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재의 모습은 2개의 아프리카너 공화국이었던 트랜스발(Transvaal)과 오랜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가 영국의 식민지로 된 앙골로-보어전쟁(Anglo-Boer War ; 1988-1902) 이후 191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12년에 아프리카인 행동주의자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 ; ANNC)를 결성했으나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로 바꾸었다.

1920년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이전에 독일이 지배하던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위임통치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던 바소토랜드(Basutoland), 베추아나랜드(Bechuanaland), 그리고 스와질랜드(Swaziland)와 로데지아를 소위 남아연방(South African Union)으로 편입시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격적인 확대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스와질랜드를 남아연방으로 통합시키는데 반대했다. 비록 영국이 모든 보호령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른 나라에 둘러싸인 위의 나라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적 팽창은 엄청난 광물자원, 특히 19세기 다이아몬드와 금의 발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 2차대전의 발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업화를 강요하였고, 도시화된 흑인노동자와 그 취약성에 대한 의존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발전된 흑인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흑백정책을 옹호하였고, 다양한 사람 사이에는 특징적 차이가 있으므로 각각의 집단들은 자신의 “고국(homeland)”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타 인종간의 결혼(백인과 흑인간의 결혼)은 불법이었고, 아프리카인은 태어난 곳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948년 이후 부도덕 법(Immorality Act)을 포함하여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 제시설분리법(Separate Amenities Act), 그리고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은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을 강화시켰다. 1959년에 나온 반투 자치촉진법(Promotion of Bantu Self-Government Bill)은 반투스탄(Bantust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 자치 흑인구역)에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준다고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1960년 3월 21일 샤퍼빌(sharpeville)에서 패스법(pass laws)에 반대하는 평화로운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67명의 아프리카인이 살해되었다. 수상인 페르부어르트(Verwoerd)의 대응은 백인들의 표를 잡는 것이었고,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을 선포하였다. 페르부어르트는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정치적인 삶으로부터 제외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4년 구속되었다.

포르투갈에서의 구데타는 1974년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독립을 선언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던 남아공은 MPLA대신 구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고 있던 UNITA를 무너뜨리기 위해 앙골라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나미비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SWAPO가 나미비아에 배치된 남아공 군대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동안에 사모라 마첼(Samora Machel)이 이끄는 FRELIMO가 권력을 잡고 로데지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여 이안 스미스 정권에 게릴라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잠비크에 기지를 제공하였다.

1976년 남아공은 소웨토(Soweto)반란을 겪게 되는데, 점차적으로 흑인들의 저항이 심각하게 거세어져 갔으며 백인들은 나라가 재앙에 빠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1989년 UN의 지지를 받은 자유선거가 나미비아에서 치러졌으며, 1990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1990년에 남아공은 나미비아와 앙골라로부터 물러났다.

드 클레르크(De Klerk) 정부는 ANC를 공인하고, 1990년 2월에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범 아프리카회의(Pan African Congress ; PAC)와 ANC, 줄루족이 중심이 된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인종차별주의정책은 철폐되었고, 총선이 1994년 4월에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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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최초의 거주민은 코이산(Khoisan)족으로 그들은 채집과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약 1700년 전 반투(Bantu)족이 북으로부터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반투족은 철제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고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주민인 코이산 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488년 현재의 남아프리카 연안에 포르투갈의 선원이 도착했지만 첫 번째 정착은 1657년에 현재의 케이프타운(Cape Town)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에 의해 이루어졌다. 케이프타운 정착지는 네덜란드의 배가 인도를 항해하는 도중 정박하여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기항지로 건설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보어(Boer ; 농민을 의미)인으로 불렸고 후에는 아프리카너(Afrikaner ;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또는 네덜란드계를 의미)로 불리기 시작했고 땅을 소유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95년과 1814년 2회에 걸쳐 케이프를 점령했고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로 만들었다.

