월 아바스  국방장관, 3월 아우다라 부통령, 제이드 SSU서기장 등을 해임시킴으로써 정권내부의 권력투쟁을 이겨냈다. 또  니메이리 정권은 1967년 단교하였던 미국과의 수교를 1972년 7월 복교하였으며 여기에 동반하여 대이집트 관계가 악화되었고, 9월 우간다의 아민 정권 지원에 대한 리비아 공군기의 카르툼 공항 강제착륙사건,  1973년 3월의 팔레스티나·게릴라『검은 구월단』이 미국 대사들을 살해하였던『카르툼  사건』과 그 처리문제, 국내적으로도 국민경제의 핍박, 부부흥문제, 9월 카르툼대학소요사건 등 여러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전체결과 헌법제정이라고 하는 2대 실적에 따라 대개 안전하게 추이하였다. 또 1980년 5월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트 원수의 내방, 11월의 니메이리 대통령의 에티오피아 공식방문 등 수단·에티오피아 양국관계는 진전하였다.

1983년 4월 니메이리는 대통령에 3선되었으며 이해 6월 남부 3주를 분할하고, 9월에는 샤리아법(이슬람법)을 도입하는 등 이슬람색을 강화하였지만, 이에 반발하는 남부의 반정부 력인 유력흑인부족 딩카족(크리스트 교도)을 주체로 하는 인민해방군(SPLA)의 게릴라 활동은 확대되었다. 1984년 4월 29일 니메이리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데모·집회 등을  금지하고 오지 등의 사회부정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수단인민해방전선(SPLA)이라고 자칭하고,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쟈에서 2번에 걸쳐 개최하였던 평화회담도 실패하게 되었다. 또 1984년에는 가뭄과 에티오피아 난민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적인 문제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85년 3월 니메이리 대통령은 민간 최대의 지지 모체인 무슬림 동포단의 세력대두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同 동포단과의 결별을 계획하고 약 200명의 동포단원의 체포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지모체를 잃은 가운데 니메이리 대통령은 1985년 3월 23 재정 재건의 일환으로서 빵 가격의 대폭 인상을 발표하였다. 이때까지 경제적  피폐에 허덕이던 국민의 불만은 빵가격의 인상을 계기로 한층 높아지고, 27일 니메이리 대통령의 방미 직후 이들 불만이 단숨에 폭발하여 반정부 데모 등의 국민에 의 소요, 의사. 변호사 등 인텔리 층의 총동맹파업 등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런 사태 수습을 위해 1985년 4월 6일 다하프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니메이리 정권은 붕괴하였다.


마하디 정치

니메이리 정권 붕괴후 정권을 장악한 다하프 장군을 의장으로 하는 잠정군사평의회는  1985년 4월 남부분할법폐기선언,  1985년 5월 샤리아법정폐쇄선언  등의 新정책을 펼치고,  다음 1985년 12월 국명을 現국명인 수단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1986년 4월부터 5월에 거쳐 민정이관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1986년 5월 15일 총선거의 결과 상위를  차지하였던 운마당(UP)과  민주통일당(DUP)연립의 사딕·알·마하디 운마당 당수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발족하고, 여기에 군사정권에서 민정으로의 이관이 실현되었다. 이 정권은 남부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 문제의 해결  및 新샤리아(이슬람법)의 제정 등을 국내정책의 중요과제로서 걸었지만, 정당간의 알력, 각내 불통일 등에 의한  1987년 5월 마하디 수상은 내각 개조를 행하고, 6월 제 2차 마하디 정권이 발족하였다.제 2차 정권도 성립직후, 교육용 교재부족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항의데모, 또 이 데모와 동시에  니메이리 복귀를 부르짖는 니메이리  잔당의 암약, 비상사태선언의 포고  등에서 정권으로 크게 흔들렸다. 이어 1987년 7월 주권평의회 의원의  인선문제를 계기로, 연립정권제일당(第一黨)인 운마당(UP)과 제 2당인 민주통일당(DUP)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이 일어나자, 1987년 8월 22일에 이르러 마하디 수상은 운마당과 민주통일당의 연립을 해소한다는 뜻을 언명하였다. 계속해서 운마당을 중심으로 민주통일당(DUP), 이슬람국민전선(NIF)등  주요정당의 사이에서 이후의 정국운영에 대한 의논이 행해졌으며, 1988년 4월 이들 주요 정당간에 국민화해헌장을 작성, 서명하였다. 이 결과 동년 5월 15일  제 3차 마하디 정권이 탄생하였는데, 이 정권의 최대 특색은 이때까지  제일야당이었던 이슬람국민전선(NIF)이 여당으로 입각하였으며 역으로 이때까지 여당이었던 남부출신정당은 정당 내에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일부정당 야당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바시르 정권

1989년 6월 30일  바시르 준장이 민족이슬람전선(NIF)과  제휴하여 무혈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비상사태를 선언, 자신들이 국가원수, 혁명위원회 의장, 수상,  국 장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바시르 의장은 헌법정지, 정당, 의회, 노동조합의 해산을 실시하였으며 군기관지를 제외한 全紙의 발행을 일시 정지하고, 前  수상들 약 50인의 정치가를 체포하였다. 바시르 정권은 NIF의 주장에 따라 이슬람화를  진, 원리주의의 이란과 관계를 심화하였다. 1991년 3월에는 크리스트교 교도가 다수파의 남부 3주를 제외하고 이슬람법에 기초한 新형법을 시행하였고 1992년 2월 잠정국민의회를 소집하였다.