많은 보어인들이 1836년부터 영국의 통치에 분개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k ; 1830-1840)를 시작했다. 도중에 그들은 반투족들의 저항에도 부딪혔으나, 그들은 나탈(Natal), 오렌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 트란스발(Transvaal)에 새로운 국가를 설립했다. 영국은 1843년 나탈을 합병했으나 1852년 트란스발, 1854년 오렌지자유주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아프리카너와 영국인들은 내륙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금 그리고 다른 값비싼 광물들이 발견됨으로서 경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보어전쟁(Anglo-Boer War)이 1880-1881년과 1899-1902년에 벌어졌다. 1910년 영국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케이프 식민지, 나탈, 오렌지 자유주, 트란스발 등 4개 국가를 통합하여 특수 자치를 하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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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5. “인종의 분리 발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아프리칸스어로 분리(apartness)'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는 1948년부터 1991년까지 남아공에서 시행된 인종격리, 차별, 그리고 백인의 통치를 일컫는 정책이다.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소개되기까지 인종차별주의적인 정책들은 남아공에서 300년 넘게 시행되었다. 17세기 케이프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현지 코이코이인들과 준 노예관계를 성립시켰다. 보어인들은 값싼 농장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와 다른 지역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를 빼앗았다. 1807년 노예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지만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고 1820년 약 4000명의 영국인들이 케이프로 이주해왔다. 합법적인 노예구매와 무임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됨으로서 아프리카너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1833년 영국 노예제도 폐지로 이어졌다. 다른 변화와 함께 이러한 상황은 아프리카너의 생활방식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고 1836년 그들은 영국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 살기위해 아프리카 내륙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대이주(Great Trek) 과정에서 세워진 아프리카너 공화국은 당연히 아프리카너 자결권과 원주민을 통치할 권리를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게 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아몬드와 금 매장량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남아공를 무력으로 정복했다. 앙골로-보어전쟁(Anglo-Boer War ; 1899~1902)에서 아프리카너들이 패배했다. 그러나 전쟁 중 영국인들의 잔혹성에 대한 영국에서의 자유주의 반동은 앙골로-보어 우호관계를 만들기를 촉구했다. 1910년 영국 식민지들과 아프리카너 공화국들은 백인이 통치하는 남아연방(Union of South Africa)으로 통합되었다. 아프리카너인 루이스 보타(Louis Botha)가 첫 수상이 되었다.

수년 후 대부분이 농부이거나 도시 노동자의 하층민이었던 아프리카너들은 이익이 많이 나는 채광산업, 숙련된 전문가, 군대 그리고 공무원으로 일하는 영국인들에 대해 분개했다.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영국인의 제국주의와 통치의 결과 출현하게 되었고 폭넓게 발전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아프리카너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1912년 국민당(National Party)이 만들어 진 이후 흑인들에 대해 그 화살이 돌려지게 되었고 1924년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영어를 사용하는 남아공인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데 있어 아프리카너와 결탁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1934년 국민당(NP)은 아프리카너와 영어사용 백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은 당과 합당하여 연합당(United Party)을 만든다. 국민당의 나머지 추종자들은 부르더르본드(Broederbond ; 영향력 있고 비밀스런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 모임)와 다니엘 프랑소와 말란(Dr Daniel François Malan)이 이끄는 다른 극단주의 아프리카너에 의해 부활되었다. 이 ‘순수한 국민당’은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다. 말란은 모든 흑인을 특별 보호지로 보내고 오직 백인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신이 명령한 ‘흑인들로부터 문명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이 메시지는 직업상 흑인 다수와의 경쟁에 두려워하던 많은 백인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종차별정책은 또한 광산주와 백인농민에게 그들의 유리한 지위를 지속하게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환영받았다. 값싼 흑인 노동력을 이주 노동자로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종차별정책은 남아공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져 온 인종적 격리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법에 의해 강제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후에 반투족(Bantu)) 문제 장관(Ministry of Native Affairs ; 1910년 처음으로 만들어짐)인 헤르초그(J,B,M Hertzog)는 인종차별정책의 뼈대를 형성하는 정책과 법을 기안하기 시작했다. 비록 많은 정책들이 1948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이후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되고 강제되었다.

인종차별의 핵심은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백인들만 가진다는 것이다. 다른 인종차별정책들과 마찬가지로 투표권 역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처음으로 세워진 아프리카너 공화국은 오직 아프리카너 남자만 투표하도록 허가했다. 또한 영국인은 케이프 이외 지역에서의 흑인 투표권을 부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케이프 안에서도 교유과 재정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소수만이 투표권을 갖을 수 있었다. 인도인과 칼라드 투표자는 1983년에 3원제 의회제도에 의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의미가 없는 숫자였으므로 백인 통치와 지배는 계속 될 수 있었다. 백인을 제외한 그 어떤 인종도 자신들의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재배치 정책은 흑인들이 백인 도시에 밤새 머무르는 것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도시지역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13년 원주민 토지법(Native Land Act)이 제정된 이후 남아공 흑인들은 원주민 보호지(native reserves)에서만 땅을 사거나 빌려주는 것이 허락되었다. 인구의 60%가 넘는 인원이 고작 전 국토의 7.3%(후에 13%로 증가)에 살도록 제한되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됨으로서 흑인들은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손을 필요로 하는 백인들을 위해 일해야만 했다. 1948년 집단 지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공식적으로 지정된 각각의 인종들이 각각의 주거지역과 업무지역에 살게 되었고 이를 위해 강제적으로 이주시겼다.

1960년대까지 보호지는 많은 인구에 자원은 부족했으며 기아가 만연함으로서 살아가가 어렵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9년 260개의 보호지가 몇 개의 홈랜드(Homeland) 또는 반투스탄(Bantustan)으로 지정되었다. 분리주의정책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흑인의 60%가 백인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나 1960년에서 1983년 사이 약 3백만 명이 반투족의 자치구로 퇴거당했다.

인종장벽(color bar)은 숙련된 기술자로 일하는 것과 같은 많은 행위에 있어서 대다수 흑인들의 진출을 방해했다. 예를 들어 비공식적인 인종장벽은 광산업에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흑인들이 저임금 수공작업에 머물렀던 반면 백인은 감독직과 숙련직을 차지했다. 1922년 흑인들을 관리직으로 승진시키려했을 때, 백인 광산업자들에 의해 거의 내전에 가까운 파업과 데모가 발생했다. 2년 후 국민당은 백인노동조합의 지지로 힘을 얻게 되었고 즉시 인종장벽을 합법화 하였다.

1955년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이 통과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대신 낮은 수준의 교육이 원주민(반투족)부(Department of Native (Bantu) Affairs)에 의해 승인되어 제공되었다. 이에 따르지 않은 학교는 폐교되었고 저항하는 교사는 해고되었다.

이 법령 하에 남아공인들은 그들의 신분증은 ‘인종’에 의해 분류되고 기재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어느 지역에서 살 수 있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누구와 결혼할 수 있는지 따위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다.