1989년 쿠데타이래, 최고기관이었던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민정이관에 의해  해산하고, 이 권한은 내각에 이양함으로써 바시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후반부터 남부에서 이슬람 교도가 주도하는 바시르 정권과 SPLA과의 출동이 격화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중개에 따라 평화교섭으로 1992년 6월 정부와 SPLA는 내전종결을 강조하였던 초기의 공동성명에는 조인하였지만, SPLA의 분열이 일어나고 남부의 전투가 확대되자 평화교섭은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바시르 정권의 내정 기조는 남부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재건(특히 대외누적채무문제 해결), 신샤리아법 제정, 니메이리 前정권의  잔재 배제 등에 두고 있다. 독립이후 북부의 아랍계 주민과 남부의 흑인계 주민 사이의 대립은 중대한 국내문제였지만 이후 정부와 반정부세력과의 사이에서 화해가 성립하고 있다.


3. 정치 /군사

정치 : 1899-1956년까지 이집트와 영국의 지배를 받음.  1956년 독립이후 겨우 7년 간 문민 통치가 있었다. 1955-1972년에 걸쳐 북부 아랍인과 남부 분리주의자 간에 혹독한 전쟁이 벌어짐. 12년 간의 불안한 평화이후 남부에 다소의 자율권이  주어졌으나 1983년에 전쟁이 재발함. 회교 극단주의 집단이 부상하면서 1991년에 모든 국민에  대한 회교법의 적용을 강요함. 이란은 수단을 기지로 삼아 남부는 군사력으로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북아프리카국가는 전복으로 근본주의 혁명을 확산하려 하고 있다.

군사력 : 육군 119,500명, 해군 1,500명, 공군 3,000명 (별도 민병대 70,000명 추정)수단  남부와의 민족, 종교 전쟁으로 매년 징집.


4. 경제

경제: 풍부한 농업과 광물자원. 소수회교집단이 경제의 통제권을 쥐고 회교 개혁을 강요했으며 나라전체를 경제적인 파산으로 몰고 가는 남부의 비 회교 지역에도 이러한 개혁을 강요하고자 했다. 리비아와 이란의 대량 원조로 정부가 유지되고 있다. 1992년에는 가뭄과  전쟁으로 인한 기근으로 전 인구의 약 60%가 영양실조와 기아로 고통받았으며, 정부가 그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하여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원조를 하지 않아  상황은 더 악화됨.

1인당 외채 $328 1인당소득 $420

* 물질적인 필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르툼, 주바(남부의 수도) 그리고 주변지역과 숲속에 피난해 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 많지만 전해지는 구호품은 거의 없다.  풍토병으로 진료가 필요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약이 거의 없다.


5. 사회/문화

가. 주재국 언론 매체


- T.V. : 국영 수단 T.V. (아랍어 및 컬러방송)

- Radio : 국영 수단 Radio (중파 및 아랍어 방송)


- 주요신문 (아랍어)

Sudan News : 관영통신, 6,250부, 일간

Al Anbaa News : 정부통제하 발간, 800부,  일간 (Al Sudan Hadith 는 97.5.19  폐간, 상기 신문으로 발간)

AL WAN(일간), AKHBAR AL youm(일간), AL RAI ALAKHAR (일간),  AL SHARI AL SIYASSI(일간)

- 주요신문 (영어)

Sudan News Agency(SUNA) : 관영통신, 일간

A1 Anbaa(주간)

Sudan Now : 정부통제하 발간, 격월간

- 위성방송 청취가능 : 주재국 방송국에 위성방송(유선) 신청즉시 설치해 줌 (CNN, BBC와 다수 아랍어 방송 청취 가능)


나. 종교활동


○ 주재국은 회교국이나, 타종교 신앙 제약 없음.

- 신도수 30여명의 한인교회가 한군데 있음.

- 미국목사가 담임인 외국인 교회 한군데와 이태리 신부들이 사역하는 카톨릭 교회가 몇군데 있음.


다. TIP 제도 : 짐 운반등에 0.5불 정도임

라. 미용 및 이발

- 자가 이발이 바람직하나, 부득이 한 경우 호텔 이발소 이용

- 외국인이 사용 가능한 미용원은 1개소 있음.

마. 기타 추가 사항

- 모랫바람으로 인해 청소가 수시로 필요함으로 현지인 고용 필요, 인건비 저렴

- 가정부, 운전수, 경비원 등 2-3명 고용 (인건비는 월 각50불 정도)

6. 교민현황

체류자 : 약 130명 정도

수도 카르툼 지역 거주 : 120명

포트수단 거주  : 21명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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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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