첫 번째 통행법(pass law)인 호텐토트 조약(Hottentot Code)은 1809년 영국인에 의해 케이프 식민지에 소개되었다. 이 법령은 모든 코이코이족들은 지정된 거주 지역을 가지며 여행할 때에는 고용주의 확인을 요구했다. 이 법은 코이코이인들이 통행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너들의 농장에서 강제로 일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영국 이주자들을 위한 이동 가능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이 법은 몇 년 후 폐지되었지만 이 법은 이후 제정되는 많은 법의 시초가 되었다. 통행법은 흑인들을 백인들의 도시에 접근할 수 없도록 했으며 다른 흑인들을 홈랜드로 강제로 돌려 보낼 수 있었으며 백인들에게 계속적인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부강하고 잘 무장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보호하기 위해 이웃하고 있는 국가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협박, 파괴, 군사행위 그리고 전복 같은 방법이 정권을 흔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남아공은 이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이에 따라 불법적인 로데시아(Rhodesia ; 현재의 짐바브웨(Zimbabwe) 백인정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적들의 게릴라 토대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핑계로 남아공은 많은 이웃 국가들을 침략했다. 앙골라(Angola)는 침략당하고 파괴되었으며 모잠비크(Mozambique)의 반란군을 남아공이 지원함으로서 오랫동안 내전이 지속되었다.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쟁지역으로부터 발생한 피난민의 유입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나미비아는 1990년대까지 불법적으로 남아공에 의해 점령당했고 인종차별정책이 실시되었다. 남아공은 경제적으로 남아공의 온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던 레소토와 스와질란드에게 지지자의 역할을 강요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경봉쇄 정책을 사용했다.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반대는 모든 인종에게 그리고 많은 형태로 널리 퍼졌다. 첫 번째 조직된 저항운동은 1893년에 나탈에 와서 1914년까지 머물렀던 인도인 변호사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에 의해 이루어졌다. 간디는 비폭력적인 방법과 법에 대한 호소로 훗날의 운동에 귀감이 되었다. 192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된 남아프리카 원주민 회의는 1912년 형성되었다. 첫 번째 지도자 존 듀베(John L. Dube)는 영국인에게 항의하고 법정에서 부당한 법에 대항함으로써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정부의 완강한 거부는 좀 더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방법을 야기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1944년 안톤 렘베데(Anton Lembede)가 청년 연맹(Youth League)을 창립함과 함께 대규모의 대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넬슨 만델라, 월터 시술루 그리고 올리버 탐보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공적인 대중 정치 동원의 첫 번째 예 중 하나는 1952년의 불복종 운동(Defiance Compain)이다. 인도인과 다른 집단들 그리고 훈련된 지원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전국에서 부당한 법들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폭력의 발발 후에 중지되었다. 정부에 의한 보복은 종종 가혹했다. 인종차별로 인해 야기된 사회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병력을 증가시켰다. 고문과 스파이들이 널리 이용되었고 경찰의 감금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기위한 정치적 활동의 제한과 금지같은 보다 인도적인 통제 방법들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1961년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의장이었던 올리버 탐보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해외지국 설립을 위해 남아공을 떠났다. 그는 잠비아(Zambia)의 루사카(Lusaka)에서 게릴라전을 계획하고 재정을 확보했다. 같은 해, 만델라는 남아공 정부에 대화를 촉구하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설들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움콘토 웨 시즈웨(Umkonto we Sizwe ; 민족의 창)운동을 발족시켰다. 이 결과 만델라와 시술루는 1964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76년 아프리칸스어로 반투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부 발표로 인해 소웨토(Soweto ; 요하네스버그 남서 지구(The southwestern township of Johannesburg)의 약자)의 학생들은 봉기하였다. 항의는 확대되었고 파업은 요하네스버그를 마비시켰다. 경찰의 발포로 1976년 말까지 어린이를 포함해 500명이 넘게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저항세력 지도자들은 비폭력 방식을 수용했지만(데스몬드 투투는 그의 비폭력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운동방식은 때때로 다른 이들에게 부정되었다. 많은 사건이 정부 비밀요원에 의해 선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뿐 아니라 민족 집단에 의해 실시된 인종차별정책은 불가피하게 흑인과 흑인(black-on-black)의 폭력을 야기했다. 부텔레지(Buthelezi)의 줄루 인카타(Zulu Inkatha)운동(1928년 조직되고 1975년 다시 소집되었다)과 만델라의 움콘토는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일원들은 종종 많은 문제에서 충돌하였다.

도덕성에 대한 무관심, 정부의 경제적 위기는 많은 위기상황을 불러왔다. 1948년 선거 이전에도 격리주의 정책이 가져오는 문제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정부는 보호지에 추방된 흑인 노동력이 경제발전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흑인 노동력은 잘 교육받고 효과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했지만 인종차별정책하에서는 불가능 했다. 특히 건설 분야 고용주들은 자주 발생하는 결원을 채우기 위해 인종장벽을 무시했다. 1960년 샤퍼빌 학살과 1976년 소웨토 봉기 이후 해외투자는 중단되었고 자금은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집값과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그리고 사업들은 무너졌다. 많은 방면에서 인종차별은 경제적으로 타당치 않았다. 또한 국내와 국외로부터의 압력은 인종차별정책을 더욱 쓸모없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UN으로 결합하면서 남아공의 발전에 대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요구했다. 1985년 국제은행들은 남아공에 대한 제제를 가하게 되었고 대출은 연장되지 않았고 약속대금은 인출되었다. 1990년 만델라가 풀려났고 1991년부터 모든 인종차별 법률이 폐지되었다. 마침내 1994년에 첫 비 인종 선거가 남아공에서 실시되었고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인종차별이 창출한 불평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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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4. 남아프리카의 주요 정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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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3. 남아프리카 원주민 국민의회(South Africa Native National Congress)

인종차별에 대한 조직화된 첫 번째 저항은 1873년 에 나탈(Natal)에서와서 1914년 까지 머문 인도의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가 이끌었다. 1873년 나탈에 도착한 간디는 1914년까지 남아공에 머물렀고 간디에 의한 비폭력적 저항방법과 법에 의한 저항은 이후 저항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1912년 1월 세워진 이 조직은 192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gress ; ANC)가 되었다. 이 조직의 첫 번째 지도자는 존 랭갈리발렐레 두베(John Langalibalele Dube) 의장, 월터 벤슨 루부사나(Walter Benson Rubusana) 부의장, 솔로몬 체키쇼 플라게(Solomon Tshekisho Plaatje) 사무총장, 픽슬리 칼나카 세메(Pixley Kalsaka Seme) 회계원등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조직은 영국에 호소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당하지 않은 법에 대해 법정에서 항의함으로서 변화를 모색했다. 개혁에 대한 정부의 거절은 이 조직이 더욱 더 호전적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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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2. 종족

1.1.1.1. 2.1 아프리카너(Afrikaner)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는 네덜란드와 아시아를 항해하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기항소로 희망봉을 선택했다. 1688년 156명의 프랑스 신교도(Protestant)의 피난민인 위그노(Huguenot) 기독교인들이 케이프에 정착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케이프타운 주위에 농장을 설립하고 통행하는 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했다. 이주자의 후손들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프리카너(Afrikaner)로 불렸고 이 용어는 1707년 처음 기록에 보인다. 19세기 초기까지 아프리카너라는 용어는 유럽인 후손들은 물론이고 유럽인∙아프리카인∙말레이시아인 혼혈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후에 백인(Whites)으로 불렸던 혼혈조상의 후예들은 칼라드(Coloreds)라고 불리게 되었다. 많은 아프리카너의 자손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많은 인종의 혼혈이 일어났다.

수년간, 네덜란드 당국과 보어(Boer ;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며 역사적으로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불림)인사이의 긴장이 계속되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하였다. 내륙지역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나아가 아프리카너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06년 영국은 케이프타운을 정복하여 영속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의 통치하에 살고 싶어하지 않았던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1830년대에 북쪽과 동쪽 내륙지역으로 대이주(Great Trek)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주자들을 푸어르트래커(Voortrekker ; ‘먼저 떠난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렸으며 이들이 이주와 정착과정은 반투 아프리카인들과 계속적인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보어인들의 승리는 ‘신의 신성한 개입’의 증거로서 후손들에게 지금까지도 기념되고 있다. 1838년 피의 강(Blood River) 전투에서 500명의 보어인들이 10,000명의 줄루(Zulu)족을 무찌른 승리는 신과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특별히 아프리카너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푸어트래커는 대이주의 결과 트란스발(Transvaal), 오렌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 그리고 나탈리아(Natalia) 등 보어공화국을 건설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이 공화국들을 합병하지만 후에 지금의 나탈(Natal)이 된 나탈리아를 제외하고 독립을 한다. 1886년 트란스발에서 금이 발견되어, 부를 찾는 수천 명의 탐색 자들이 몰려들었다. 영국이 트란스발에 영국군을 보냈을 때 그들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결과적으로 보어전쟁(Boer War ; 1899-1902)이 발발하게 된다. 오늘날 까지도 아프리카너들은 영국에 의해 전쟁으로 약 7,000명의 남자들이 사망했고 또 집단 수용소(Concentration Camps)에서 18,000명-28,000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영국의 가혹한 처우로 인해 죽어간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1948년 국민당(National Party)은 가난하고 시골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너들의 지지에 의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분리 발전(separate development’,라는 의미의 인종차별정책)는 정부의 주된 정책으로 채택된다. 이러한 정책은 많은 부분들이 독일 나찌의 이념을 받아들여 만들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너들은 인종차별정책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몇몇은 맹렬하게 비판하였으며, 비인종적인 교회, 불법화된 공산당(Communist Party), 또는 아프리카 민족의회(ANC)의 활동에 참여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몇몇은 국외로 추방되거나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91년 개혁된 국민당은 정부는 모든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고 1994년에는 남아공의 첫 번째 비 인종선거가 치러져 아프리카너의 지배와 통치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너들은 자신들을 아프리카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미래에 남아공에서 경제적으로 특권을 가진 소수의 인종집단으로 남고 싶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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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 최근의 역사

1912년, 남아프리카에서는 백인들의 통치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은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가 만들어지면서 구체화되었다. 다른 중요한 사건은 1914년의 국민당(National Party)의 출발이다. 이 정당은 제 2 차 보어전쟁에서 영국의 승리에 분개하는 아프리카너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World War Ⅰ)에서, 남아프리카는 남서아프리카(South West Africa ; 지금의 나미비아(Namibia)를 점령했고, 전쟁 후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은 남서아프리카의 통치를 남아프리카에 위임했다. 남아프리카는 또한 동맹국과 함께 제 2차 세계대전(World War Ⅱ)에서 독일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1948년 국민당은 의회의 선거에서 승리했고, 수상인 다니엘 말란(Daniel Malan)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인종 정책으로 “분리 발전(separate development)"이라는 의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한다. ANC는 흑인, 유색인종, 아시아인, 백인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국민당이 도입한 인종차별 법에 강하게 저항했고, 국제적인 비난도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1961년 남아프리카는 광범위한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공화국이 되었다.

1984년 남아공은 3원제 의회를 설립했는데, 백인, 칼라드, 그리고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의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의회 제도에서 흑인들의 대표는 인정받지 못했다. 흑인들은 ‘독립’을 획득한 홈랜드(Homeland)에 투표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은 허울좋은 명목상의 독립이었고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영연방,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그리고 미국의 압력은 남아공의 경제에 치명적이 타격을 주었다.

1989년 프레드릭 윌리엄 드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ANC와 대화를 시작했다. 1990년에는 나미비아가 독립을 하였고 ANC가 합법화되었다. 정부는 1962년 이후 수감되었던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석방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법은 1992년에 만들어진 새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1994년 남아공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선거를 치루었다. ANC에서는 다수당이 승리하고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었다. 만델라의 지도력은 이전의 적들과 좌우로 고립된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화해(reconciliation)” 정책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999년 만델라는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총선에서 ANC에서 66.4%의 득표를 얻어 타보 음베키(Thabo Mbeki)가 2대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다. 음베키는 대부분의 흑인이 겪는 빈곤과 높은 범죄율 그리고 높은 AIDS 감염율과 싸우고 있다. 2000년 UN의 보고에 의하면 거의 10센트의 인구가 감염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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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최초의 거주민은 코이산(Khoisan)족으로 그들은 채집과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약 1700년 전 반투(Bantu)족이 북으로부터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반투족은 철제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고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주민인 코이산 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488년 현재의 남아프리카 연안에 포르투갈의 선원이 도착했지만 첫 번째 정착은 1657년에 현재의 케이프타운(Cape Town)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에 의해 이루어졌다. 케이프타운 정착지는 네덜란드의 배가 인도를 항해하는 도중 정박하여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기항지로 건설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보어(Boer ; 농민을 의미)인으로 불렸고 후에는 아프리카너(Afrikaner ;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또는 네덜란드계를 의미)로 불리기 시작했고 땅을 소유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95년과 1814년 2회에 걸쳐 케이프를 점령했고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로 만들었다.

많은 보어인들이 1836년부터 영국의 통치에 분개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k ; 1830-1840)를 시작했다. 도중에 그들은 반투족들의 저항에도 부딪혔으나, 그들은 나탈(Natal), 오렌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 트란스발(Transvaal)에 새로운 국가를 설립했다. 영국은 1843년 나탈을 합병했으나 1852년 트란스발, 1854년 오렌지자유주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아프리카너와 영국인들은 내륙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금 그리고 다른 값비싼 광물들이 발견됨으로서 경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보어전쟁(Anglo-Boer War)이 1880-1881년과 1899-1902년에 벌어졌다. 1910년 영국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케이프 식민지, 나탈, 오렌지 자유주, 트란스발 등 4개 국가를 통합하여 특수 자치를 하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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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은 수년간 남부 아프리카 지역(Southern Africa)을 지배해왔다.

1915년부터 -비합법적으로는 1969년부터- 1990년까지 나미비아(Namibia)를 점령했고, 모잠비크(Mozambique)와 앙골라의 반란세력을 지원했다.

또한 1980년에 로디지아(Rhodesia)가 짐바브웨(Zimbabwe)라는 독립국가로 해방되었을 때까지 로디지아의 백인소수정권을 도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주변국가의 정치상황에 개입한 것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지속시키기 위한 전략적 일환이었다. 그러나 1994년 이래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정부는 인종적 반감을 화해와 협력관계로 대체시키려는 시도를 한 반면에, 다른 아프리카 지역분쟁에 대해서는 중재자로서 개입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정책의 불평등으로부터 발생한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1993년에는, 백인들이 국가 재산의 88%를 통제하는 반면에, 남아프리카의 거의 절반가량의 사람들은 한 가구당 한 달에 200달러도 되지 않는 수입으로 낮은 생활수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가장 안정적인 민주주의국가 중 하나인, 광산물이 풍부한 보츠와나(Botswana)와 나미비아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높은 국민총생산(GNP)을 창출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가장 가난한 국가는 모잠비크와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인데, 그들의 경제는 자급자족적인 농업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잠비크의 경제는 내전과 가뭄으로 인해 산산이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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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아공 대통령 타보 음베키가 축출된 이후 불안하게 유지되어 오던 남아공 집권당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분열되는 수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분열되는 수순을 보여주는 사건은 최근 전 국방부장관인 모시우오아 레코타(Mosiuoa Lekota)가 ANC 집행부에 대해 공개 서한을 보내는 형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촉발되었으며 이는 타보 음베키 측을 중심으로 새로운 당의 창당을 위한 수순으로 보고 있다.

ANC 집행부는 교통부 장관인 제프 라데베(Jeff Radebe)가 레코타의 공개서한에 대해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ANC 전국집행부는 이와 같은 행위가 당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소식통들을 종합해 보면 새로운 당의 아이디어가 타당성을 얻어가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비록 레코타가 자신은 ANC의 충실한 당원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남아공 최대노동조합인 남아프리카 노동조합(Cosatu) 사무총장 제웰린지마 바비(Zwelinzima Vavi)는 새로운 당을 만드는 운동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레코타를 비난하였다.

새로운 정당의 형성에 대한 결론은 또한 남아공 전역에서 발견되는 핸드폰 문자메시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핸드폰 문자메시지 내용은 아프리카민족회의-민주전선(ANC-DF) 설립이라는 문구를 통해 새로운 당을 만든다는 것으로 이 문자메시지는 림포포, 프리스테이트, 이스턴 케이프, 노던 케이프, 웨스턴 케이프 그리고 노쓰-웨스트 주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문자메시지는 “하우텡 주에는 핵심인원이나 재원들이 풍부하며(전직 하우텡 주지사 음바지마Mbhazima), 줄루-나탈 주와 음푸말랑가 주는 이미 많은 핵심인원들이 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전해 볼만하다. 위대한 역사적 움직임의 한 부분이다” 등의 내용들이 퍼지고 있다.

레코타는 ANC의 반민주주의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 주마를 중심으로 한 ANC내 강경파들은 사법부와 기타 기관들에 대해 존경하지 않고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후손들에게 민주주의를 물러주지 못할 것이라며 비난하였는데 이는 ANC를 공격함으로써 결별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엿볼 수 있다.

레코타는 계속 자신은 충실한 ANC 당원으로 남을 것이라고 반복하지만 많은 분석가들은 레코타와 그와 함께 했던 전직 차관인 조오지 등은 지난해 ANC 당의장 선거에서 음베키의 주요 지지 운동가들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정당의 창설에 깊이 연루되어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뭏턴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랜 정당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1994년 이후 남아공 집권당으로 존속하고 있는 집권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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